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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토
대화가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
한순간에 인생이 뒤바뀌는 대단한 경험을 수도 없이 상상하곤 했다. 낯선 여행지에서 혼돈에 빠져 보기, 나의 독특함을 알아본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세상에 전달해 주기, 건축가가 되어 건물을 설계하고 그 안을 천천히 걸어 보기… 등이 모든 일은 실제로 일어난 것들이며 실제로는 삶을 크게 바꾸지 못한 일들이다. 물론 나의 삶을 어느 정도 바꾸어 놓긴 했지만, 어마어마한 사건의 스케일에 비하자면 극히 미비한 변화들뿐이었다. 어쩌면 기대가 너무 컸기 때문에 변화가 작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동일본 대지진 당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땅이 출렁거리는 무서운 경험을 했고, 흔들거리는 공항 계단실에서 두려움에 떨며 잠들어야 했다. 공항에서 나눠준 침낭 속에 들어가 이것이야말로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만한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생은 바뀌지 않았다. 하루 뒤 나는 150만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티켓값을 지불하고 공항을 탈출했고, 이틀 뒤 서울에 있는 회사에 정상적으로 출근해 그 대단한 경험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퇴근 후 매일 조금씩 쓰던 소설이 우연한 계기로 출판사 관계자에게 발견되어 정식 출간되었을 때, 나는 교보문고 매대에 놓인 이 책들이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을 것으로 확신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증명된 것은 그 글이 그렇게까지 대단한 글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경험의 강도가 커다랗다고 해서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겪은 가장 큰 변화는 아주 가까우며 아주 사소한 경험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이를테면 거울을 바라보고 고개를 돌렸는데 나의 뒤통수를 마주한 경험. 이 소름 끼치는 경험은 어느 정도는 비유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이기도 한 이야기다.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엉뚱한 사람에게 흥미가 있었다. 엉뚱하고, 유쾌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에게 매력을 느꼈고, 내가 그런 사람이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다. 그것은 어릴 때 접한 미디어의 영향력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내가 원래 엉뚱한 사람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때로는 발명가 행세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코미디언 행세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디자이너 행세를 하기도 하며 아무튼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식을 동원해 정말로 엉뚱하게 굴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많은 혜택을 누리면서 살게 되었다. 엉뚱한 사람으로서 누리게 되는 혜택이란 모든 정상적인 인간관계에서 예외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상대방의 질문에 엉뚱한 대답을 하고, 예측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고, 분위기를 살피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해도 된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웃어주었다. 나에게서 정상적인 반응보다는 엉뚱함을 기대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엉뚱한 사람으로 살면서 불편한 점도 적지 않았는데, 슬픈데 슬프지 않은 척하기, 알아들었는데 못 알아들은 척하기, 상대방이 진지한 이야기할 때 눈알을 굴리면서 딴청 피우기 등이 불편한 점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그런 어색한 행동들은 신체 기관처럼 항상 내 몸에 붙어 있었기에 사실은 불편함이라고 여겨본 적조차 없었다. 자라면서 몇 번인가 내 정체를 밝혀내려는 악당을 만났을 때, 오직 그때만 불편한 기분이 느껴졌다. 나에게 악당은 늘 진지한 척하는 사람들이었다. 고등학교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문득 진지하게 물어왔다. “너는 왜 맨날 농담만 하지?” 나는 친구에게 “너는 왜 신발이 그 모양이야?”라는 엉뚱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어린 주제에 어른인 척하는 녀석들, 진지한 척 진심을 이야기하는 녀석들은 놀리거나 장난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되도록 마주치는 것을 피하게 되었다. 되도록 내 주변엔 내가 말하면 웃어주는 사람들만 두었다.
내가 거울을 통해 나의 뒤통수를 보게 된 계기는, 그러니까 사실은 남의 눈을 통해 나를 바라보았을 때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엉뚱한 사람이기 때문에 대화를 하며 상대방과 눈을 마주 보는 것에서도 늘 면제되어 있었다. 나에게 대화란 진지한 척하기와 같은 것이었다. 상대방과 눈을 맞추면 진지해질 수 있고, 슬픔과 비통함 같은 연약한 감정을 들킬 수 있다. 그러면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 없게 되고, 내가 진지해진다면 나뿐만 아니라 나에게 엉뚱함을 기대한 친구들도 어색해질 것이기 때문에 나는 눈을 바라보지 않았던 것이다. 진지함을 ‘진지한 척’이라고 치부해 버리면 그 모든 일에 당위성을 부여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나에게 왜 눈을 바라보지 않느냐고 물어보는 애인의 질문이 자백을 요구하는 것처럼 무겁게 다가왔다. 난 세상엔 대화할 때 눈을 쳐다보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눈을 쳐다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고 항변했다.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사람에게 눈을 바라보라고 말하는 건 일종의 폭력이라고, 이대로의 날 받아들였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스치듯 눈을 마주치고 애인의 뒤통수 너머 시계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까짓거 눈 맞추려면 맞출 수는 있지….’ 생각하며 잠시 눈을 마주 보기로 했는데, 뾰족한 바늘을 눈앞에 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난 온몸을 비틀며 또다시 고개를 돌려버렸다.
여전히 엉뚱한 사람으로 살던 평범한 어느 날, 사무실에 출근해 난데없이 책상을 분해했다. 그리고 잡다한 것들을 만들고, 버리고, 책상 배치를 바꾸고, 심하게 떠들고 장난치다 하루를 모두 허비해 버렸다.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과장된 행동과 산만한 시선으로 일주일 내내 부산을 떨고 나서야 이 모든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의심해 보게 되었다. 인터넷으로 쇼핑하고, 기사를 검색하고, 부산스러운 행동을 이어가던 중 충동적으로 신경정신과 상담을 예약했다. 신경정신과를 예약했다는 말을 듣고, 함께 일하는 동료 건축가 양규는 사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너는 사실은 아주 예민한 사람이야.”
양규는 신통한 사람이다. 아니 신통한 척하는 사람이다. 대단한 경험이나 대단한 이론 없이, 단어나 입장 하나만 거꾸로 돌려 말해 사람들을 일깨워 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이를테면 나처럼 남 신경 안 쓰고 행동하는 사람에게 예민하다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기꾼… 카리스마 집착꾼… 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한편으로 감탄했다. 옛날에 태어났으면 제사장 정도는 했을 놈….
모든 엉뚱한 척하는 사람들은 예민한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평생을 무대 한가운데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어두운 객석에서 수많은 관객이 보고 있다고 믿는 배우처럼, 엉뚱한 척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자신을 보고 있다고 믿는다. 늘 시선을 의식하며 산다.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데도 입을 삐죽거리고, 뭔가 깨달은 듯 “오호!” 소리 내고, 가면을 쓴 것처럼 과장된 행동을 한다. 신경정신과에 들러 오랜 상담 끝에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 ADHD라는 소견을 들었다. 병원에서 처방받은 작은 알약을 삼키고 30분 정도 지났을 무렵, 부끄럽거나 어색한 기운이 몸에서 벗겨져 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진지하거나 솔직한 것이 부끄럽게 여겨지지 않았다. 심지어 눈을 마주쳐도 불편하지 않았다. 태어나서 한 번도 누구와 대화해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고, 온몸에 잔뜩 힘주고 살던 지난날들이 가여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동안 봐오던 나의 모습이 사실은 나의 뒤통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글·그림 한승재(푸하하하 프렌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