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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함께 멈추었던 순간들
4월의 풍경, 꽃
꽃과 함께
멈추었던 순간들
짧은 여행에서 돌아와 긴 잠을 잤다. 캄캄할 만큼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나니, 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아직 봄꽃이 멀리 있는 시절에, 꽃에 대해 말하고 싶어졌다. 이 봄, 우리는 얼마나 많은 꽃을 보게 될까. 환한 꽃그늘 아래서 잠시 눈 감는 사이, 봄은 또 얼마나 쉬이 가버릴까.
피어난 지금을
또렷이 바라볼 때
2월의 제주는 여전히 추웠지만, 낮이면 뺨에 와 닿는 바람이 따스했다. 먼 남쪽 바다에서부터 봄이 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나흘을 머물러 가서는 그저 자주 걸어 다니기만 했는데, 종종 어느 길목에서는 이르게 꽃을 피운 나무들을 볼 수 있었다. 올 들어 처음 보는 꽃들이었다. 대문을 활짝 열어두는 시골집들, 까치발을 서지 않아도 들여다보이는 돌담 너머로 매화 몇 송이가 이른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러려고 온 것은 아니었지만, 꼭 미리 봄을 만나러 이곳까지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진을 찍어 몇몇 친구들에게 보내주었다. 제주에는 벌써 봄이 온다고.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내가 겨우내 봄을 기다려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봄은 기다리는 순간에 이미 멀리서부터 오고 있었다는 것도. 그렇다면, 봄이라고 깨닫는 순간부터 봄은 이미 지나가고 있을 것이다. 피는 것인지 지는 것인지 모르고서 바라보는 봄꽃들처럼.
그 경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년 반복해서 비로소 깨닫는 그 순간이 중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봄을 기다렸구나, 깨닫는 순간. 아, 지금이 봄이구나, 깨닫는 순간. 이 봄이 지나가고 있구나, 깨닫는 그런 순간. 그럴 때만이 우리는 또렷이 현재를 바라본다.
내가 꽃과 함께 멈추었던 순간들을 이렇게 수집해놓은 이유도 알 것 같다. 지금 여기에 피어 있는 꽃들은, 지금을 바라보게 하기 때문이다. 지나간 어제의 아름다움도, 짐작 못 할 내일의 아름다움도 아닌, 오직 이 순간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게 한다. 피어난 꽃송이를 바라보며 순수하게 감탄할 때, 우리는 오롯이 현재를 산다. 그리하여 현명해진다. 이 순간이 지나갈 것임을 알고 있으므로. 피어난 지금을, 맑은 눈으로 오래 응시하려 하므로.
우리는 마치 기차역의 플랫폼에 선
여행자들처럼
꽃 같은 시절. 그렇게 말하고 나면, 프랑수아즈 사강과 장 폴 사르트르가 떠오른다. 시력을 잃고 글을 쓰지 못하던 일흔네 살의 사르트르는 마흔네 살의 프랑수아즈 사강과 사랑에 빠져 열흘에 한 번씩 만나 대화를 나누며 사랑을 이어가게 된다. 죽기 전의 일 년간 함께한 그 시간을 사르트르가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사강이 쓴 자전적 에세이를 통해 들을 수 있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우리의 관계에서 그가 좋아했던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우리가 공통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절대로 이야기하지 않는 점이라고. 그는 말했다. “우리는 마치 기차역의 플랫폼에 서 있는 여행자들처럼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지.”
– 프랑수아즈 사강, <고통과 환의의 날들> 중에서
그들이 보낸 삼백예순 날은 아마 하루하루가 꽃잎 같았을 것이다. 아름다워서만이 아니라, 매일 한 장씩 그 꽃잎이 지고 있었으므로. 그러므로 아껴둘 말도, 돌려 말할 진심도, 다른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느라 허비할 시간 같은 것도 없었을 것이다. 눈을 감고 상상해본다. 우리는 지금 기차역의 플랫폼에 서 있는 여행자들이다. 꼭 해야 할 말은 두 번 다시 전할 기회가 없으니, 내놓아야 할 것은 이 순간의 진심밖에, 나 자신에 대한 진짜 이야기밖에 없다. 그럴 때 시간은 너무 빠르게 흘렀겠으나, 그 시간은 또한 얼마나 깊었을까. 그 일 년이 어쩌면 그에겐 전 생애 같았으리라고, 수십 년 뒤의 어느 독자는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꽃 같은 현재를 상기시키는 뺨이 환한 꽃들 앞에서, 우리는 함께 있는 이를 마땅히 그렇게 생각해야 할 일이다. 이제 헤어지면 다시 못 만날 사람처럼. 함께하려면 오직 지금 이 순간뿐인 사람처럼. 이 꽃 아래, 마지막 악수를 나누는 사이처럼.
이 봄, 나를 위해
충분히 애쓰는 일
그러나 다시 못 만날 사람처럼 누군가에게 진심을 전하려면, 당연한 말이지만 진심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진심이라 해도, 자신이 그 마음의 존재를 제대로 알고 있어야 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기차역의 플랫폼에 선 여행자들처럼 서로를 마주하고도, 의미 없는 말들로 시간을 흘려보내고 말겠지.
진심에 대해 생각할 때 나는, 나이 마흔에 우연히 교정의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세다가 나무 각각의 세세한 차이를 발견하며 갑자기 눈이 떠졌다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나무를 보며 배우고 깨달은 그는, 그 후 나무를 통해 역사와 인문학을 이야기하는 수많은 책을 펴낸다. 그가 전한 말 중, 꽃잎처럼 책갈피에 끼워두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이다.
곧 봄이 와서 나무에 새순이 올라오려고 하면 그때 모과나무 한번 만져보세요. 몸통부터 촉촉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나무는 치열합니다. 나는 나무처럼 나 자신부터 온전해지고 치열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어떤 경우든 자신을 완성해야 남에게 어떤 역할인가를 할 수 있습니다. 나뭇가지가 우리 보고 와서 쉬라고 그늘을 만들었을까요? 우리 보고 와서 감탄하라고 단풍이 들까요? 자기를 위해서 충분히 애써야 합니다. 그것이 나무의 이기주의입니다. 그렇게 치열할 때만 존재는 다른 존재에게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 ‘나무 선비’ 강판권 교수의 말, 정혜윤의 <여행, 혹은 여행처럼> 중에서
사람은 어리석게도 피어난 꽃을 보며 그것이 우리 보라고 저리 아름답게 핀 줄 알지만, 나무의 진심은 다른 데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진심이 그토록 아름답게 꽃으로 피어나,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으니 틀린 말은 아닌지도 모른다.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그는 말한다. 어떤 경우든 나 자신을 위해 충분히 애써야, 다른 존재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고.
애꿎은 데 애써온 시간이 길었다. 피는 꽃 앞에 걸음을 멈출 줄 몰랐고, 마지막 악수를 나누듯 대화하지도 못했으며, 나 자신을 충분히 또 제대로 사랑하기 위해 끝까지 애써보지도 못했다. 그러니 이 봄, 우리가 꽃그늘 아래서 해야 할 숙제는 하나인지도 모르겠다. 나 자신을 위해 충분히 애쓰는 일. 이토록 자주 꽃의 시간들을 모아두면서도, 내가 아직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이 그것이듯. 그 하나의 숙제만 해내기에도 봄은 짧을 것이다. 꽃 같은 시절이 또 한 번 간다.
에디터 김건태
글·사진 김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