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ovely City For W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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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산책하기 좋은 도시

인생의 위기가 닥쳤다고요? 이렇게 내 인생 망해버린 건가 싶어 방바닥에 엎드려 목놓아 울기라도 하고 싶다고요? 그렇다면 산책을 한번 해보세요. 어디든 좋지만 서울이라면 더 좋지요. 서울은 산책하기 정말 좋은 도시니까요.

남쪽 바닷가 도시에서 태어나 자랐다. 부모님은 북쪽의 바닷가 출신으로, 어릴 때는 경상도 사투리를 잘 모르고 살았다. 유치원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강렬한 네이티브 경상도 사투리에 노출됐다. 선생님이 뭔가를 시켰는데 그 단어를 알아듣지 못해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당황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렇게 조금씩 경상도 사투리에 적응해 갔다.

만 18세에 홀로 상경한 후 나는 다시는, 절대로 사투리는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TV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고운 서울말로 근사한 이야기를 하는 세련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고야 말 테다! 그것은 마치 다른 인격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나 같았다.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머릿속으로 번역기부터 돌렸다. 그러다 보니 원래도 많지 않던 말수가 더 적어졌다. 말하기가 힘들어 누가 뭘 물어도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더 이상 사투리를 쓰지 않는 나는 내 생각에 좀더 세련된 사람이 된 것 같았지만 그게 진짜 나는 아니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네이티브 서울 사람은 흔치 않았다. 기숙사의 룸메이트들은 죄다 충청도에서 왔고, 대학 동기는 전라도 진도 출신이었다. 걔들은 내 사투리를 알아채지도 못했다. 목구멍으로 튀어나오려는 사투리를 막으려 잔뜩 줬던 힘이 조금씩 풀어졌다. 이제 나는 표준어도 사투리도 아닌 괴상한 말을 쓰고 있다. 경기도에서 자란 남편은 내가 사투리 억양을 쓴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내 사투리 억양은 이제 남들이 알아도 상관없는 나의 결점 같은 것이다.

얼마 전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네이티브 경상도 친구와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2019)를 봤다. 우리는 찬실의 명대사를 따라 하며 낄낄댔다. “니는 니 자신에 대해서 더 깊이깊이 생각을 해라.” 이거는 경상도 억양 아이면 맛이 안 산다 아이가! 이 말을 표준어로, 서울 사람 억양으로 하면 느끼하고 짜증이 날 것만 같다. 나는 거의 처음으로 내가 경상도 사투리의 뉘앙스를 완벽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데 감사했다. 영화 속 마흔 살의 찬실은 자기 자신에 대해 깊이깊이 생각해보기로 다짐한다. 왜냐하면 인생이 망했기 때문이다. 영화 프로듀서인 그는 지금껏 좋아하는 영화만 열심히 만들며 살아왔다. 그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것도, 해본 것도 없다. 그런데 평생 함께 영화를 만들 줄 알았던 감독이 급사한 후 찬실까지 일자리를 잃는다. 돈도 없고, 찾는 이도 없고, 시집도 못 갔고, 집도 없다. 별 수 없이 달동네 꼭대기의 어느 할머니네 집 방한 칸으로 이사한 찬실은 먹고살기 위해 친한 여배우의 집에서 가사도우미 일을 하게 된다. 그리고 찬실의 앞에 자신이 장국영이라 주장하는, 이상한 남자가 나타난다.

찬실의 맛깔스러운 경상도 사투리. 과장되지도 않고 우악스럽지도 않은, 발랄하고 투박한데 어쩐지 고상한 구석이 있는 경상도 사투리. 언젠가 단정한 블라우스를 입은 학교 선생님들에게서 들었던 것 같은 그런 사투리. 그래서 찬실이의 이 명대사는, 다시 말하지만 반드시 경상도 사투리로 들어야만 맛이 난다. “니는 니 자신에 대해서 더 깊이깊이 생각을 해라.” 겨울의 서울은 스산하다. 마음 둘 데가 없다. 사람들은 어깨를 움츠리고, 나무들은 헐벗은 채로 이 혹독한 계절을 그저 견딘다. 그 추위 속을 찬실은 목도리를 칭칭 감고 씩씩하게 걷는다. 돈도 없고 남자도 없고 미래도 없건만, 찬실은 방구석에만 처박혀 있지는 않는다. 나 자신에 대해 깊이깊이 생각을 하기위해 찬실이 행하는 방법은 바로 산책이다. 산책이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수행인가. 

찬실의 깊은 생각, 그러니까 숙고는 단순히 머리로 생각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그는 생각하는 동시에 행동한다. 마음에 든 남자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고, 그에게 처절하게 퇴짜를 맞고, 집주인 할머니와 운동을 하고, 콩나물을 다듬고, 밥을 같이 먹고, 발로 빨래를 밟아서 빨고, 할머니의 한글 공부를 도와드린다. 그런 과정들을 거치며 찬실은 깨닫는다. 자신은 여전히 사는 법을 배우고 싶다는 것을. 전에는 좋아하는 영화만 열심히 하면 끝인 줄 알았지만, 다른 모든 것은 뒤로하고 일에만 자신을 바쳤지만, 지금 찬실에게 영화는 사는 법 중의 하나라는 것을.

저녁에 초인종 소리를 듣고 문을 열었더니 약속대로 넥타이를 맨 친구가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들어오라는 소리도 하지 않느냐는 친구의 팔을 끌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 밤늦게 비가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있었지만, 아직까지 저녁 공기는 건조했다. 이번에는 자동차대리점이 있는 모퉁이를 돈 뒤, 지하철역을 지나 언덕 위에 있는 대학교 앞까지 산책할 계획이었다. 산책할 생각을 하니, 그의 기분이 들떴다.

 

– 김연수,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중에서

김연수의 단편 소설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을 나는 아주 좋아하는데, 그건 나도 산책을 아주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 다시 읽어도 저 구절에서 가슴이 두근거리곤한다. 산책을 앞둔 주인공의 기분처럼 내 기분도 들뜬다. 소설의 주인공은 불면증에 걸린 남자다. 잠을 이루지 못해 고통받던 밤에 그는 책장에서 아무 책이나 빼내 펼친다. 잠이 술술 올 것 같아 고른 《암환자를 위한 생존전략》이라는 책에는 Y씨라는 암환자의 인터뷰가 수록되어 있다. 거기에서 그는 “산책으로 친구랑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면 예전에는 능률이 오르지 않던 집안일도 짧은 시간에 척척 해치우게 된답니다.”라는 문장을 발견한다. 그 문장, ‘짧은 시간에 척척’ 이라는 문장 때문에 그는 산책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산책을 청한다. 오늘은 여동생과, 내일은 고교 동창과, 그다음에는 어린 시절 친구와, 산책하면서 그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나 친구들은 대개 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친구의 말대로 우리는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그러므로 환상이라고 말해야만 옳을, 각자의 꿈들에 사로잡혀 있으며, 또 의사의 말대로 우리는 그 꿈들에 실제로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이렇게 사람들로 북적대는 길을 걸어가는 일은 혼자 집에서 걱정하는 일들의 목록을 작성하며 지내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존재하는데도 그가 말하는 실제적인 고통을 온전하게 느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자각에 이른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가 지구를 던진다고 해도 사람들이 받는 건 각자의 공일 것이다.

 

–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중에서

잠들지 못하는 고통은 그의 개인적인 고통이다. 너무도 개인적이라서 누구에게도 완벽히 이해받지 못한다.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은 이해받지 못하는 만큼 더 커진다. 지구만큼이나 커진다. 결국 누구와 함께 걸어도 고통을 나눠질 수는 없는 것이다. 아홉 명의 친구와 산책을 끝낸 후 마지막으로 그를 산책으로 이끈 《암환자를 위한 생존전략》의 Y씨를 만났을 때, 그는 이전처럼 자신의 고통을 이해받으려 노력하는 대신 Y씨의 고통에 대해 듣는다. 말기암 환자로서 더 이상의 치료를 거부하고 존엄하게 죽기 위해 병원을 나와 경복궁 경내를 걷고 또 걸었다는 Y씨의 씩씩한 이야기를. 그들이 산책을 끝내고 경복궁을 나와 광화문 광장에 도착했을 때, 그들의 눈에 비친 것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 그 거리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었다.

혼자서 걷기 시작할 때,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곳에서부터 걷기 시작한다. 저처럼 한낮과 다름없이 환하고도 파란 하늘에서, 혹은 스핀이 걸린 빗방울이 떨어진 골목에서, 분당보다도 더 멀리, 아마도 우주 저편에서부터. 그렇게 저마다 다른 곳에서 혼자서 걷기 시작해 사람들은 결국 함께 걷는 법을 익혀나간다. 그들의 산책은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들과 함께하는 산책과 같았다. 그들의 산책은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들과 함께하는 산책과 같을 것이다. 앞으로도. 영원히.

 

–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중에서

우리는 모두 각자의 고통을 끌어안고 자신만의 침대에서 홀로 누워 잠든다. 아무리 많은 이를 만나 그들에게 나의 고통을 토로해도 그 고통을 온전히 이해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침대를 벗어나 거리를 걸을 때, 우리의 시선은 조금씩 우리의 내부가 아닌 외부로 향한다. 제각각 이해받지 못할 고통을 끌어안고 있음에도 이렇게 함께 걸을 수 있다는 것, 혼자 걷기 시작해서 결국 함께 걷는 법을 익혀나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놀랍고도 아름다운 일이다.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반드시 보기로 합시다.
어른들에게는 물론이고 당신들끼리도 서로 존대하기로 합시다.
뒷간이나 담벽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 같은 것을 버리지 말기로 합시다.
꽃이나 풀을 꺾지 말고 동물을 사랑하기로 합시다.
전차나 기차에서는 어른들에게 자리를 사양하기로 합시다.
입을 꼭 다물고 몸을 바르게 가지기로 합시다.”

 

– 방정환, <어린 동무들에게> 전문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갈피를 잃은 이들의 마음을 두드리는 것은 아주 단순하고, 아주 소박한 말들이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찬실이 공원에서 읊던 방정환의 글 <어린 동무들에게>와 같은 것.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의 주인공이《암환자를 위한 생존전략》에서 발견한 글귀 ”산책으로 친구랑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면 예전에는 능률이 오르지 않던 집안일도 짧은 시간에 척척 해치우게 된답니다.”와 같은 것. 찬실이네 집 할머니의 말, “나는 오늘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아. 대신 애써서 해.”와 “안고 쥐고 있으면 뭘 해. 버려야 또 채워지지.” 같은 것. 이 세상에 이렇게 ‘좋은 말’들이 넘쳐나는 것은, 그것들이 우리가 발견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사실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모르겠다.

얼마 전 서울에 갔다. 서울 곳곳에 내가 좋아하는 길들이 있다. 요즘 내가 좋아하는 길은 종로3가역에서 창덕궁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그 길은 차가 잘 다니지 않고, 보도가 도로만큼이나 넓으며, 가로수가 아름답고, 양 옆으로 깨끗한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점심을 먹고 난 직장인들이 자연스럽게 서울시의 공용 자전거 따릉이에 올라타더니, 각자의 속도대로 너른 보도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저 멀리 궁궐의 담장 너머로 커다란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푸른, 아주 푸른 하늘이 너르게 펼쳐져 있었다. 무척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김연수 | 문학동네
〈찬실이는 복도 많지〉(2019) 김초희 |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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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한수희

일러스트 서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