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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Great Ambition
나는 창문을 활짝 연 채로 책상에 앉아 있었다. 며칠에 걸쳐 창문 밖에는 사치스러운 풍경이 계속되고 있었다.
옆집 정원사가 나무를 다듬고 있었는데, 사다리를 들고 이쪽저쪽을 오가며 나무를 자를 때마다 텁텁한 풀 냄새가 코를 찔렀다. 동그란 모양으로 잘 관리된 옆집의 조경수가 마치 우리 집의 것인 양 바라보며, 배부른 풍경에 감화되고 있었다. 편집자와 미팅을 앞두고 책상에 앉아 묵묵히 무언가를 썼다가 지웠다가 반복하고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한 줄도 쓰지 못한 채로 머물러 있었다. 주로 생각나는 것들은 재기발랄하고 아이러니한 발상들이었는데, 그것들은 한결같이 조금이라도 쓰다 보면 흥미가 뚝 떨어져 버리곤 했다. 창문이 책상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글들이 금세 식어버리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결국 아무것도 적지 못한 채로 출판 미팅을 했다. “쉽고 재밌는 글보다는 뭔가 더 깊은 이야기를 쓰고 싶어요. 아직 시작은 못 했지만, 그럴 생각이에요.” 죄송스러워하는 약한 모습 대신에 작업을 대하는 원대한 포부를 밝혔다. 하지만 편집자에게는 나의 포부가 크게 와닿지 않는 듯 보였다. 그는 공식적으로 몇 가지 문제를 지적했다. 첫째 문제는 그래서 뭘 쓸지에 대한 의견을 전하지 못한 것이고, 둘째 문제는 이미 많은 시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흘려보낸 것이었다. 내 입장에서는 창문이 작은 방으로 이사하면 뭐라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월 45만 원에 전기요금, 수도요금, 가스요금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으면 꽤 괜찮은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주방과 화장실, 세탁기까지 딸린 말끔한 옥탑방이었다. 독서실보다는 비싼 가격이지만, 가격이 부담스러운 만큼 무언가를 더 할 수도 있겠지, 생각했다. 해 지는 방향으로 난 작은 창문은 주변 건물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있었다. 손바닥만 한 창을 통해 가까이로는 앞집 건물의 옥상 바닥을, 멀리로는 동네 뒷산을 볼 수 있었다. 얇은 합판으로 작고 소박한 책상을 만들어 놓고, 철거 중인 건물에서 주워 온 주황색 의자를 가져다 놓았다. 그 외의 물건들은 방해가 될 것이라 생각해 들여놓지 않았다.
작업실을 구한 후에도 작업엔 진척이 없었다. 무언가를 써야겠다고 생각하면 그 순간 모든 이야기가 금세 결론에 다다라 식상해져 버렸다. 마치 80년대 트로트 멜로디처럼 내 글에서 정형화된 어떤 흐름이 느껴지는 게 싫었다. 그런 게 아닌 다른 방식으로 써봐야겠다고 생각하면 막막해서 아무것도 쓸 수가 없었다. 핸드폰을 뒤적거려 예전에 잠시 만나던 사람의 인스타그램 페이지를 찾아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의 페이지를 훔쳐보았다. 페이지를 끝까지 올려 오래전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보고 혹시 그 사진을 찍은 때가 내가 그 사람과 왕래하던 무렵이었는지 가늠해본다. 짠 내 나는 지난 일을 뒤적거리는 건, 어느 특정한 부위의 꿉꿉한 냄새를 자꾸만 맡는 것처럼 중독성 있는 일이다. 옥탑방에서의 시간은 훌렁 옷을 벗어젖히는 것처럼 쉽게 흘러갔다. 저녁 무렵에 어둑한 철제 계단을 더듬거리며 내려올 때,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하루를 흘려버린 것이 너무 후회스러웠다. 그래도 작업실에서 하루 종일 몸을 비비며 물도 쓰고 전기도 썼으니까 월세가 아깝지는 않은 거라며 스스로 위안했다.
빈둥거리며 누워서 올리버 색스의 저서 《의식의 강》을 읽었다. 책에서 자신의 경험과 더불어 과학적 지식유산을 소중히 소개하는 작자의 태도가 볼 만했다. 그는 존재에 대한 좀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기 위해 이전 과학자들의 연구를 훔쳐본다. 19세기 과학자들은 사람이나 강아지처럼 뇌가 있는 생물이 아니라면 정신세계가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었다. 심지어 데카르트는 강아지마저도 의식이 없는 존재로 규정하고, 강아지의 고통스러운 반응은 기계적 반응일 뿐이라고 이야기했다. 과학자들이 군소와 해파리 등 하등동물을 관찰하며 알게 된 것은 뇌가 없는 생물도 학습과 판단을 한다는 사실이었다. 콕 찌르면 움츠러들고 자꾸 괴롭히면 자리를 뜬다. 어떤 단순한 생명이라도 이 정도의 상호작용은 할 수 있다. 그들의 사고작용은 뇌가 아닌 세포 단위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스포츠에서 주로 사용하는 ‘세포 하나하나가 기억한다.’는 표현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서 올리버 색스가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었다.
‘정신세계는 과연 뇌 속에만 있는 것인가?’
두 달여 지난 후, 작업실에 몇 가지 물건을 더 들였다. 보라색 라벨이 붙은 위스키와 위스키 잔, 커피 필터와 커피 그라인더, 그리고 작은 냉장고. 누군가에게 담배 피우는 습관이 있는 것처럼, 나에겐 쉴 새 없이 마시는 버릇이 생겨버렸다. 창작을 다른 말로 배설이라고도 한다. 창작을 배설과 동일시하는 아이디어는 우리 몸이 돌아가는 익숙한 방식을 참고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먹고 마시는 모든 것들이 내장기관을 지나 결국 배설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들이 뇌를 거쳐 글과 그림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꼭 무언가를 배설하기 위해 무언가를 마신 것은 아니었다. 만약 우리가 혀와 위장과 소장과 대장이 없는 좀더 단순한 생명체였다면 창작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을까?
중고등학교 때 교과서는 더 이상 그릴 자리가 없을 정도로 까맣게 칠해져 있었다. 친구 얼굴, 농구 선수 앤퍼니 하더웨이와 레지 밀러의 슛 폼, 주먹을 시원하게 날리는 사람과 그 주먹에 맞은 사람의 자세, 표정, 얼굴의 상처들. 나는 그런 것들을 그리는 데 상당히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군대에 있을 땐 하루 8시간 동안 혼자 앉아서 초소를 지켰는데 그 시간 동안 종일 그림만 그렸다. 주변에 펼쳐진 풍경을 그리고, 무리 지어 돌아다니는 강아지들을 그렸다. 강아지는 강아지를 낳고 또 그 강아지는 다른 강아지를 낳았으므로 그릴 수 있는 강아지들의 조합은 끝이 없었다. 두 평 남짓한 크기의 오각형 초소는 창문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저녁에 불을 켜면 유리엔 온통 내 모습이 반사되어 나타났다. 나는 유리에 비친 무기력하고 의기소침한 이등병의 얼굴을 그리고 또 그렸다. 그 시절의 글과 그림은 분명 머리에서 배설한 ‘창작물’이 아니었다. 세포에서 발생하는 ‘운동’에 가까웠다. 뭘 그릴까 망설이지 않고 개가 땅을 파듯이 마구 그렸으니까. 그 시절의 시간은 꽉 차서 무겁게 가라앉아버린 것인지, 그래서 다시 떠오르지 않고 있는 것 같다.
강아지는 놀아달라며 침으로 범벅이 된 공을 발끝에 툭 내려놓고, 고양이는 푹신한 손으로 사물을 사알짝 건드려 넘어뜨리는데, 이것들은 엄연히 고등생물만이 할 수 있는 창작활동이다. 뭔가를 만들어보겠다고 1년이나 허비해버린 입장에서 창작이나 시간 때우기나 다른 게 뭔지 이제는 잘 모르겠다.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글을 내놓고 그림을 내놓던 생명이 조금 더 진화하면 다른 무언가를 내놓는지 궁금하다. 인류는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내놓고, ‘좋아요’를 내놓고, 댓글을 내놓는다. 그보다 훨씬 원대한 일을 꿈꾸는 이들은 아무것도 내놓지 않고 그들을 훔쳐보기만 한다.
글·그림 한승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