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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을수록 더욱 단단한
어쩐지 만년필로 쓰고 읽는 내 글씨체는 아주 낯설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처음 본 듯한 글씨 모양은 이상하리만큼 멀게 느껴졌다. 만년필을 잡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나와는 달라서 이해가 필요하고 가까워지기까지는 그만큼의 시간을 들여야 한다. 가장 일상적인 일에 가장 큰 노력을 쏟는 것. 이런 순간을 아끼는 사람의 공간을 들여다봤다. 만년필의 여러 시간이 혼재하는 곳, 이곳은 만년필 연구소다.
“만년필은 사람을 주체적으로 만들어가고 있어요.”
“그래서 아름답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왔죠.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요.”
“모두 수리할 것들이에요. 주말에 50개, 100개씩 고쳐요. 수리비는 잉크로 받고요(웃음).”
손에 잉크를 잔뜩 묻히고 겹겹이 쌓인 만년필들을 소개한다. 만년필 연구소 소장이자 《만년필 탐심》의 저자 박종진은 1년에 두 번 열리는 ‘서울 펜쇼’를 직접 진행하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만년필 동호회 ‘펜후드’를 운영한다. 박종진 소장의 닉네임은 ‘파커Paker 51’. 평소엔 출근하는 회사원이지만 그 외의 시간은 만년필을 잡고서 빈 종이를 채우는 것으로 보낸다.
“열 살 때였어요. 부모님 몰래 오백 원을 들고 문방구에 가서 만년필을 샀죠. 아버지는 식사가 끝나면 꼭 만년필로 글씨 연습을 하셨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멋져 보이더라고요. 당시에 비싸고 귀한 물건이었기 때문에 저에게 만년필은 늘 선망의 대상이었어요. 몰래 산 만년필을 마루 밑에 숨겨 놓고는 자주 꺼내서 쓰지도 못했죠. 원래 보관할 때는 잉크를 빼놔야 하는데 그때는 간단한 관리법도 몰라서 그대로 두었다가 망가트리기도 했죠(웃음). 이게 저의 첫 번째 만년필에 대한 기억이에요.”
연구소에는 100년도 더 된 만년필뿐만 아니라, 꽤 낡아 보이는 연필, 지우개, 라디오, 카세트 등이 있었다(그 외에도 내가 발견하지 못한 오래된 물건들이 많을 것이다). 얼마나 오랜 세월 그곳에 있었을까. 무심히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박종진 소장은 그저 좋아하는 마음을 넘어서 만년필을 통해 세상을 본다. 긴 시간을 품은 물건이 사람에게 남아 있을 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해본다. 오늘도 고장난 만년필을 고치며, 만년필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스스로 배워가고 있다.
《만년필 탐심》엔 만년필로 사람을 보는 그의 시선이 담겼다. 박목월 선생의 파커 45, 김정은, 트럼프의 펠트 팁 펜Felt-Tip Pen(만년필이 아니다), 히틀러의 세이프티Safe-ty, 오바마의 롤러볼 펜Rollerball Pen 등 만년필이든 아니든 세계적으로 공식적인 자리에서 만년필과 펜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어떤 사람이 어떤 펜을 잡는지 속속들이 파헤친다. 펜을 든 사람과 그때의 역사적 순간까지. 만년필은 생각보다 더 많은 곳에서 우리 주변을 깊이 맴돌고 있었다.
“만년필은 사람의 손에 닿으며 함께 진화해왔어요. 시간이 쌓여 자연히 사람과 닮아갔겠죠. 그동안 약 2만 개가 넘는 만년필을 고치면서 다양한 만년필과 사람들을 만났어요. 그런 과정에서 가장 간결한 구조의 만년필이 오래 살고, 단순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건강하다는 것도 알게 됐죠. 물론 모든 경우에 통하는 것은 아니지만요. 예전의 저는 복잡하고 심각한 사람이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만년필 역시 부품이 많고 특이한 기능을 가진 것들을 좋아했고요. 쉐퍼Sheaffer의 스노클Snorkel처럼요. 그런데 결국엔 복잡할수록 사람은 자주 아프고 만년필은 잘 고장 나더라고요. 내부 구조가 간단한 파커 51이 오랫동안 살아남은 이유이기도 하죠. 또, 반대로 만년필 속에서 사람을 발견하기도 해요. 뚜껑을 여는 방법, 잡은 손의 모양과 들어간 힘, 팔의 각도까지 만년필을 사용하는 습관을 살피면 그 사람이 보여요. 완전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가늠할 수는 있죠. 이런 식으로 만년필과 사람은 서로를 닮아가며 살아왔어요.”
지금까지 다양한 모양의 만년필이 세상에 나왔다. 그동안 이뤄진 자잘한 변화와 유행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클립 위치, 뚜껑 유무, 길이와 두께, 색깔 등으로 태어난 시기를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이 만년필이다. 만년필과 세계사에 얽히고설킨 사연을 펼쳐본다.
“만년필의 변화를 살펴보면 그때 사람들이 어떤 생활 방식을 가졌는지 알 수 있어요. 예를 들어 뚜껑이 없는 만년필은 암흑기이던 1950년 이후부터 1980년 이전에 나왔다고 볼 수 있어요. 볼펜보다 편리하게 쓸 수 있는 조건을 갖춰야 했기 때문이죠.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군복 패션이 유행했기 때문에 가슴팍 주머니 덮개에 펜이 덮일 수 있도록, 클립 위 길이가 짧아졌어요. 브랜드들의 전성기도 그 시기마다 천차만별인데, ‘몽블랑Montblanc’은 다른 브랜드들이 암흑기에 맞춰 만년필의 크기를 줄이고 모양에 변화를 줄 때, 만년필 고유의 클래식을 유지했어요. 마치, ‘만년필은 이래야 해!’라고 외치는 것처럼요. 그 결과 1980년대, 만년필의 부활기가 찾아왔을 때 몽블랑은 다시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죠. 꾸준히 일관성을 유지하다가 정체성을 확실히 지켜낸 셈이에요.”
박종진 소장은 우리가 사는 지금을 만년필 부활의 연장선이라고 얘기한다. 또는 ‘잉크의 시대’라고 부른다. 검정과 파랑뿐이던 잉크색은 나날이 변하면서 셀 수 없이 많은 색을 가지게 되었고, 다양한 잉크를 담을 수 있도록 펜의 수는 늘어났다. 그렇게 우리는 ‘저렴한 펜’의 시대를 맞이했고 이제 라미같은 다양한 만년필을 내놓는 브랜드가 주목받을 차례다.
연구소를 찾기 전엔 가장 오래된 만년필이 궁금했다. 가장 큰 가치를 지닐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섣부른 생각이었다. 만년필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품고 있는지보다 어떤 ‘이야기’를 가졌는지가 중요했다. 사실 이건 모든 오래된 물건에 해당하는 이야기이며,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그저 더 많이 살았다고 해서 좋은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좋은 시간 안엔 반드시 좋은 이야기가 담겨 있을 테니까.
“그냥 오래된 만년필보다는 워터맨Waterman58, 펠리칸Pelikan100 같은 특이한 종류의 만년필들이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더 좋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어요. 모두 그 당시에 화제를 이끌었거나, 그만의 특별한 사연을 가지고 있죠. 무조건 오래되었다고 해서 모두 빈티지의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니니까요.”
우리는 끝으로 만년필의 미래를 이야기했다. 안타깝지만 사실 속으로 만년필은 사라져 가는 것 중의 하나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것도 섣부른 생각이었다.
“요즘엔 직접 손글씨를 쓰는 시간이 줄어들었지만 반대로 만년필을 잡는 경우는 늘어나고 있어요. 나만의 도구를 사용하고 싶다는 생각일까요. 만년필은 종이와 만났을 때의 조합이 중요한 필기구예요. 그래서 구매할 때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죠. 번거롭지만 이건 아날로그 물건만이 가지는 매력이기도 해요. 우리가 자판을 치고 글자를 쓰면 결과치는 같지만, 손글씨는 늘 다른 결과를 보여주잖아요. 종이와의 궁합을 따져야 하는 만년필은 더욱이 그렇고요. 만년필을 잡는 사람들의 연령층도 점점 젊어졌어요. 레트로 열풍이 불고 SNS가 활발해지면서 소통의 도구가 만년필이 되기도 하면서요. 이렇게 만년필은 사람을 주체적으로 만들어가고 있어요. 그래서 아름답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왔죠.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요.”
글을 쓴다는 것은 무척 흔한 일이라 그냥 지나치기 마련이지만, 만년필을 잡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예상하지 못했던, 뜻밖의 어떤 것과 마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게 무엇이 되었건 따분하던 오늘을 완전히 바꾸는 계기가 될지 모른다. 가장 일상적인 일을 특별한 도구와 함께 하는 것. 이제부터 만년필을 잡고 무엇을 만들어 갈지, 기분 좋은 상상을 한다.
《만년필 탐심》
박종진ㅣ틈새책방
에디터 김지수
포토그래퍼 안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