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으로 위로받은 기억

A Memory Consoled By Music

음악을 통해 위로받은 기억, 하나쯤 없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좀 거창하게 바꿔 말하면 음악을 경유해 강림한 ‘구원’이다.

너무도 절망적이어서 아름다웠던

나 역시 그랬다. 한데 냉정하게 돌이켜보면 기묘한 반비례 관계가 내 눈에 밟힌다. 뭐랄까. 10대 시절에는 듣는 음악의 거의 전부가 좋았다. 구입해서 감상하는 족족 감탄하고, 그 경험을 친구들과 침을 튀겨가면서 나눴다. 그럼에도, 구원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이유를 곱씹어 본다. 아무래도 내가 세상살이 얼마나 힘든지를 체험하지 못한 시기였기 때문이지 싶다. 

나는 어렸고, 세상은 장난감과도 같았다. 하고 싶은 거, 보고 싶은 거, 듣고 싶은 거투성이였다. 그 과정을, 적어도 고등학교 시절까지, 나는 꽤나 손쉽게 누렸다. 집안 형편은 나쁘지 않았고, 일주일에 두 장 정도는 내 돈 아닌 돈으로 카세트테이프를 살 수 있었다.

상황이 변한 건 대학 시절부터였다. 이사가 잦아졌고, 집 크기는 횟수에 비례해 작아졌다. 잠시 쓰던 글을 멈추고 세어봤다. 최소 열 번 이상은 집을 옮긴 것 같다. 이 과정 속에서 나에게 위안을 준, 더 나아가 구원의 순간을 선물한 음악들을 잊지 못한다. 과연 그러하다.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인지라 풍족한 환경 속에 놓이면 그 귀함을 체감하지 못한다. 아아. 어리석구나. 인간이여. 참으로 어리석도다.

1997년이었던 것만큼은 확실하다. 비가 많이 와서 물이 집 안까지 들이닥쳤다. 부모님과 함께 밤새 물을 퍼낸 뒤에 쪽잠을 자고,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 어제의 비가 거짓말이라도 되는 양 날이 화창했다. 그 와중에 다행인 건 내가 사는 수유리에서 홍익대 정문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다는 점 정도였다. 이날의 기억이 얼마나 생생했으면 2017년 5월 6일 페이스북에 다음처럼 적었을까. 

“기억난다. 수유리 장미원. 홍대까지 갈아타지 않고 한 번에 갈 수 있었던 7번 버스. 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 들었던 라디오헤드Radiohead의 [OK Computer]. 폭삭 망한 집. 보이지 않던 미래. 너무도 절망적이어서 아름다웠던 ‘Airbag’과 ‘Paranoid Android’. 날씨는 또 얼마나 화창했던지. 잊을 수 없을 풍경, 그리고 음악.”

이런 음악, ‘Airbag’이나 ‘Paranoid Android’ 외에 여럿이다. 최근에 깊은 위로를 선물해 준 음악도 있다. 다음에 더한다.

Antony And The Johnsons

[I Am A Bird Now](2005)

잡히지 않았다. 산다는 게 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싶었던 적도 없지 않았다.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밤마다 나 자신을 매질했다. 괴로운 자기 점검 속에 질문은 바닥나질 않는데 답은 언제나 시원치가 못했다. 주위에는 늙고 병들어가는 아버지뿐이었다.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내 삶을 개선해 보려 애썼다. 회사에 취직했지만 월급의 크기가 늘어가는 이자를 감당하지 못했다. 별무소용이었다. 어느 날부터였을까. 인생이 나를 비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이 영영 멈추지 않을 줄 알았다.

작더라도 좋았다. 삶이라는 것이 그저 내가 뭔지 알아볼 만한 크기가 되기만을 바랐다. 그래서 운명의 꼭지를 스스로 조절할 수 있기를 바랐다. 정말이지 위로가 필요했던 그 시절 어느 새벽, 자기 전에 이 음반을 들었다. 첫 곡 ‘Hope There’s Someone’이 흘러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침대 위에 누워 대성통곡했다. 그것은, 이렇게 울다가 내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지독한 울음이었다. 깊고, 뼈에 사무치는 울음이었다.

일종의 정화 의식이었다. 구원이었다. 이 곡과 앨범을 다 듣고 난 뒤 나는 도리어 기묘한 힘을 얻었다. 그래, 설마 이보다 더한 바닥이 있겠어. 허리띠를 졸라맸다. 속도가 늦더라도 철저하게, 최선의 방법으로 미래를 탐욕스럽게 준비해 나갔다. 영어를 기초부터 단단히 다시 쌓고 음악의 역사를 통째로 외우듯 공부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내 인생에 단 한 번뿐인 기회가 찾아왔다.

그 시절의 내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거라고 믿는다. 고생 배틀하려는 게 아니다. 희망이라는 건, 위로라는 건, 희망과 위로가 부재하는 바로 그 순간에 가장 간절해진다는 걸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나에겐, 그랬다.

Coldplay

[Everyday Life](2019)

이번엔 조금 거창하게 ‘세계’를 한번 논해볼까. 세계의 전망, 그대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 비단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만은 아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절망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어디에선가 빚어지고 있다. 대부분 인간의 (권력에 대한) 탐욕이 빚어낸 결과다. 

[Everyday Life]에서 콜드플레이가 조감한 세상도 절망 그 자체다. 음반은 ‘Sunrise’와 ‘Sunset’, 총 두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스토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해가 떠오르고 해가 질 때까지 세계의 약자들은 그저 견디면서 하루를 살아야 한다. 그것도 매일같이. 그들을 구원할 미래는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질 않는다. 희망은, 위로는, 과연 무지개 너머에서만 존재하는 것인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희망과 위로라는 이름의 신은 대체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시리아 내전의 비극을 노래한 ‘Orphans’가 대표적이다. “폭탄이 거대한 굉음을 내는” 그곳에서 “달과 같은 눈을 지녔던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그 결과, 거리에는 고아들이 넘쳐난다. 그대여. 혹시 〈사마에게〉(2019)나 〈가버나움〉(2018)이라는 영화를 봤나.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거대한 비극의 폐허가 인간의 개별성을 어떻게 짓밟는지를. 더 놀라운 건, 그 폐허 속에서도 누군가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를 본 모두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콜드플레이도 마찬가지다. 또 다른 수록곡인 ‘Arabesque’의 후렴구에서 콜드플레이는 “음악은 미래의 무기야”라고 외친다. 다큐멘터리 〈소리와 음악 사이〉를 보면 음악은 인간으로 사는 게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중요한 것을 배우게 해준다고 한다. 그리하여 서로를 이해하고, 진정으로 함께한다는 느낌을 준다고 한다. 놀랍게도 음악을 들으면 사람들이 더 친절하게 행동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콜드플레이가 노래한 것처럼 음악은 미래의 무기가 될 수 있을까. 끝없는 비극 속에서 작은 희망 하나, 건져낼 수 있을까. 음악이 위로가 되어주고 결국에는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을까. 

음악이 세계를 구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무래도 그렇다. 그 대신 나는 밥 스탠리Bob Stanley의 말을 믿는다. “음악은 온 세상을 구하려 할 때보다 상심한 한 가슴을 치유하려 할 때 더 의미심장해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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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배순탁 (음악평론가,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