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ay Of Walkerholic

워커홀릭 씨의 일일

하루에 1만 보 걷기가 어렵다 하여 만보기라는 게 생겼다는데, 하루 1만보는 너끈히 걷고 있어 만보기의 쓸모는 잘 모르는 사람. 하루는 가볍게 산이나 타보자며 집을 나서서는 연희동 주변을 3만 6천 보나 걷고 돌아왔다. 산과 강을 두루 거닌 연희동 산책길을 여기에 살짝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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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서울 서대문구 봉원동 산1

다섯 개의 통로

안산자락길

안산에 가자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경기도 안산시를 떠올리고 “거기 뭐가 있는데?” 하고 되물었다. 정상에 오르면 인왕산도 보이고 북악산도 보인단다. 가만히 들어보니 안산은 이름 그대로 ‘산’이었다. 서대문구에 오를 수 있는 산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없어 호기심이 일었고, 마음먹고 안산에 올라보기로 했다. 폭염주의보가 내릴락 말락 하던 말간 초여름에.

안산자락길로 통하는 길은 다섯 군데가 있다. 독립문역, 홍제동 고은초등학교, 서울시립서대문도서관, 홍제천 인공폭포, 서대문구청 입구. 초여름이라기엔 상당히 덥던 어느 날 내가 선택한 입구는… 음, 지도를 봐도 잘 모르겠다. 이화여자대학교 뒤편으로 올라서는 봉원사 주변에서 헤매다가 ‘길은 다 통하게 되어 있다.’는 명제를 쫓아 걷다 보니 안산자락길에 당도했다. 순한 흙길을 따라 어렵지 않게 걷다 보면 곳곳에서 이정표를 만나게 된다. 이 길, 저 길 기웃거리면서 정상이라고 적힌 봉수대를 쫓아 걸었다. 험난한 산이라기엔 온순하지만 산은 산이어서 오르는 숨이 점점 가빠진다. 등산 스틱을 나란히 쥐고 오르는 어른들과 아이스크림을 사달라 조르는 아이들을 보면서 한 발짝 두 발짝 무게를 싣다 보면 어느덧 정상. 전망대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 서울 전경이 한눈에 보인다. 봉수대 앞에서 사진을 몇 장 찍고, 숨을 고르고, 물도 한 모금 마시고 서 있자니 서울의 왕이 된 기분이다. 내려와서 보니 벌써 1만 8천 보를 걸었다.

TIP
꼭 정상에 오를 생각이 아니라면 메타세쿼이아 숲길에서 산책하는 것도 좋다. 데크로드로 조성되어 있어 걷기에 편하고 휠체어나 유모차가 다닐 수도 있는 데다가 대여 시스템도 있다. 데크로드만 빙 둘러 산책하는 걸로도 초록빛 서울을 만끽할 수 있을 테다. 내려오는 길에 서대문자연사박물관 마당에 세워진 커다란 공룡 조각상을 만나는 것도 큰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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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산82-12

길쭉하고 높은 자리

궁동근린공원

어느 동네든 지도를 조금만 훑어보면 공원이 가까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하다못해 작은 놀이터에도 ‘○○공원’이라는 명칭이 붙어 있으니까. 공원을 곁에 두고 산다는 건 대단한 행복이다. 자연에 마음 놓고 기대 쉴 수 있는 곳, 걷다 보면 마음에 온기가 들어차는 곳, 연희동에서 그런 공원을 하나 꼽으라면 궁동근린공원이 아닐까. 안산자락길에서 연희동 방향으로 내려와 조금 높은 주택가를 걸어 걸어 올라가면 궁동산 둘레길이 펼쳐진다. 소요 시간은 40여 분 정도. 공원 곳곳엔 꼬리풀, 꽃잔디, 할미꽃 같은 꽃들이 있어 계절에 따라 철쭉이나 장미도 풍성하게 만나볼 수 있다. 

연희동의 랜드마크 ‘사러가’를 끼고 주택가를 조금 오르면 펼쳐지는 급경사 코스는 걷기 초보자에겐 생각보단 힘든 코스일 테다. 생각보다 기울어진 길이라 한여름에 오르면 숨소리가 다소 거칠어지는데, 연희동의 고즈넉함이 그대로 깃든 골목골목은 대조적으로 조용하고 얌전하다. 가끔 경사진 길에서 어렵지 않게 작은 마을버스를 만날 수도 있다. 주택가의 넓지 않은 골목을, 게다가 이토록 급경사인 길목을 오르는 작은 버스는 마법 버스처럼 단단하고 힘이 세 보인다. 버스는 오르막길을 올라 궁동근린공원에서 정차한다. 무려 여기가 종점이다. 5월이면 장미 정원이 조성되는 이 작고 기다란 공원은 생각보다 훨씬 고즈넉하다. 버스 정류장 부근에 있는 벤치 앞에 서면 연희동의 낮은 건물들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이럴 때 “숨통 트인다!”고 하는 게 아닐까.

TIP
사러가를 끼고 오르막길을 10분여 오르면 ‘둘리 비디오’라는 오래된 간판을 만날 수 있다. 비디오 대여점은 사라졌지만 간판은 남아 어릴 적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 앞에서 사진을 몇 장 찍고 있으면 지금이 몇 년도인지 헷갈리는 지경에 이르는데, 지금 그 공간은 누군가 사용하고 있으니 수상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으려면 주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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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역사공원 A. 서울 마포구 토정로 2

바람 따라 골라 걷는

한강공원

서울의 상징 한강. 한강을 건너려고 만들어진 다리만 해도 서른한 개. 강원도부터 충청북도, 경기도, 서울까지 이어지는 이 커다란 물줄기를 따라 펼쳐진 푸른 공원은 서울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따듯한 사치 아닐까.

걷기의 마지막 코스로 향하기 위해 궁동근린공원에서 내려와 따릉이를 대여해 양화진역사공원까지 천천히 질주한다. 약 5킬로 거리의 코스로, 자전거를 타면 20분 남짓이다. 자전거길로 걷는 사람들을 피해 달려 도착하니 후텁지근하고 여린 바람이 분다. 여름 저녁에만 느낄 수 있는 미미한 훈풍. 따릉이를 반납하고 절두산 순교성지를 오르면 양화진 외국인 묘지도 지날 수 있다. 개화기에 조선을 방문하여 굵직한 업적을 남긴 외국인들이 묻힌 장소다.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을 세운 헤론…같은 선교사의 이름을 떠올리며 한강공원 절두산성지에 도착한다.

오늘의 마지막 코스는 한강공원 절두산성지부터 난지한강공원 진입로까지 걸어서 왕복하는 길. 한강을 따라 펼쳐진 산책로를 타박타박 걷는 길이니 대단한 길치에게도 친절한 산책길일 테다. 혹시 모르니 지도 애플리케이션을 손에 쥐고 걷기 시작한지 한 시간쯤 흘렀을까, 홍제천을 지나 난지한강공원 진입로가 보인다. 주인과 함께 쫄래쫄래 걷는 강아지 보는 일이 즐겁고, 바람 사이를 걷는 연인의 모습과 달리기바쁜 러너의 모습이 여름의 옅은 저녁을 닮았다. 왕복하고 확인하니 세 번째 코스는 8킬로 남짓. 두 시간 정도 걸었다. 마지막 코스까지 완주하고 족욕으로 하루를 마치면 워커홀릭의 하루는 건강하게 끝이 난다. 오늘 걸은 걸음 수는 거진 4만 보에 달한다.

TIP
정확한 위치를 설명하긴 어렵지만 난지한강공원으로 향하는 길목을 잘 둘러보면 나무 틈으로 샛길을 발견할 수 있다. 인적이 드문 그 길로 들어서면 거짓말처럼 좁은 길과 텅 빈 푸른 숲이 펼쳐지는데, 사람도 없고 가끔 풀벌레 소리만 들리는 그곳에서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 그렇게나 상쾌할 수가 없다. 밤 산책 코스로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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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주연

사진 노의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