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ROUND
CLUB ONLY
SERIES
MEET AROUND
SUBSCRIBE
SHOP
서울의 낯선 슈퍼마켓
서울의 낯선 슈퍼마켓
여행 중 다른 나라의 슈퍼마켓에 가본 사람은 알 것 같다. 그곳에는 편안한 차림으로 장을 보러 나온 현지인들 사이에서 느낄 수 있는 묘한 설렘이 있다. 간단히 과자와 맥주를 사러 갔다가 신기한 것이 많아 이것저것을 구경하며 보내게 되는 시간. 여행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감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서울의 한 슈퍼마켓에 가면 이와 비슷한 느낌이 든다. 문을 밀고 들어서는 순간, 자신이 서 있는 도시의 이름이 무엇인지 잠시 잊게 되는 곳. 이태원의 ‘하이 스트리트 마켓High Street arket’에서는 장바구니를 든 여행자가 되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JASON (매니져, 28)
하이 스트리트 마켓은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2010년 말에 한국에 살던 몇 명의 외국인들이 만들었어요. 한국 사람이 외국에 가면 김치가 먹고 싶듯, 한국에서 지내는 그들도 고향의 음식이 그리웠다고 해요. 하지만 재료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고, 파는 곳이 있다고 해도 가격이 만만치 않았죠. 외국 식재료를 판매하는 마트가 있긴 했지만, 너무 대량이라 혼자 사는 사람들이 구입하기 부담스럽기도 했고요. 그래서 고향에서 직접 수입하기로 결심했다고 해요. 마켓은 그렇게 만들어졌고, 현재는 그들 중 한 분이 아내와 운영하고 있어요.
그러면 손님들도 주로 외국인이 오나요?
네. 지금은 70% 이상이 외국인이에요. 한국 분들도 오시긴 하는데, 구입을 많이 하진 않아요. 아무래도 낯선 식료품들이 많아서 재미있게 구경하지만, 선뜻 사지 못하시는 것 같아요. 어떤 음식인지, 어떨 때 사용하는 것인지 잘 모르시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그런 분들을 위해 설명서를 만들고 있어요. 낯선 재료들에 대한 설명과 함께 그것으로 만들 수 있는 음식, 활용법을 적고 있죠. 아직 완성은 안 되었는데, 곧 제품 옆에 붙여놓을 예정이에요.
구경하고 있으면 직원분들이 곁에 와서 친근하게 말을 걸어주시더라고요. 뭘 사라는 얘기가 아니라, 인사를 하고 도와줄 게 있는지 물어줬어요. 영어로 물으셔서 당황하긴 했지만, 기분 좋았어요.
저희는 고객 서비스에 많이 신경 쓰고 있어요. 백화점처럼 깍듯한 인사나 부담스러운 제품 설명이 아니라, 손님들에게 친구처럼 다가가기 위해 노력해요. 눈이 마주치면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후,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죠. 시식용으로 준비된 케이크와 차를 나눠주기 위해 접시를 들고 돌아다니기도 하고요.
가게에 오는 손님들뿐만 아니라, 이곳 스태프들의 국적도 천차만별이에요. 미국, 프랑스, 우크라이나,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한국 등 다양한 사람들이 이곳에서 일했어요. 그런데 한국인 손님들은 대체로 수줍음이 많은 것 같아요. 다가가서 영어로 인사를 하면, 당황하고 피하시더라고요. 외국인들을 위한 마켓이다 보니 영어를 사용하는 스태프들이 주로 있거든요. 한국인 스태프도 있지만, 이왕이면 다른 국적의 사람들과 얘기 나눌 기회를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영어공부도 해볼 겸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눠보는 건 어떨까요? 슈퍼마켓에서 대화를 나누는 게 처음엔 어색할지 모르지만, 막상 시작해보면 재미있을 거예요. 기분이 안 좋은 날에는 서로의 미소 덕분에 기분이 좋아질 수도 있고요.
한 쪽에서 샌드위치나 커피도 팔고 카페처럼 먹을 수 있는 자리도 있네요.
샌드위치는 저희 가게의 자랑거리 중 하나예요. 베이커리에서 샌드위치를 고른 후, 정육점에서 직접 햄의 종류나 양을 선택할 수 있어요. 햄은 저희가 직접 만든 것도 있고 수입한 것들도 있어요. 덩어리째 준비해놓고 직접 원하는 굵기나 양으로 썰어드리기 때문에 신선해요. 손님들도 보는 앞에서 썰어주니 좋아하시는 것 같고요. 샌드위치뿐만 아니라 다른 음식들도 많이 드시고 가세요. 가게에서 판매하는 음식들은 데워드리는데,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라자니아Lasagne (넓고 납작한 모양의 파스타를 이용해 만든 요리)예요. 간단하고 빠르게 먹기에 좋은 음식이죠. 요즘 근처의 회사 사람들이 점심을 먹으러 많이 오시기 때문에 새로운 메뉴로 치킨 페스토도 준비하고 있어요. 저렴하고 건강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들에 대해 늘 고민하고 있습니다.
하이 스트리트 마켓 스티커가 붙어있는 제품들이 많이 있던데, 직접 만드시는 거예요?
라자니아, 치즈, 아몬드 우유 같은 것들은 건강한 재료로 정성껏 만드는 홈메이드 제품이고요. 대량으로 구입한 시리얼, 향신료 등은 소분해서 판매하고 있어요. 혼자 사는 사람들은 향신료가 많이 필요하지 않잖아요. 찬장에 쌓아 놓기만 할 때도 종종 있고요. 시리얼도 마찬가지죠. 한국에서 파는 와인은 너무 비싸서 저렴하면서 품질이 괜찮은 와인도 수입하고 있어요. 채식하는 사람들을 위해 비건 버터Vegan Butter와 빵도 판매하고 있어요. 저희 직원분이 직접 만드는데, 인기가 많아요. 가게 이름을 달고 팔면 아무래도 책임감이 생기는 것 같아요. 더 믿음 가는 것들을 팔기 위해 노력하게 되더라고요.
기억에 남는 특별한 손님이 있나요?
특별하다기보다 친한 손님들이 떠오르네요. 자주 오는 분들과 자연스럽게 인사하고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거든요. 혼자 오던 남자분이 어느 날 아내와 함께 가게에 찾아왔어요. 결혼한 거죠. 그리고 얼마 후에는 아내의 배가 볼록하게 불어 올랐고, 또 시간이 지난 후에는 아이와 함께 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그렇게 그 사람들의 삶이 흘러가고 있는 것을 같은 자리에서 보고 있는 게 좋아요. 이곳에서 일하며 친해진 한국인 손님들 덕분에 한국어 실력도 많이 늘게 된 것 같아요. 앞으로도 저희는 이 자리에서 손님들을 기다리겠죠.
인터뷰를 마치고 제이슨은 점심을 먹으러 간다고 했다. 나는 한참을 서성이며 그곳에 있는 많은 물건들을 구경했다. 몇 가지 식료품을 사서 돌아가고 싶었는데, 매일 보던 것들이 아니어서 포장지를 꼼꼼히 뜯어봐야 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른 채 가게에 머무는데, 점심을 먹고 돌아온 제이슨이 “아직도 계셨어요?”라고 말하며 웃었다. 나는 그제야 시계를 봤다. 주섬주섬 장바구니에 담긴 물건들을 계산하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북적거리는 거리로 들어서고 나서야 ‘아, 여기가 서울이었지.’ 제정신이 돌아왔다. 때론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여행이 시작되기도 한다. 종종 낯설고 어색한 다른 나라의 슈퍼마켓이 그리울 때면, 이 가게를 찾을 것 같다.
에디터·포토그래퍼 박선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