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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영
북악산 아래 단란한 가족의 초대를 받았다. 동네 버스가 유유히 다니는 길목마다 크고 작은 집들이 낸 가파른 골목. 한곳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들이 있는 동네는 한적했다. 이전에 살던 번화가와 멀리 떨어진 곳이라 고립될 거라던 주변의 만류에도 가족이 이사를 감행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건물에 걸리지 않고 들어오는 볕과 사람들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에 마음이 차분해졌다.
‘너무 좋은’ 하루
웃으면 불을 켠 것처럼 주위가 환해지는 사람이 있다. 보이지 않는 조명을 갖고 다니는 셈인데, 그런 사람을 만나면 무장해제되어 여지없이 같이 웃게 된다. 늘 유쾌한 모습으로 기억되는 방송인 김나영이 그렇다. 국내외 패션계의 주목을 받으며 부쩍 바쁜 나날을 보내던 그녀를 조용히 응원해온 것도 그 웃음 때문이었던 것 같다. 김나영은 2년 전 제주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가까운 지인만 참석한 소박한 예식이었는데, 사진 속 그녀는 돌담 앞에서 수줍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얼마 후 엄마가 되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예전만큼 자주 방송에서 볼 수 없었지만 SNS를 통해 공개한 일상에서는 한결 편안한 모습이었다.
올봄, 그녀가 한남동에서 평창동 집으로 이사했다. 지저귀는 새소리에 눈이 떠지고, 현관문을 활짝 열고화분을 기르는 생활. 강변북로에 인접해 도심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던 예전 집에서는 누릴 수 없던 또 다른 호사다. 이곳에 오고 나서 거의 매일 있던 외출이 일주일에 한두 번으로 줄더니 이제는 집순이가 되었다. 태어나 처음 생일을 맞은 아들을 위해 홈파티를 준비하느라 한껏 상기된 그녀의 얼굴에는 작은 주근깨가 있었다. 밝은 웃음은 그대로였지만, 조금 다른 이야기가 오갔다. 주로 가족과 집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대화 도중에 ‘너무 좋다’는 말을 몇 번이고 했다. 그래서 더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지금 행복하다는 것.
마음에 드는 집
“아침에 일어나면 신우 손을 잡고 집 앞으로 나와요. 단독주택이 아니라 개인 공간이 있는 건 아니지만 주변에 산책할 수 있는 곳이 있거든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정원을 잘 가꾸지 못했을 때의 죄책감도 피할 수 있고요(웃음). 근처에 작은 텃밭이 있는데 너무 좋아요. 상추와 오이 같은 작물을 잔뜩 기르는 옆집 아저씨만큼은 아니지만, 허브를 조금 심었어요. 신우는 그 옆에서 흙장난을 하거나 곤충을 관찰해요. 저랑 오디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기도 하고요.” 새로운 집이 퍽 마음에 드는 눈치다. 물리적인 공간뿐 아니라 집 안팎으로 마주하는 자연과 여유가 가족을 보듬는 기분이라고 한다.
그녀는 홈파티를 준비 중인 중앙정원으로 향했다. 푸릇푸릇 잔디가 펼쳐진 몇 평 남짓의 공간. 같은 건물에 살고 있는 세대주들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이곳은 이사할 때까지만 해도 알지 못했던 숨은 장소였다. 파티를 준비하기에 앞서 이웃에게 양해를 구했더니, 다들 반색하고 축하해줬다며 고마움을 드러냈다. 특히 반장 아주머니는 당신의 아들이 결혼했을 때 이곳에서 지인들과 축하연을 했던 얘기를 들려주었다고. ‘돌잔치’라는 개념을 떠나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그녀는 등나무 아래서 과일을 먹거나 잔디에서 노니는 아이와 한참을 웃었다. 한낮의 더위가 가실 때쯤 가족들이 하나 둘 모였다. 평소 가까이 지내던 이웃의 꼬마들도 놀러 와 아는 체를 했다. 거동이 불편한 할아버지는 손자의 이름을 자주 불렀고, 한 컷의 사진에 이날을 담았다. 모처럼 한자리에 모인 이들은 “가족끼리 사진을 찍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했다. 오늘의 주인공인 아이가 첫 생일을 얼마나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이 사진 한 장만으로도 충분한 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하고 단단하게
거의 모든 시간을 공유하는 김나영과 아이가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침실이다. 매트리스 두 개를 붙여 그 위에서 놀다가 잠이 드는데, 눈을 감았다가 뜰 때마다 보이는 아들의 얼굴이 마냥 신기하다. 동지처럼 나란히 붙어 자면서 사이가 더 돈독해진 것 같다며 웃었다.
“주변에서 아기 키우는 집 맞냐고 물어와요. 자잘한 물건이 없거든요. 장난감은 대부분 빌려 쓰고 다시 반납해요. 이번에 이사하면서 집 안을 많이 정리했어요.” 그녀는 혼자 살 때와는 집을 보는 기준이 달라졌다고 한다. 이전에는 좋아하는 물건을 시선이 닿는 곳에 두었지만 점점 덜어내는 중이고, 특별히 아끼는 물건이 없어 내일이라도 미련 없이 안녕을 고할 수 있다며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방송이나 인터뷰, 책을 통해 ‘김나영’이라는 사람을 상상했었다. 그 안에는 ‘많다’, ‘넘치다’ 같은 서술어가 있었다. 욕심이 많고, 열정이 넘치고, 옷이 많고, 센스가 넘치고…. 대화를 나누며 알게 된 건 일부는 맞고 일부는 아니라는 것. “저는 신우에게 맨날 같은 옷만 입혀요(웃음). 워낙 작아서 빨면 금방 마르기도 하고, 유달리 편한 옷이 있더라고요.”
그녀의 하루는 새벽 운동으로 시작된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내내 아이와 함께다. 가정을 꾸리고 제일 신경을 쓴 건 건강인데, 엄마가 건강해야 아이를 마음껏 사랑해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출산 이후 약해진 체력을 보강하려 애쓰고, 한동안 실천하던 채식주의에 대한 생각도 바꿨다. “무분별하게 고기를 소비하고 있다는 생각에 채식을 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채식주의자 부부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봤어요. 그들의 아이는 태어나서 한 번도 고기를 먹은 적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고민에 빠졌어요. 부모라고 해서 아이의 경험이나 선택을 막을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러다 얼마 후 출연한 프로그램에서 전문 도축사의 작업을 보게 됐어요. 소 한 마리를 부위별로 분해하는데 무섭거나 징그럽다기보다 숭고하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인간을 위한 일이지만 적어도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으려고 귀하게 다루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죠.
그때부터 다시 고기를 먹기 시작했어요. 감사한 마음으로 먹되 절대 남기지 말자고 다짐했죠. 아이에게도 그렇게 알려주려고요.” 그녀는 자신의 방식대로 아이를 흠뻑 사랑해주고 있었고 육아에 관해서도 단순명료했다. “지금은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고 아이의 걸음을 따라가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나쁜 길로 가지만 않으면 되잖아요. 아직 경쟁에 뛰어들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말이 가능한 걸지도 모르죠. 나중에는 열혈엄마가 되어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래요.”
어제보다 오늘이 더
“아이와 보내는 하루는 지루하고 행복해요.” 그녀가 말하는 ‘지루한 행복’이 어떤 건지 지켜본 하루였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의 행보를 떠올리면 지극히 단조로운 일상이지만,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편안하고 만족스럽다고 했다. 활발하게 일하던 시기에 이뤄진 결혼과 출산으로 아쉬움이 있을 법도 한데, 얼른 둘째를 갖고 싶다며 오히려 임신했을 당시를 회상했다. “매일 깔깔대며 웃었어요. 왜 이렇게 계속 웃음이 나지 하면서요. 출산했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해요. 너무너무 행복했거든요. 뿅, 하고 사랑에 빠지는 느낌이었어요. 간호사분이 아기를 데려갔을 때 제일 먼저 물어본 말이 있어요. ‘쟤는 뭘 먹어요?’ 뭔가 먹을 걸 줘야 할 것 같았거든요. 너무 궁금하지 않나요(웃음)?”
밝고 긍정적이기만 할 것 같은 그녀에게도 떨치지 못한 고민은 존재한다. 매번 사람들 앞에 서는 일이 두렵고, 잘하고 싶은 마음에 스트레스가 쌓이고, 미래를 걱정하며 산다. 사춘기도 겪기 전에 갑작스럽게 떠나보내야 했던 엄마에 대한 그리움도 있다. 하지만 그 속에 매몰되지 않는 자신만의 방법을 잘 아는 것 같았다.
“대부분 흘러가는 대로 두는 편이에요. 힘든 일이 생겨도 늘 이런 자신감이 있었어요.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즐거울 거야, 하는 마음이요. 그래서 누군가 제일 좋았던 여행이 언제냐고 물으면, 자꾸 마지막 여행만 떠올라요. 기억력이 부족한 건지 모르겠지만(웃음). 참, 저 조만간 여행 가요. 이탈리아 풀리아Puglia 지방으로요. 전라도처럼 손맛으로 유명한 곳이라고 해서 기대하고 있어요.
저는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엄마가 되고 싶어요. 가족을 사랑하는 방식에는 여러 모습이 있잖아요. 중요한 건 부모가 행복하면 아이도 행복하다는 사실이죠. 저는 지금이 너무 좋아요!”
에디터 오혜진
포토그래퍼 니나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