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 한 조각

A Piece Of Beauty And Music

© 〈그을린 사랑〉

‘내면의 아름다움’이라. 나는 지금 나하곤 사소한 연관도 없을 저 단어 앞에서 우물쭈물, 갈팡질팡하는 중이다. 내면의 중요성을 모르지 않는다. 당연히 그렇다. 나이 들면서 육체는 쇠퇴를 피할 수 없지만 어떤 정신은 또렷해진다. 거기에 깊이가 스며들고, 때로는 확장마저 일궈낸다. 그리하여 누군가는 보통 사람의 삶을 사는 철학자가 된다.

등골이 오싹해질 때

육체의 전성기는 보통 20대 혹은 30대다. 반면 내면의 전성기는 60대, 70대가 되어서야 강림할 수도 있다. 어떤 분을 예로 들 수 있나 싶어 내 방 책장을 쭉 둘러본다. 우연일지 몰라도 고故 황현산 선생이 쓴 《밤이 선생이다》가 유독 눈에 띈다. 그래. 맞아. 저런 분이야말로 내면의 아름다움을 지녔던 경우라고 할 수 있겠지.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을 아득한 경지다. 고요한 듯 준엄하게 치솟은 산봉우리다. 

그래서일까. 행여 나에게는 영영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숨이 턱하고 막힌다. 대체 어떻게 하면 내면의 아름다움, 길어낼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어제도 술에 취해 개똥 같은 글을 인터넷에 싸질렀다. 오해 말기를 바란다. 나는 평생 악플 따위 달아본 적 없다. 진짜다. 하나, 자고 일어나면 땅을 치고 후회할 게 뻔한 그런 글을, 내일 후회할 줄 알면서도 쓴다. 이거 참, 멍청하기 이를 데가 없다. 

그 와중에 좀 있어 보이고 싶은 욕망에 이런저런 수식은 왜 이리 주렁주렁 달아놓았는지. 나는 온갖 수사로 가득한 내 글이 조금씩 정돈되고, 뼈대만 남은 채로 핵심을 찌를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주어와 동사, 형용사 몇 개로 잊히지 않는 문장 쓸 수 있기를 소원한다. 비단 글쓰기의 영역에서만은 아니다. 나는 내가 자기 자신을 유지할 줄 알고, 자기도취의 블랙홀에 빠지지 않을 수 있기를 갈망한다. 그런데 영 쉽지가 않다.

이렇게 생각한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것만 바라보고 추구한다고 해서 성취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빛과 희망이 아닌 비극을 직시할 수 있는 용기를 지녔을 때 우리는 내면의 아름다움, 겨우 싹 틔울 수 있을 것이다.

얼어붙은 내면의 바다

이를테면 영화 보기를 논해볼 수 있다. 이 세상에는 그저 넋 놓고 보는 영화가 있는 반면 (문법적으로는 오류지만) ‘보아내야 하는’ 영화가 있다. 그대여. 혹시 전쟁이 낳은 비극을 그린 영화 〈그을린 사랑〉(2010)을 본 적 있나. 이 영화를 본다는 건 정말이지 고통스러운 결정이다. 그러나 어떻게든 그걸 보아내는 순간, 당신의 내면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디 〈그을린 사랑〉뿐일까. 당신이 애써 찾지 않아 그렇지 엄존하고 있는 세계의 비극에 대해 고민하게 해줄 영화 목록에는 끝이 없다.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무라카미 하루키가 언급했듯이 “불편하다는 느낌은 새로운 영감이 떠오를 만한 문턱에 도달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 책만 도끼가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얼어붙은 내면의 바다를 내리쳐줄 도끼 같은 영화나 음악만으로 이 지면을 (과장 하나 안 보태고) 다 채울 수 있다. 

적어도 나에게 내면이 아름다운 사람이란 이런 사람이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을 지닌 사람 말이다. 하긴, 누군가의 고통을 외면하는 사람을 아름다운 사람이라 부르기엔 아무래도 곤란하다. 한데 더 큰 문제가 있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걸 넘어 혐오하는 문화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는 거다. 혐오와 조롱, 멸시와 분노가 이 세계의 구석구석까지 깊숙하게 퍼져 있다. 혐오는 마치 시대의 정언명령처럼 보인다. 이쯤 되면 디폴트값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과연 이런 세계에서 내면의 아름다움, 어디에서 구해야 한다는 말인가. 어쩌면 위에 언급한 〈그을린 사랑〉 같은 영화와 이 음악이 선생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왜 뜬금없이 이 영화를 자꾸 거론하는 거냐고 묻지 마시라. ‘결혼’에 대해 다룬 지난 호 글에서도 강조했듯이 이건 불현듯 강림한 나만의 느낌이다. 나도 안다. 느낌은 희미하고, 순간적이다. 그러나 순간적이고 희미하다는 바로 그 이유로 근본적인 내면의 진실을 담아낼 수도 있는 거라고 나는 믿는다.

[Amnesiac](2001)

Radiohead

‘You And Whose Army’

영화 〈그을린 사랑〉의 오프닝 곡이다. 참고로 라디오헤드는 자기 곡 다른 매체에 쓰지 못하게 하는 걸로 악명이 높다. 어지간해서는 허락하지 않는다. 그런 그들이 이 영화에 삽입되는 것에는 동의했다니, 이것만으로도 〈그을린 사랑〉은 관람각인 영화였다. 처음 영화를 보게 된 이유는 썩 소박했던 셈이다.

기본적으로는 정치인을 비판하는 노래다. 라디오헤드는 이 곡에서 정치하는 자의 위선에 대해 서늘하게 냉소한다. 언젠가 대가를 치를 거라고 차갑게 경고한다. 바로 이 곡이 국가/종교 간 전쟁의 비극을 담아낸 이 영화에 쓰인 이유다.

필연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이 모이면 분쟁이 발생한다. 아귀다툼을 벌이고, 집단의 이름으로 거리낌 없이 인간의 개별성을 말살한다. 가수 조르주 브라상Georges Brassens은 “인간은 여럿이 모여 봐야 좋을 것이 없다. 인간은 네 명 이상만 돼도 멍청해진다.”고 노래했다. 미안하지만 그가 틀렸다. 인간이 모이면 인간은 잔인해진다. 신과 국가의 이름으로 벌어진 전쟁을 통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했는지 한번 계산해 보라. 계산하다 나가떨어질 게 분명하다. 존 레넌John Lennon이 그의 곡 ‘Imagine’에서 국가도 없고, 종교도 없는 세상을 꿈꾼 이유다.

그 와중에 〈그을린 사랑〉은 종국에 가서 아주 작은 희망 하나, 건져낸다. 삶의 진창 속에서 처박힌 채로 기어코 아름다움 한 조각을 이끌어낸다. 이런 음악, 이런 영화 도무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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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배순탁 (음악평론가,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