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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 시간 동안의 헬싱키
열아홉 시간 동안의 헬싱키
수많은 ‘슬로우 무비’ 가운데 여전히 내게 가장 큰 감동을 주는 영화는 <카모메 식당>이다. 영화는 일본인 사치에가 핀란드 헬싱키의 길모퉁이에 작은 식당을 내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그렸다. 각자의 사연으로 핀란드 헬싱키에 모이게 된 사치에와 미도리, 마사코는 오니기리와 가정식, 시나몬 롤과 핸드드립커피 등 단출하고 소박한 메뉴를 내놓으며 서로를, 그리고 손님들을 따뜻하게 위로한다. 얼마 전 나는 지금까지 수십 번은 족히 보았을 <카모메 식당>을 또 꺼내보았다. 2007년에 영화가 개봉하고 근 10년 동안, 삶에 지쳐 힘이 들고 위로가 필요할 때면 언제나 이 영화를 꺼내보곤 했다. 화면을 채우는 맛있는 음식과 등장인물들의 소소한 일상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잔잔한 미소를 짓게 된다. 자극적인 스토리나 과장된 판타지도 없는 느리고 무미건조한 영화이지만 담담한 기운에 마음이 다독여진다. 그리고 이 영화를 통해 위로받은 사람이라면, 한 번도 생각에 둔 적이 없었던 ‘헬싱키’라는 도시가 마음 깊이 새겨진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차창 밖 핀란드의 숲
유럽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스탑오버Stopover로 1박 2일 헬싱키에 머물 기회를 얻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19시간이었다. 베를린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밤 10시가 넘어서야 헬싱키 반타공항Vantaa airport에 도착했다. 30여 일이 넘는 여행기간 동안 40킬로그램에 육박해져 버린 짐은 집이 있는 방콕 연결 편으로 바로 보내버렸다. 여행을 다니며 트렁크를 끌고 다니는 것에 이골이 났던 터라 작은 기내용 캐리어마저도 공항 내 물품 보관함에 집어넣고 배낭 하나만 챙겨서 공항을 빠져나왔다. 밤 11시가 다 되었는데도 아직 하늘은 저녁 5시 정도의 느낌이었다.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길에 차창은 끊임없이 초록색으로 물들었다. 영화 <카모메 식당>에서 오랫동안 간병하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텔레비전을 통해 고요하고 편안해 보이는 핀란드인들의 모습에 끌려 여행을 왔다는 마사코의 말에 토미는 이렇게 대답한다
“모리(숲), 우리에겐 울창한 숲이 있어요.” 핀란드를 고요하고 편안한 상태로 만들어주는 숲. 핀란드 면적의 7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이 숲이다. 중앙역에 도착해 예약해둔 호텔을 찾았다. 헬싱키에 머물 시간이 별로 없으니 호텔을 고를 때는 위치를 가장 우선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예약한 스칸딕 마스키 호텔Scandic Maski Hotel은 공항버스 정류장이나 웬만한 관광지도 모두 도보로 이동이 가능하고, 호텔 바로 앞에 서는 트램을 이용할 수도 있었다. 새벽 1시가 되어도 하늘의 한쪽은 여전히 푸르스름한 백야白夜여서 두꺼운 암막 커튼을 쳐야 비로소 밤의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잠시 사라졌던 해는 새벽 3시가 되면 다시 슬그머니 뜬다고 하니 과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다웠다.
뚱뚱한 카모메들을 마주하고
몸을 겨우 일으켜 조식을 먹으러 내려가는데, 엘리베이터 안에는 샤워가운만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알고 보니 호텔 안의 사우나를 이용하고 온 것이었다. 헬싱키의 대부분 호텔에 갖추어진 사우나 시설은 투숙객이라면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다. 조식뷔페에 메뉴 가짓수가 매우 많았는데 항구 도시답게 생선 요리가 뛰어났다. ‘핀란드라면 연어’라는 생각으로 아침부터 연어로 든든히 배를 채우고 호텔을 나섰다.
아름다운 헬싱키 대성당The Lutheran Cathedral을 지나 마켓 광장Helsinki Market Square으로 향했다. 넉넉한 사람들의 인심 때문인지 마켓 광장에는 뚱뚱한 카모메かもめ(갈매기)들이 아주 많았다. 부두의 갈매기를 보며 어릴 때 키우던 뚱뚱한 고양이를 떠올렸던 사치에의 모습이 비로소 이해가 갔다. 아침마다 그녀가 식당에서 쓸 신선한 재료를 구입했던 항구 시장은 스크린 속 모습 그대로 활기가 넘쳤다. 부두에 배를 대놓고 갓 잡은 생선을 파는 사람들도 있고, 한쪽에는 관광객을 위한 기념품 좌판도 있다. 아침 시장이 주는 싱싱한 에너지를 받고 나니 전날의 비행 후유증과 피곤함이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헬싱키를 여행하고 돌아왔던 친구가 “이상하게 헬싱키는 사진을 찍으면 푸르스름한 빛이 돌아.”라는 말을 했었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헬싱키의 공기는 유난히도 푸른 느낌이었다. 바다가 있어서 그런 것일까. 내게는 핀란드를 생각하며 떠올렸던 이미지가 몇 개 있다. 날씨가 매우 춥고, 물가는 비싸고, 사람들은 도도하고 차가울 것 같은 이미지 말이다. 그중에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여름임에도 헬싱키의 바람은 차갑게 느껴지지만 맑고 생기 있다. 물가는 비싼 편이지만 제품은 합리적이다. 무엇보다 핀란드 사람들은 꽤 친절했다. 길에서 눈이라도 마주치면 ‘Hei’나 ‘Moi’라고 살가운 인사를 건넸고, 차갑게만 보이던 핀란드 사람들이 ‘Kiitos(감사합니다)’라고 말할 때는 그 발음이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날 정도였다.
으스대지 않는 도시
마켓 광장에서 발길을 돌려 헬싱키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인 에스플라나드Esplanade 거리로 향했다. 그동안 방문했던 유럽의 도시들과 다르게 헬싱키의 건물들은 다소 무뚝뚝한 느낌이었다. 디자인의 나라답게 온갖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했을 것이라는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간판과 거리의 사인들은 우직하면서도 직관적이고, 아름다웠다. 모든 것들은 저마다의 색깔을 내려고 애쓰거나 으스대지 않고 모두 한데 어우러진 모습이었다. 스토크만 백화점Stockmann, 아르텍Artek, 이딸라Iittala, 마리메꼬Marimekko, 아리까Aarikka 등등 핀란드를 대표하는 브랜드 상점들은 모두 에스플라나드 거리에 위치해있었다. 거리를 걷다 보면 많은 일본인 관광객들을 만날 수 있다. 일본사람들의 핀란드 사랑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마리메꼬와 무민을 향한 애정만 봐도 짐작이 갈 정도이다. 영화 속 카모메 식당으로 인해 핀란드를 좋아하게 된 것인지 아니면 그전부터 핀란드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두 나라는 닮은 구석이 많다. 연어를 좋아하는 것과 사우나가 대중적이라는 것, 생활용품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것들 말이다.
스토크만 백화점 앞에 위치한 아카데믹 서점The Academic Bookstore으로 향했다. 아카데믹 서점은 핀란드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건축가 알바 알토Alvar Aalto가 지은 곳이었다. 알바 알토 건물은 목재를 활용한 기하학적인 외형도 특징이지만, 일조량이 적은 북쪽 지방 특성을 고려해 자연광이 가득 들어오도록 설계하고, 조명에 공을 많이 들인 내부 공간이 더 인상적이었다. 헬싱키 곳곳의 알바 알토의 건물들 가운데 사무실이나 연구소 등을 방문하는 데는 제약이 따르기 마련인데, 아카데믹 서점은 외부에 개방돼 있는 공간으로 일반인들도 쉽게 관람할 수 있었다. 1961~69년 사이에 지어진 아카데믹 서점은 처음 설계할 때부터 스토크만과 하나인 것처럼 계획되었다. 서점의 높은 천장은 공간을 더 넓어 보이게 만들었고, 책처럼 펼쳐지는 창문의 모양은 서점으로 햇빛을 쏟아져 들어오도록 설계되었다. 매우 넓은 공간이었음에도 아늑하고 따뜻한 느낌이 드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서점 한 켠에 있던 카페 알토Café Aalto는 <카모메 식당>에서 사치에와 미도리가 처음 만나는 공간이기도 하다. 식당에 처음 온 손님인 토미가 질문한 ‘가챠맨’의 가사를 기억해내려고 애쓰지만 기억하지 못했고, 우연히 카페에 앉아 일본책을 읽고 있던 미도리에게 다가가 가사를 묻는다. 그렇게 인연이 된 사람들은 함께 카모메 식당에서 일하며 헬싱키에 머무른다.
카모메 식당이 없는 헬싱키
드디어 카모메 식당으로 향할 시간이었다. 마침 점심시간이 지나 배도 고픈 참이었다. 헬싱키에 와서 처음으로 트램을 탔다. 왁자지껄한 번화가를 지나 한적한 동네로 들어갈 때 즈음 트램에서 내렸다. 아쉽게도 영화 속 카모메 식당은 이미 사라져 없었고, 영화가 끝난 후에 원래 식당주인이 다시 영업을 재개하여 카빌라 수오미Kahvila Suomi라는 이름으로 핀란드 가정식 음식을 선보이는 중이었다. 하지만 너무도 달라져 버린 식당의 외관은 안타까움을 자아냈고, 내부는 더 심각한 상태였다. 나는 서둘러 식당을 빠져 나왔고 한참 동안 실망감을 달래야 했다.
하지만 헬싱키의 번화한 장소만 보다가 동네 주민들이 다니는 조그만 거리를 볼 수 있는 것은 다행이었다. 한적하고 조용한 동네였고, 곳곳마다 예쁜 사인의 상점과 아파트가 눈에 띄었다. 카모메 식당을 찾아오는 길에 봐두었던 이름 모를 카페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고, 커피 한 잔과 시나몬 롤을 주문했다. 사실 향신료가 들어간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에, 시나몬 롤 역시 좋아한다기보다는 싫어하는 쪽에 가까웠다. 하지만 카모메 식당을 본 사람들이라면 시나몬 롤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을 것일 테고 나 역시 그랬다
일본음식이 익숙하지 않았던 핀란드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등장했던 시나몬 롤은 영화의 전환점이자, 그들을 연결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쉽게도 카페에선 시나몬 롤을 팔지 않았고, 점원은 대신 설탕이 잔뜩 묻어있는 핀란드 빵을 추천했다. 빵을 크게 한입 베어 물며 내 자신을 반성했다. 사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영화 속 장소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유지될 리 만무했으며, 그걸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영화 속 장소는 영화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일 뿐, 갑자기 이곳까지 찾아온 내 자신이 어쩐지 무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콕으로 돌아갈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은 트램을 타고 낯선 동네로 향했다. 그리고 동네 뒷골목을 걸어 다니다가, 공원에 앉아 운동하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동네 슈퍼마켓에 가서 방콕에서 기다리고 있을 식구들을 위해 싱싱한 자두와 체리를 샀다.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싣고 차창 밖으로 멀어지는 헬싱키를 바라보며 짧은 여행의 아쉬움을 달랬다.
MoiMoi! Helsinki!
에디터 김건태
글·사진 김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