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oom Of One’s Own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는 말한다. ‘여성이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그녀의 말에 따르면, 1년에 500파운드라는 돈은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며 자물쇠를 단 방은 홀로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 두 가지야말로 글 쓰는 여성이 경제적, 정신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첫 번째 조건이라는 말에 끄덕이며 좋아하는 여성 작가들을 찾았다. 그녀들이 글만 써서 부자가 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방을 주제로 한 글’과 일러스트레이터에게 보낼 ‘내 방 묘사 글’을 한 편씩 부탁했다. 어떤 방들이 도착할지, 내내 설레던 시간이다.

시인 유계영의 방

개집 바깥의 개집

문은 하루에 세 번 닫았다. 문을 하루 두 번만 열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심각했다. 심각한 사람의 방문을 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졸지에 심각함의 함정에 같이 빠질 수도 있으니까. 나는 심각했고 방문을 닫았기 때문에 얼마든지 혼자 심각해질 수 있었다. 방이 나를 가둠과 동시에 해방시키던 시절, 그러니까 방이 방의 본질을 잃지 않던 시절의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나는 심각했었다. 

개집이 되기 전까지는.

이 방의 사물들은 거의 전부 내가 고른 것이다. 가재도구의 의식적인 배치나 무의식적인 늘어놓음에도 내가 반영되어 있다. 나에 대해 알고 싶다면 여기를 들여다보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일 것이다. 예상치 못한 죽음에 대비해, 유품이 돼도 부끄럽지 않을 만한 것들만 간직하며 살지는 않았으니까. 나의 취향과 미감과 습속과 생활 리듬과 감수성과 신조가 반영되어 있으니까. 이 방은 나 자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개집이 되기 전까지는 그랬다는 얘기다.

부모로부터 주거 독립을 하지 않은 나지만, 나의 방에는 온통 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장담컨대 당신이 상상할 수 없는 온갖 일들을 했다. 시만 쓰지 않았다. 시도 썼다. 방 안에 작은 개집 하나를 들여놓기로 결심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하루에 두세 번 열리고 닫히던 문이 스무 번 이상 열리고 닫히게 되었다. 문을 닫아두면 끝없이 발 노크를 하는 개 때문에 나는 방의 주인이 아니라 방의 문지기가 되고 만 것이다. 예상했겠지만 이제 문은 아예 닫지 않는다. 금세 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방을 잃어버린 것이다. 심각함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모두 잃은 것은 아니다. 작은 개집 바깥의 큰 개집. 큰 개집에서 쓰게 된 시. 이것을 얻었다. 아주 마음에 드는 것들이다.

시인 유계영은 시집 《온갖 것들의 낮》, 《이제는 순수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 등을 출간했다. 길고 자세하게 방을 설명한 그녀는 “있는 그대로 구현하려 하지 않으셔도 좋고요. 일러스트레이터의 상상력이 보태진다면 제 방이 영광일 것이에요. 그렇지만 꼭 표현을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침대 위에 몸을 말고 누워있는 작은 강아지(시츄)와 전신거울 앞에 세워진 책기둥(전신거울이 전신을 비추기는커녕 쌓아 올린 책 때문에 반신 거울이 되었지요), 옷장 옆에 세워진 여행용 트렁크 가방. 이 세 가지는 꼭 표현해주시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소설가 한유주의 방

기만의 방

자기만의 방을 상상하기가 이렇게 어렵다니,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 첫 장처럼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예컨대, 가정법 문장들로 빈 벽에 액자와 태피스트리를 걸고 창문을 도려내고 보는 것만으로도 쾌적해지는 일인용 안락의자를 이리저리 배치해보는 것이다. 온통 파란색인 방-누가 페인트를 칠했을까? 그러니까, 무엇을 덮으려고?-은 반듯한 사각형이고, 보통은 윈도즈 블루스크린을 즉각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파란 벽 앞을 어슬렁거리는 고양이들의 윤곽이 선명하다. (좋아, 가정법에서 벗어났군.) 일인용 안락의자는 소위 리클라이너라 불리는 의자여서, 누워서 몇 번 헛발질을 하면 제법 길게 누울 수 있다. 그러면 탁자가 하나 있어야겠지, 작고 둥근 나무 원탁이다. 가끔 고양이가 상판 위에서 낮잠을 자기도 하는데, 나는 책-오, 당연히 책을 읽고 있었겠지(그런데 왜 과거형으로 말하는 걸까?)-을 무심코 고양이 등에 올려두다가 분노의 보복을 당하기도 한다. 커다란 창으로 햇빛이 광량의 손실 없이 들어오는데, 나른한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가면 신축 중인 빌딩 공사 현장이 보이……지 않는다. (어째서 초원이나 바다를, 숲을, 강을 상상하지 못하는가.) 벽 하나는 온통 책으로 가득한데, 책들은 이제 단열재라기보다는 어엿하게 장식품으로 보이기도 한다. 책들은 크로싱Krossing사의 시스템 선반에 꽂혀 있는데, 이 제품의 장점은 책들이 허공에 일렬로 나란히 색깔별로 크기별로 보기 좋게 꽂을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날마다 쌓여가는 책들에 지친(과거이자 현재다)나는 오랜 인터넷 검색을 통해 이 상품을 알게 되었고, 살 수 없는 가격이었으므로 슬펐고, 내친김에 인테리어 블로그와 인터넷 쇼핑몰을 하나씩 살펴보다가 내 안에도 속물적이고 몰취미한 부르주아적 취향이 확고하게 자리하고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책들이 책 위에 쌓였고, 데리다의 《문학의 행위》는 잠시 맡게 된 고양이 밥그릇 받침대로 사용되었다. 온통 파란색으로 포맷된, 그러나 오류 없이 재부팅 없이 책을 읽고 쓰고 고양이와 놀 수 있는 방이 언제고 있게 될까? (좋아, 질문으로 끝내는 편이 단언적인 평서문보다 가능성 면에서 낫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것뿐인가? 자기만의 방은 느슨한 인과를 통해 자기기만의 방으로 이어지는데, 내 안에서 문학적 행위는 기만적 행위와 때로 구분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파란 벽에 크로싱 시스템 선반을 마음껏 못질해 설치하고 내가 가진 모든 책들을 꽂아보자. 아름답고, 읽은 책보다 그렇지 않은 책들이 많다는 것을 나는 나 자신에게조차 숨기고 싶다.

소설가 한유주는 소설집 《달로》, 《얼음의 책》, 《나의 왼손은 왕, 오른손은 왕의 필경사》, 《연대기》, 장편소설 《불가능한 동화》 등을 출간했다. 그녀는 “일단 방에 대해서는 파란색, 고양이 두 마리, 편지 쓰기용 작은 책상과 의자, 창에 걸린 모빌 하나를 생각하고 있어요. 혹시 이걸로 모자라다 싶으시면 알려주세요.”라고 말한 뒤, 참고하라면서 바로 다음 날 청탁 원고 전문을 보내왔다.

시인 백은선의 방

중심을 향해 다가가기 색의 방식으로 도피하기

용은 어디에 있을까, 주현아 우리는 방에 앉아 이야기하지. 바닥에 두 다리를 뻗고 앉아. 네가 생각한 용은 적룡이고 내가 생각한 용은 청룡이었는데, 책장 사이를 뒤적이다가 우리는 오만 원을 발견하고 같이 기뻐했다. 오만 원으로 뭘 할 수 있을까? 주현아 주현아 우리 오늘 밤 밖에 나가서 밤을 같이 볼까. 이만오천 원 거리만큼 택시를 타고 나갔다가 이만오천 원으로 돌아오면 어떨까? 그렇게 어둠과 어둠의 사이 흔들리는 불빛을 구경하며 거리를 쏘다닐까. 

멀어지는 방식은 늘 우리의 중심에 있었고. 하얀 벽 하얀 문 하얀 책장 그 안에는 하얀 페이지들 가득 검은 글자들 그런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고, 바닥에 쌓여 있는 책 한구석으로 밀며 바닥에 앉아, 뜨거운 바닥에 앉아, 내일도 모레도 우리는 아직 오지 않은 밤에 대해 이야기하겠지. 

용에게는 몇 개의 갈비뼈가 있을까? 건반을 짚듯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헤아려보며, 왜 어떤 순간은 차가운 물질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출 수 없을까. 하얀 커튼 사이로 쏟아지는 창백한 빛을 보며, 나아지는 중심을 골몰하며. 눈이 내리는 것 같다. 쏟아지는 것을 보면 쉽게 그런 것들이 떠오르고. 프랑스와 스페인 독일 그곳에도 어둠은 동일하게 찾아오겠지만. 나무는 나무의 형태로 파도는 파도의 형태로 인간은 인간의 형태로 

자라나겠지만. 주현아, 너는 늘 반반이라고 했고 나는 늘 그 말에 웃었지만. 나는 내 방에 앉아 내 방에 함께 있던 너를 생각하고. 네가 돌아가고 난 다음 혼자 남아 모니터를 마주 보는 나의 밤을 생각해. 어떤 아픔에는 중심이 없어서 증상은 깊어지지 않은 채로 상상만으로 증폭되고. 

용은 어디에 있을까. 송도에 갔던 밤 고층 빌딩의 한가운데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는 걸 봤지. 그걸 설계한 사람은 중국인이라서, 용이 지나가는 길을 만들어 두었다고 너는 이야기해주었다. 거기를 오가는 긴 몸의 투명을 바람의 사이를 헤엄치며 노는 예쁜 것을 생각했다.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시인 백은선은 시집 《가능세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장면들로 만들어진 필름》 등을 출간했다. “벽에는 여덟 개의 그림이 걸려 있고”, “하얀 블라인드, 하얀 벽, 하얀 책장, 마구잡이로 꽂혀 있는 책들”, “주지 못한 선물” 등의 키워드로 방을 묘사한 그녀는 “최대한 상상해서 자유롭게 그려주세요.” 하고 덧붙였다.

소설가 한정현의 방

나의 가장 나중의 것

오랜 시간 자주 이사를 다녔기 때문에 나에겐 나의 방이라는 것이 어색하다. 그래서 방보다는 방에 남는 것들, 남겨야 하는 것들에 예민한 편. 나는 여행 중에도, 마트에서도 물건을 들었다가 자주 놓는다. 방에 둘 것,이라기보다는 방에 마지막까지 남겨둘 수 있는 것,을 더 자주 생각해야 하니까. 그러므로 내 방에 남는 가장 나중의 것,은 나에게는 자동적으로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의 의미가 되어버리고, 그 되어‘버린’ 존재라면 아무래도 나와 13년을 같이 해온 내 반려곰일 것이다. 

그 아이와 나는 13년 전 내가 공부하던 나라에서 만났다. 자연스러운 만남은 아니고 지금까지도 간간이 연락을 하는 친구 다섯이 내게 소개해준 것이었다. 비 오는 날 한 명의 친구가 이 아이를 업고 두 명의 친구가 각각 이 아이와 그 친구에게 우산을 씌우고 또 다른 한 명이 내게 전화를 하며 걸어오던 것이 생각난다. 나는 이 아이와 오랜 시간 비행기를 탔고 이후엔 많은 횟수로 이사 트럭을 탔다. 책을 버리는 순간에도 나는 이 아이를 등에 메고 있었다. 

얼마 전 박막례 할머니가 ‘기계와 결혼할 것’이라고 한 것을 보았는데 나는 어쩌면 그걸 일부 실행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이 아이로부터 해보았다. 이제는 이 아이의 옆구리가 조금씩 터지기 시작했고(한쪽을 열심히 꿰매었더니 다른 쪽이 터져서 나는 어째 눈물이 좀 터졌다) 솜이 밑으로 흘러내리는지 배가 좀 나왔으며 머리는 잘 가누지 못해 항상 조금은 거나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있다. 그러나 내가 사라져도 이 아이는 이 방에 있을 것이다. 조금 흘러내리고 조금 가누지 못해도, 어쩌면 나보다도 심지어 내 글보다도 오래 남겨질 수 있는 아이일지도 모른다고 늘 생각한다. 손을 대보아 심장이 뛰는 것도 소중하지만 그것이야 당연히 그러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뛰는 것과 마찬가지인 의미를 지닌 것 또한 소중해졌다. 어쩌면 세상 모든 것, 그리고 나는 그것을 이 아이로부터 배웠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문을 열었을 때, 내 방이라고 하면 당연히 내겐 이 아이일 수밖에,라고 또 생각한다. 

P.S. 이 아이의 이름은 태민….

소설가 한정현은 장편소설 《줄리아나 도쿄》를 출간했다. 그녀는 “제 방은 창이 큰 복층 오피스텔이에요. 벌써 조금 감이 오시죠?”로 시작하는 방 설명을 보내왔다. 워드 파일 한 페이지를 채워 촘촘히 설명된 방 묘사는 “최근에 플리마켓에서 산 스누피 베개가 있고요. 그리고 복층엔 옷상자와 책들이 있습니다. 프린트기하고요. 저는 짐이 별로 없어서 이 정도랍니다.”로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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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주연

글 백은선, 유계영, 한유주, 한정현 일러스트 오하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