ABOUT WHAT WE WRITE

우리가 쓰는 것들

BOOK&MOVIE 
<일 포스티노>,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ABOUT WHAT WE WRITE

우리가 쓰는 것들

자신만의 언어를 갖는다는 것, 그것을 종이 위에 글자로 옮겨 적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왜 우리는 자기 자신을, 그리고 세상을 글자로 바꾸려는 걸까. 영화 <일 포스티노> 속 노시인은 세상의 아름다움을 메타포로 옮겨 적는 방법을, 산문집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를 쓴 노작가는 모두가 알고는 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을 위한 언어를 찾는 방법을 이야기한다.

성인이 된 후 스스로 원해서 익힌 첫 번째 외국어는 프랑스어였다. 어려서 다른 언어를 배울 때는 뭐가 뭔지도 모르는 채로 그저 쑥스러워하며 시키는 대로 따라 하기나 했지만(“Hello!”, “I am a student.”, “How are you?”), 나이가 들어 내가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를 의식하면서 배우니 다른 것들이 보였다.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맨 처음 배우는 동사가 ‘être(~이다)’, 그다음이 ‘vouloir(~을 원하다)’라는 점이었다. 나는 프랑스인들이 가장 먼저 자신을, 다음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참으로 프랑스인답다고도 생각했다. 하긴 몰라서 그렇지 다른 외국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말하는 것. 말하고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이 배워야 하는 말 중에서 그것만큼 중요한 것이 또 있을까? 

가만 생각해보자. 그런데 나는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을까. 남들 앞에서 그것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것을 내 모국어로 쓸 수 있을까. 그러고 보면 세상에서 가장 쓰고 싶지 않은 글이 자기소개서다. 다행히 내 인생에서 자기소개서를 쓸 일은 거의 없었지만 간혹 써야 할 일이 생기면 얼굴이 붉어지고 식은땀이 다 났다. 내가 나를 소개하다니 이 무슨 ‘렛 미 인트로듀스 마이셀프’적 상황이란 말인가. 

성인이 되어 글을 써보려는 사람들은, 자기소개서가 아닌 제대로 된 글쓰기를 배워보려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은 사람들 같다. 글자를 몰라서, 글을 쓸 줄을 몰라서 종이와 연필을, 텅 빈 모니터와 키보드를 앞에 두고 끙끙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무엇을 써야 좋은지를 모른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무엇을 원하는지를 모른다. 아니, 틀렸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들을 표현할 언어를 알지 못한다.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언어다. 우리 자신과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설명할 수 있는 정확한 언어들.

“마지막 구절이 마음에 들었어요. ‘인간으로 살기도 힘들다.’ 저도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표현을 못 했거든요.”

오래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받은 영화 <일 포스티노>는 칠레 출신의 세계적 시인 파블로 네루다와 섬마을 우편배달부 청년이 보낸 한때를 그린 이야기다. 네루다가 이탈리아의 작은 섬으로 망명하자 그의 앞으로 온 수많은 우편물들을 배달하기 위해 마리오라는 청년이 우편배달부 일을 맡게 된다. 평생을 이 섬에서 어부인 아버지와 함께 살아온 마리오는 시인과 가까워지고 싶어 그의 시집을 열심히 읽고서 귀찮을 정도로 쫓아다니며 시에 대해서, 메타포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묻고 또 이야기한다. 그런 마리오가 네루다의 시를 읽고 난 후의 감상은 바로 그것이었다. 자신이 분명히 느꼈지만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을 시인의 시구에서 찾아냈다는 것.

그러니 무언가를 쓰기에 앞서 우리가 찾아야 할 것들은 남들이 모르는 사실들이 아니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말하지 않는 것들, 또는 말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던 것들을 위한 정확한 언어를 찾아내 그것들을 옮기는 것. 그것이 쓰는 사람, 작가가 하는 일이니까 말이다. 이것에 관해서 작가 존 버거는 이렇게 썼다.

삶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는 이름이 없는데, 이는 우리의 어휘가 가난하기 때문이다. 이야기들을 큰 소리로 전하는 것은, 이야기꾼이 그렇게 이야기를 전하는 행위를 통해 이름 없는 어떤 사건을 익숙하고 친숙한 것으로 바꾸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 존 버거,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중에서

나는 존 버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몇 안다. 그간 내게는 그들이 삶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해서 지나치게 호들갑을 떠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리고 종종 그들의 연약함과 섬세함을, 지성과 특별함을 치장하는 액세서리로 존 버거를 사용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들은 물론 존 버거에게도 못마땅한 마음이 들곤 했다. 물론 존 버거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그는 훌륭한 작가이다. 다만 잘못 건 그림처럼 비뚤어진 내 마음이 문제였을 뿐. 

얼마 전 나는 도서관에서 존 버거의 마지막 책을 발견했고 그 책을 빌려와서 읽기 시작했다. 책 전체는 얇고 가볍지만 종이 한 장 한 장은 꽤 두껍고 그 위에는 묵직한 글자들과 그림들이 가득하다. 때로는 사진도 있다. 짧은 글 하나를 읽는 데도 나는 여러 번 멈춰야 하고 또 수차례 앞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해야 한다. 왜냐하면 존 버거의 언어는, 존 버거가 생각하는 방식은 나에게 익숙한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언어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믿었기에 열심히 읽어나갔다. 마치 외국어를 배우는 학생처럼 공을 들였다. 내게 존 버거의 책을 읽는 것은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이나 같았으니까. 

오랜 시간 동안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한 것은 무언가가 말해질 필요가 있다는 직감이었다. 말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아예 말해지지 않을 위험이 있는 것들. 

– 존 버거,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중에서

이 구절을 읽고 나니 <일 포스티노>의 원작자인 안토니오 스카메르타가 소설 《네루다와 우편배달부》에 대해 쓴 문장이 떠올랐다. “나는 이 세계에서 자기 자신만의 시적인 언어를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어디선가 살해되고 박해당할지라도, 나는 이 책을 통해서 그 잔혹한 괴물과 맞서 싸우고 싶었다.” 

자기 자신만의 시적인 언어를 갖는다는 것. 말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아예 말해지지 않을 위험이 있는 것들에 대해서 쓴다는 것.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또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일 포스티노> 속의 마리오는 섬을 떠나 칠레로 돌아간 네루다에게 보낼 선물로 섬의 아름다운 소리들을 녹음한다. 예전에 네루다가 이 섬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물었을 때 마리오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눈에 비친 아름다움은 오로지 짝사랑하는 베아트리체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파도 소리와 나뭇가지에 스치는 바람 소리와 밤하늘에 가득한 반짝이는 별들의 소리와 아버지의 ‘서글픈’ 그물 소리와 아내의 배속에 있는 아들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안다. 그것들은 갑자기 나타난 것들이 아니다. 예전부터 그곳에 있던 것들이 다. 전에는 그에게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했던 것들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이방인처럼, 언어를 처음 배우는 아이나 외국인처럼, 이 세상에 막 초대받은 사람처럼 그것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이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시를 몰랐더라면, 시인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매일 해가 뜨고 지는 것과 같은 이 익숙한 아름다움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었을까. 

세상의 아름다움은 노력하지 않으면 발견하기 힘들다. 부지런해져야 한다. 시간이 필요하다. 공을 들여야 한다. 좋은 것은 늘 쉽게 얻기 힘들다는 것이 이 인생의 괴롭고도 즐거운 점이다. 마치 존 버거가 옮긴 로자 룩셈부르크의 옥중 편지 속 구절처럼.

“인간답게 지내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합니다. 그것은 확고하고, 분명하며, 활기찬 것을 의미하죠. 네,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어떤 일 앞에서도 활기차게 지내는 것이요. 흐느끼는 건 약한 자들에게나 어울리는 행동입니다. 인간답게 지낸다는 것은 거대한 운명 앞에 스스로의 삶을 즐겁게 던지는 것이지요. 그래야만 한다면 말입니다. 그와 동시에 매일매일의 화창함과 모든 구름 조각들의 아름다움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겠지요.” 

– 존 버거,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중에서

돌이켜보면 마음이 가장 괴롭던 때는 세상에서 나 자신만이 유일하게 탐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에 빠져 있던 때였다. 지금보다 조금 더 젊을 때였다. 그때 내 눈에는 거울에 비친 나 자신과 내가 걸어온 발자국과 내 눈앞에 펼쳐진 모호하고 비좁은 길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점점 그 밖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리오의 바다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사람들처럼, 늘 곁에 있던 것들과 전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던 것들이.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나는 무엇을 원하는 걸까? 그것은 중요한 것일까? 시간을 들여 연구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자기소개서를 써야 할 나이는 지났다. 이제는 자신을 파헤치는 것보다는 우리 주변의 세계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들을 표현할 정확한 단어들을 찾으려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이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나면 더 이상 나만 아는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다. 세상이 아름답다고, 경이와 신비로 가득 차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그것을 훼손하려는 것들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제 그들은 자기 자신만을 보지 않는다. 마리오가 네루다를 위해 쓴 시를 읊기 위해 집회에 나가는 것처럼. 존 버거가 수영장에 누워 천창으로 하늘의 새털구름을 바라보는 내밀한 시간을 즐기면서, 동시에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참한 사건들에 대해 떠올리는 것처럼.

어제 신문에서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인 스무 명이 집에서 폭격을 맞았다는 소식을 읽었다. 미국이 이라크에 있는 자신들의 정유 시설을 지키기 위해 삼백 개가 넘는 부대를 은밀히 파병했다는 소식과 아이에스에 납치된 미국 언론인 제임스 폴리의 참수 장면이 공개되었다는 소식, 남자, 여자, 어린이가 포함된 서른다섯 명의 인도 출신 불법 이민자들이 런던에 정박하기 위해 이제 막 북해를 건넌 화물선의 컨테이너 안에서 질식사했다는 소식을 읽었다. 

새털구름은 북쪽, 수영장의 끝을 향해 흘러간다. 나는 물에 뜬 채로 가만히 누워, 꼼짝도 하지 않는다. 나는 구름을 지켜보며, 눈으로 그 넘실거리는 모양을 기록한다. 

그때 풍경이 보여 주는 확신이 변한다. 변화를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천천히 그 변화는 분명해지고, 내가 받는 확신도 더 깊어진다. 하얀 새털구름의 털들이 손을 머리 뒤로 깍지 낀 채 물 위에 떠 있는 한 남자를 바라본다. 이젠 내가 그것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나를 바라본다. 

– 존 버거,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중에서

속이 텅 빈 언어가 아닌, 타인이 나에게 주입한 언어가 아닌, 나의 언어를 찾을 수 있기를. 더 정확한 언어로 말할 수 있기를. 언제까지나 이방인처럼, 언어를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이 세상에 막 초대받은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기를. 그리고 언제까지나 그런 이야기들을 쓸 수 있기를. 그런 것들을 나는 바란다.

일 포스티
마이클 래드포드ㅣ드라마ㅣ114분

작은 섬 칼라 디소토에 오게 된 시인 네루다. 네루다와 가깝게 지내면서 섬마을 여자들의 관심을 끌고 싶었던 마리오는 그와 우정을 쌓아가면서 시와 은유의 세계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의 마음 한편에서 움트는 이성과 감성을 발견한다.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존버거ㅣ열화당ㅣ110쪽

이 책에 담겨 있는 11편의 짧고 긴 에세이에는 존 버거의 드로잉과 메모, 생각이 모두 서려 있다. 마지막 순간에도 놓치지 않으려고 했던 이름 없는 대상이 이 책의 이야기와 함께 흘러나온다. 그가 사랑하는 것들만을 위한 모든 언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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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한수희

일러스트 박영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