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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관한 보고서
밤에 관한 보고서
출처를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덜컥 들어올 때가 있다. 그것들은 주로 노크 없이 머리를 거치지 않고 들어오기 때문에 내가 나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몰아 부치기도 한다. 슬픔이라고 정의 하기엔 조금 멀고 우울과는 가까운, 이 멜랑꼴리한 감정은 새벽 같은 늦은 시간에 자주 등장한다. 나는 오히려 그 시간을 빌미 삼아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다. 아주 좋은 자극제이자 마취제이지만, 정도가 심할 땐 그것으로부터 적극 도망치는 게 좋다. 이 글은 그 중 세 번의 밤을 기록한 것으로, 밤을 보내는 몇 가지 방법을 함께 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밤에 관한 보고서.
마음의 행방을 찾는 밤
내일은 월요일, 출근하는 날이다. 딱히 우울하진 않지만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니다. 생각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 잠 들어야 하지만 역시 생각대로 되지 않아 괴롭다. 그런 생각 자체가 도화선에 불을 붙인 듯이 숨어있던 잡념들을 부추긴다.
이곳, 이 좁은 침대 위에 누우면 ‘내일은 뭐 입지’ 같은 사소한 것부터 살아온 인생까지 되새김질하게 된다. 너무나 조용한 방 안, 부엌에 있는 냉장고 소리만이 이명耳鳴처럼 귀에 윙윙 맴돈다. 이렇게 된 이상 이 시간에 자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노트북을 켜고 어떤 영화를 볼지 고민한다. 특별한 이유 없이 머리에 뿔이 난 날에는 나보다 더 고약한 성미를 가진 캐릭터를 보는 게 마음 편하다.
<그린치>는 내가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영화 중 하나다. 아직 눈이 오고 날이 추워지려면 멀었지만 계절과 상관없이 자주 보았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틀었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부엌으로 뛰어가 전자레인지에 치즈를 데우고 나초와 콜라를 준비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리고 소파에 푹 기대어 더 이상 편할 수 없는 자세를 잡는다. 반쯤 앉거나 눕거나 혹은 그 둘의 중간자세로 있으면 완벽하다.
오프닝 크레딧이 올라가고, 일사불란하게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마을의 모습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주인공인 녹색 괴물 ‘그린치’는 크리스마스를 사랑하는 북쪽 마을 후빌Whoville에서 열리는 축제를 망치기 위해 사람들을 괴롭힌다. 삐뚤어진 아이에겐 숨겨진 비밀이 있듯이 그린치에게도 잊지 못할 상처가 있다. 남들과 다른 외모로 주변인들에게 당한 놀림과 모욕, 그것이 그린치의 짓궂고 못된 성격을 만든 것이다. 그린치를 보면서 나와 많이 닮았다고 항상 생각했다.
어렸을 때 불후한 가정에서 아픔을 겪으며 자란 건 아니지만, 하지 말라는 일은꼭 하고야 마는 소문난 말썽꾸러기였다. 입을 굳게 닫고 말을 안 하며, 추운 겨울날 엄마가 입혀준 내복을 몰래 벗어 침대 밑에 숨기는 정도의 귀여운 반항이었지만 엄마는 언니를 키우는 것보다 두세 배는 힘들었다고 곧잘 말했다. 사실 지금도 말 더럽게 안 듣는 어른인 건 마찬가지다.
독립의 가장 큰 장점은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보고 싶은 영화를 아무 때나 보고, 인스턴트도 와구 먹을 수 있다는 건 쉬워 보이지만 알고 보면 굉장한 일이다. 부모님과 같이 살았다면 ‘가스나야 빨리 자라’, ‘밤늦게 뭘 또 먹어’ 등 수많은 잔소리와 함께했을 것이다. 그런데 가끔 그린치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한다.
엄마 아빠가 있었다면 그린치의 삶도 조금은 달라질 수 있지 않았을까. 나를 잡고 있는 수많은 끈 중 가장 오래되고 단단한 밧줄은 부모라 생각한다. 살아가면서 수많은 것들이 나를 포기하지만, 나를 끝까지 놓지 않는 건 가족뿐일 것이다. 내가 모났지만 못되게 자라지 않았던 이유도 엄마의 고생 덕분인 것을 나는 잘 안다.
영화는 어느새 후반부로 달려가고, 그린치는 마음을 열어 처음으로 마을 사람들과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맞이한다. 해피엔딩이지만 나는 영화를 보기 전보다 기분이 축 처졌다. 내가 아닌 이들의 해피엔딩은 조금 배아프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 엄마에게 전화할 예정이다. 늦은 시간이라 분명 잠들어있겠지만, 침대 옆 스탠드를 더듬더듬 킨 후 전화를 받을 것이다. 걱정이 조금 섞인 잔소리를 들으면 금방 잠들 수 있을 것만 같다.
누군가의 귀가 필요한 밤
겨울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몸은 더 웅크리게 되고 걸음은 빨라진다. 쓸쓸한 배를 움켜쥐고 누하동으로 걸음을 옮긴다. 따뜻한 국물이 간절하다. 간판 없는 가게, 11시가 되어도 쫓아내지 않는 이곳은 서울의 심야식당이다.
아주 좁은 공간이어서 조금만 늦게 갔다면 자리가 없을 뻔했다. 퇴근 뒤 한잔하기 위해 모인 직장인들이 많았다. 나도 그중에 하나이긴 하지만 혼자서 좁은 공간의 한 자리를 차지하려니 조금 민망해진다. 친구가 오겠다고 한지가 사십 분이 지났다. 친구의 회사가 압구정이라서 꽤 오래 걸리기도 하지만, 분명 꼼지락대며 느지막이 퇴근 준비를 했을 것이다. 안 봐도 눈에 훤했다. 역시나 곧 도착한다는 달래기 식 문자가 도착했다.
이 친구의 신용은 땅을 뚫고 맨틀까지 도달해버렸기 때문에 내게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지금 8시가 됐으니 아마 8시 30분쯤에 도착할 것이다. 괘씸한 년….
“여기, 유부우동이랑 새우튀김이랑 생맥 하나요.”
빠른 손동작으로 초밥을 만들어 내는 주인아저씨와 정신없어 보이는 아르바이트생을 향해 말했다. 그러나 들은 건지 만 건지 둘 다 묵묵부답이다. 고개를 빼꼼이 내밀고 보자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듯이 주억거린다. 혼자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쇼핑하는 건 더 이상 부끄럽진 않지만, 혼자 술을 먹기에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괜스레 화장실도 다녀오고 주변을 두리번거려 본다. 핸드폰으로 페이스북도 보고, 전화번호부도 쓱 훑는다.
인생이 원래 그렇지만 겉만 번지르르 한 전화번호들을 보니 새삼 사는 게 슬퍼진다. 이중에 일적인 만남을 제외하면 몇 개의 전화번호만 남을까. 그중에서도 얄팍한 만남을 빼면 열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을 것만 같다. 혼자 술 마시는 것도 청승인데 마음마저 울적해지려 할 때쯤, 주문한 음식들이 나왔다. 나이스 타이밍.
“튀김은 많이 뜨거워요”
종업원의 주의가 끝나자마자 바로 입에 넣었다. 열기는 맥주로 식히는 게 참된 맛인데, 아직 종업원은 뭘 먹을 줄 모르는 듯했다. 어릴 땐 맥주의 맛도 모르면서 무조건 마시고 봤다. 그런데 지금은 반주할 정도로 술을 즐기게 되었다. 한 삼십 년 사회생활을 한, 배 나온 아저씨가 된 것 같다. 난 아직 젊은 아가씨인데….
멀리서 친구가 오는 게 보였다. 요 앞에서 뛰어온 시늉을 했을 거면서 굉장히 서둘러 온 척 요란스럽다. 8시 40분, 잔소리를 늘어놓고 싶지만, 매번 늦긴해도 전화 한번에 와주는 친구가 고마워 입을 다물고 조용히 허공에 검지를 올렸다.
“여기 맥주 하나 더요”
자신 있게 주문했다. 내 넋두리를 들어줄 이가 왔으니 소심해질 필요가 없었다. 자,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작은 가게 안, 소음 속에서 서로의 기나긴 고해성사가 시작될 터였다. 모두가 솔직한 밤, 해는 도무지 뜰 생각이 없어 보일 정도로 새까맣게 물들고 있었다.
눈물이 많은 밤
가끔 잠드는 법을 까먹는다.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낯설어지는 것이다. 잠이 올 듯 말 듯한 수면의 경계에선 무방비해지지만 또 어느 한편으로는 또렷해진다.
뇌 어딘가에서 조정하는 듯, 잠을 깨우는 결정적 일들을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얼른 자라고 말하는 수마의 등쌀에 못 이겨 억지로 욱여넣지만 결국 신경질적으로 선명해지는 밤이 되고 만다. 기어코 잠을 토해내고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고인다. 어리숙한 행동을 했던 오늘의 내가 생각나 버렸다. 생각의 정리가 절실하다는 신호를 무시하고 하루하루를 살아온 벌이었다.
무슨 바람이 든 건지 나는 좀 더 용감해지기로 했다. 얇은 겉옷과 두 권의 시집을 들고 집을 나섰다.
내가 향한 곳은 기차역. 무작정 기차를 타고 떠나기로 했다. 몸이 안 좋아 내일 출근은 어려울 것 같다는 문자를 마지막으로 핸드폰을 꺼놓았다. 나는 진짜로 좋지 않았다. 특정한 어느 곳이 아픈 건 아니었지만 전체적으로 나의 내부는 엉망이었다. 실로 몇 년 만에 자의적으로 핸드폰을 꺼버린 건지, 까맣게 변한 화면이 낯설어 몇 번을 매만졌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핸드폰 전원을 켜면 울릴 메신저들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를 걱정하는 이들이 몇 명인지 세어보는 건 생각보다 비참하지만 또 막상 보면 행복해지는 것들이니깐. 켜고 나서도 반응 없는 핸드폰을 보고 더 슬퍼질지도 모르지만 그냥 오늘 밤은 나 이외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10시 40분에 출발하는 기차를 타기 위해 플랫폼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앉은 칸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그마저도 대부분 잠이 든 상태였다. 자리를 찾아 앉으니 곧바로 기차가 출발했다. 역이 지나가고 어두컴컴한 야경이 계속되자 ‘아, 내가 큰일을 저질렀구나’ 하는 생각이 그제서야 들었다. 중학교 때 하루도 넘기지 못한 어설픈 가출 이후로 처음 한 일탈이었다. 회사와 가족 등 현실적인 고민들이 스멀스멀 머리에 채워지기 시작했다. 머리를 양옆으로 훅훅 털었다. 집을 박차고 나온 자신감을 다시 불러오고 싶었지만 너무 늦은 후였다.
시집을 읽다 지치면 노래를 들으며 멍하게 창밖을 내다보는 일을 반복했다. 중간중간 옆자리에 누군가가 오면 가방을 치워주는 행동 정도 할 뿐이었다. 너무 멍청하고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론 내게 너무나 필요한 시간이었다.
세 시간이라는 시간이 짧게 느껴질 정도로 정신없이 흘렀다. 어둠을 달려
도착한 역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우울하지는 않았다. 잠들 곳을 찾아야 했고, 굶주린 배를 채워줄 식당도 찾아야 했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한순간에 걱정이 사라졌다면 거짓말이다. 나는 다만 심연의 바닥을 찾은 것 같았다. 그동안 내 안에서 자란 두려움이 나를 갉아먹고 있었음을 깨닫고, 더 겁을 먹었던 것이다.
더 이상 함께 자라는 일이 없도록 가끔씩 내게 시간이라는 것을 주기로 했다. 내일 일상으로 돌아가도 상처받지 않을, 한차례 성장한 내 모습을 그려본다. 어둠을 헤매어 찾은 건 생각보다 밝았고 반짝거렸다. 이제 곧 해가 뜰 차례였다.
글 이혜인
사진 박소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