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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로하는 밤
아티스트 민경희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아이들이 다니는 미술학원에 도착했고 그녀는 복도 한쪽에 있는 작업실 문을 열어줬다. 바깥에서 데려온 어둑한 기운이 아늑한 공간에 묻혀 사라졌다.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해도 계속 사랑하는 것처럼.’ 그녀가 계속해서 쓰고 그리는 이유다. 나는 민경희 작가를 대화 속에 의미를 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만난 그녀는 이야기를 짓는 사람에 더 가까워 보였다. 그 이야기의 재료는 무척 다채로웠고 또 자유로웠다. 우울 속에서 유머를 찾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작업실이 미술학원 안에 있어서 놀랐어요. 순간 선생님이셨나, 착각했어요(웃음).
학원 원장님과 친분이 있어서 세를 얻게 된 작업실이에요. 요즘은 이 공간을 채우느라 정신이 없었네요. 아이들이 지나가면서 여긴 뭐 하는 곳인지 자꾸 물어봐요. 원장님이 지인이셔서 공간을 내주셨다고 하면 “지인이 뭔데요?” 하고 되물어요. 꽤 재밌는 환경이죠(웃음).
귀엽네요(웃음). 새로운 공간도 생겼고, 요즘 어떻게 지냈나요?
코로나19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저도 마음에 무력감이 생겼어요. 그러면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어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것들을 다시 짚어보고, 확고하게 다져보는 계기가 됐죠. 요즘은 올겨울에 나올 책 준비가 한창이에요. 500원짜리 지점토로 작은 오브제를 만드는 취미도 생겼고요.
새로운 책 준비에 바쁘겠네요. 지난 책들에서는 글이 시처럼 읽히는 일관성이 보이기도 했어요.
의도한 건 아닌데 그렇게 읽어 주시니 좋네요. 원래 시를 좋아해서 빗대어 표현하는 방식이 도드라져 보인 게 아닐까 해요.
《별일 아닌 것들로 별일이 됐던 어느 밤》 제목에서도 ‘어느 밤’이 무엇을 빗댄 표현 같아서 어떤 뜻인지 궁금했어요.
바쁘게 살아가다 보면 상처를 받을 일도 있고, 우리는 그 안에서 갑자기 찾아오는 감정을 그냥 지나칠 때가 많잖아요. 하루가 저물어가는 밤이 되면 낮에 그냥 지나친 것들이 몰려와 마음을 건드릴 때가 있죠. 제목에서 말하는 밤이 그런 밤이에요. 감정을 복기하는 밤. 지나치지 말아야 할, 혹은 지나쳐야 할 감정들을 곱씹어 보는 밤이죠.
그런 복기의 시간이 왜 필요할까요?
누구나 꼭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제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 필요했어요. 감정을 정확히 직면하고 풀어주는 과정이요. 몸을 스트레칭 하듯 마음도 긴장된 상태를 이완해 주는 거예요. 갑자기 침범한 감정들에 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기보다 그냥 받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감정을 느끼는 나 자신을 인정해 주는 거죠.
그럼 이 책은 감정을 이완하고 풀어낸 과정의 결과물로 볼 수 있을까요?
그렇죠. 사실 첫 책이라 확신을 갖기 어려웠어요. 20대 초반 제 서툰 감정을 고백한 글을 모은 건데, 이게 맞는 걸까, 고민하던 시간도 있었어요. 다행히 많은 분들이 좋아해 주셨고 그 때만 가질 수 있었던 감정과 제 모습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소중한 책이에요.
작가님의 20대 초반은 어땠는지 궁금해지네요.
첫 책을 스물다섯 살에 냈는데, 그때는 늘 불안했어요. 마치 인생을 다 아는 것처럼 오만하게 굴기도 했고 비관적인 면도 있었고요. 사실 센 척이었던 것 같아요(웃음). 나름의 도피처였어요. 너무 불안한데 그걸 들키고 싶지 않았던 거죠. 어려운 상황이 닥쳤을 때 혼자 묻고 혼자 단정 짓는 일을 반복하면서…. 첫 책에 ‘장님’이라는 제목의 단락이 있는데 그 문장들이 당시의 생각을 대신하는 것 같아요. 20대 초반을 돌이켜보면 잘 몰라서 더듬으며 길을 찾는 모습이 연상돼요.
우울에 관해 말하는 구절도 떠오르네요.
우울을 파우치처럼 들고 다닌다고 말했죠(웃음).
지금은 우울에서 좀 멀어졌나요?
우울감은 늘 느껴요. 다만 가지고 다니는 방식이 조금 더 능숙해졌다고 할까요. 사람들 앞에서는 잘 감추고 혼자 있을 때는 편하게 꺼내 보이면서 전보다 우울을 다룰 줄 알게 된 것 같아요. 이제 20대 후반인데 저 자신을 알아가게 되면서 얻게 된 능력이 아닐까 해요. 많은 것을 단정 지으려고 하기보다는 천천히 알아가면 되지, 하면서 저 자신을 다그치지 않기로 했어요.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어요.
민경희 작가 하면, 일상적인 그림에 묵직한 대화 글이 매력적이에요. 대화 좋아하죠?
맞아요. 원래 새로운 사람들 만나는 걸 즐기는 성격이에요. 그런 점이 작업으로도 이어지는 것 같고요. 제 작품은 만화와 비슷해 보이지만 개연성 없이 단 한 장면으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해서 임팩트가 필요했어요. 일상적인 그림이지만 주고 받는 대화 속에 생각할 거리를 남기려 했죠.
그런 점이 잘 느껴졌어요. 나이가 들수록 인간관계가 좁아질 때가 있는데… 그래서 대화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맞아요. 그런 면에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게, 저는 직업 특성상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어요.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새로운 세상을 엿볼 기회가 많아요. 대화하며 타인이 겪은 이야기들을 들을 땐 유난히 귀가 밝아져요. 제가 살아본 삶이 아니니까 자연스럽게 궁금해지더라고요. 그 사람과 내가 비슷한 부분을 발견하면 희열을 느끼기도 하고 혼자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게 아니구나, 실감하기도 해요. 같이 씩씩해지는 거죠. 저에게 대화는 일종의 위로 역할을 해요.
관찰력 좋은 사람의 성향을 타고났네요.
남 이야기에 관심이 많아요. 카페에서 사람들 이야기하는 거 몰래 듣는 것도 좋아해요. 지하철이나 버스에서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면서 새로운 글감을 찾기도 해요. 저 혼자 소설을 쓰는 거죠(웃음). 모르는 사람들 이야기에 살을 붙이는 게 재밌어요. 그들의 말에 혼자 답하면서 작업을 이어갈 때가 있어요.
아까 대화가 위로 같다고 말했는데, 그런 점이 작품에서도 잘 드러나요.
제가 처음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이유도 저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을 직접 하기 위해서였어요. 결국 나를 위로하려고 했던 건데, 그게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사면서 위로가 됐던 게 아닐까 생각해요.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 글을 쓰기 시작한 때는 어땠나요?
최근에 중학교 동창 친구들을 만났는데 의외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저는 제가 학창시절에 마냥 까불거리는 애인 줄 알았는데 친구들이 제가 구석에서 열심히 무언가를 끄적거리던 아이였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몰랐거든요. 제가 글 쓰는 사람의 이미지였는지(웃음). 그러고 집에 와서 찾아보니까 무언가를 쓴 흔적들이 많았어요. 일기장부터 좋아하는 문장을 모아놓은 노트까지. 그리고 이건 좀 웃긴 이야기인데, 저 고등학교 때 야설도 썼어요.
네? 야설이요? 빨리 얘기해 주세요.
제가 학교 다닐 때 ‘무게타’라는 사이트가 유행했는데 거기에서 랭킹 탑 순위까지 오르고 그랬어요. 응원해 주는 친구들도 있었고 정말 꾸준히 썼어요. 생각해 보니까 계속 뭘 썼던 게 맞네요. 그렇게 끄적이던 게 지금까지 이어진 것 같아요. 근데 저 이미지 괜찮은 거죠(웃음)?
그럼요. 걱정 마세요(웃음). 랭킹 탑이면 그때도 필력이 좋았던 거네요!
어후, 아니요. 지금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스토리였어요. 귀여니 작가를 열심히 따라 하면서 쓴 것 같아요(웃음).
내용이 궁금해져요(웃음). 그럼 그림보다 글이 먼저였던 걸까요?
그렇죠. 그림은 조금 나중에 시작했어요. 사실 제가 그림을 배우지는 않았어요. 어릴 때 미술학원은 다녔지만 입시를 준비하거나 제대로 배운 적은 없어요.
그래서인지 그림이 경직되지 않고 자유롭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쓰는 재료도 한계가 없고요.
원래 다이어리를 쓰면서 옆에 작은 캐리커처를 그리긴 했는데요. 어느 순간 그림이 점점 재밌어지더라고요. 화방에서 거의 살았어요. 재료가 궁금하면 바로 사서 써보고요. 그림은 제 기저에 깔린 우울감을 풀어내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어요. 이유 없이 끌리는 마음에 전공도 아니면서 끈질기게 매달렸죠. 글도 그림도 마찬가지예요. 처음엔 잘 모르기 때문에 못해서 헤매고 좌절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물고 늘어졌기 때문에 업으로까지 삼게 된 것 같아요.
역시 끈기가 중요해요. 풍경보다는 사람을 더 많이 그리는 편인데, 대부분 실존 인물을 그리나요? 작가님이 그리는 얼굴을 보면 표정이 미묘하게 다양해서요.
실존 인물도 많이 그리지만 대부분 가상 인물이에요. 대화 주제를 먼저 정하고 그 말을 하는 사람의 모습을 상상해서 그리거든요. 자유롭게 떠올리면서 그리는 방식을 더 좋아해요
글과 그림으로 새롭게 시도하고 싶은 분야가 있나요?
새로운 장르라기보다는 요즘은 재미를 더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요. ‘멜랑꼴리’한 유머라고 할까. 음… 계속 우울에 관해서 말하게 되는데, 작품에서 자기 연민에 빠져 한없이 우울을 말하고 싶지는 않아요. 저는 언제나 우울을 곁에 두는 사람이지만 그걸 웃기고 재밌는 방식으로도 전하고 싶어요. ‘난 우울해. 근데 뭐 어때?’ 하고 말하는 것처럼요. 누구나 불행과 우울감을 가지고 있는데, 저는 그걸 조금 유쾌한 방향으로 풀어보고 싶은 거죠.
블랙 코미디네요. 사실 작가님 작품 보면서도 계속 생각한 건데, 자꾸 우디 앨런의 영화가 떠오르더라고요.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옷도 우디 앨런처럼 입고 왔네요(웃음).우디 앨런 영화는 딱 두 번 봤는데 늘 색감이 좋다고 생각했어요. 클래식한 배경에 따뜻한 느낌이 인상적이고요. 낯선 곳에서 빠지는 사랑 이야기도 매력적이잖아요.
낭만적이죠. 작가님 작품에도 낭만이 있어요.
좋은 피드백이네요. 저는 제가 책에서 젊음이 주는 방황과 혼란, 왔다 갔다 하는 알 수 없는 마음들을 기록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걸 멀리서 보면 낭만과 연결할 수 있겠네요.
방황과 낭만을 같은 맥락으로 보나요?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비슷하게 보고 있어요. 방금 젊음 이야기를 했는데 젊은 시절의 방황과 낭만을 이야기하는 것에만 국한하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제 작품을 좋아해 주시는 분들도 함께 나이가 들어갈 텐데 앞으로 더 넓은 방향의 낭만을 그려가는 것도 제가 풀어야 할 숙제인 것 같아요.
앞으로 작가님이 그릴 낭만이 궁금해지네요. 작가님이 계속해서 쓰고 그리는 이유는 뭘까요?
짝사랑이랑 비슷한 것 같아요. 누군가를 혼자 사랑하면 별의별 감정 다 들잖아요. 별것도 아닌 것에 의미 부여하고 자존심이 엄청 깎이면서도 좋아하는 걸 멈출 수 없죠. 어쩌다 떡밥 하나라도 던져주면 너무 좋아하고(웃음).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해도 계속 사랑하는 것처럼 제가 글과 그림을 계속 쓰고 그리는 이유도 같아요. 뭔가 안 되는 것 같지만 결국엔 될 것 같으니까 계속하는 것 같아요. 괴롭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좋아서 짝사랑을 이어가는 거죠.
01.
이해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지만
때로는 넘어가는 것도 이해의 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02.
어쩌면…
인연은 그렇게 쉬운 게 아닐 수 있다는 생각.
03.
“좋아해, 좋아한다고.”
이렇게 말해버릴까 싶다가도
그보다 더 먼저 나오는 계산 없는 내 마음에
네가 먼저 알아버릴 것 같기도 해.
04.
비 맞는 여자들,
우리는 어디에서 환영받을 수 있을까?
2017년에 그린 작품으로,
소외당하는 모습의 여성들을 그렸다.
에디터 김지수
포토그래퍼 최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