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는 한때 나와 같은 회사의 마케터였다. 한때라는 전제가 붙는 이유는, 우리 두 사람 모두 지금은 그 회사에 다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Y가 먼저 떠났고 나는 좀더 나중에 그곳으로부터 나왔다. 그동안의 경험치로 미루어봤을 때 ‘퇴사한 사람’과 ‘회사에 남은 사람’의 인연이 이어지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다. 회사에서 만난 이와 마음을 트고 친구가 되는 일은 극소수의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기적에 가까웠다.
Y와 나는 ‘전 직장 동료’와 ‘친구’ 그 중간 어딘가에 있는 것 같은데, 같은 회사를 다니다가 나 혼자 남았을 때도, 두 사람이 다른 회사에서 월급을 받게 되었을 때도, 지금처럼 한 사람이 잠시 일을 쉬는 때도 우리의 적절한 사이는 유지되어 왔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친구가 되는 기적을 일으킨 것은 아니지만, 그저 단순한 회사 사람보다는 분명히 가깝고 다정하다. 얼마쯤은 마음속 깊은 속내도 터놓을 수 있고 눈치를 보거나 불필요한 말을 하는 데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된다. 어느 날 불쑥 안부를 물어도 어색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일의 부흥과 개인의 평화를 있는 힘껏 응원한다. 우리를 규정한 것은 조직이 아니라 일이었다. 같은 목표를 위해 다른 방식으로 안간힘을 쓰는 관계. 불쑥불쑥 그녀의 친구가 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기도 했으나 늘 한 발 나아가기보다는 그 자리에 있는 편이었다.
연말이 되면 생각나는 사람들에게 “올해가 가기 전에 한번 보자” 하며 연락할 핑계를 만들 수 있어 기쁘다. 12월에 태어난 Y와도 역시 그런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기약 없는 “다음에 언제 한번”이 아닌 “다음주 목요일 콜!”을 외치며 우리는 만났다. 지역별 맛집을 섭렵하고 있는 그녀와는 늘 대충 먹은 적이 없다. 한 끼를 먹더라도 제대로 맛있게 잘 먹었다. 이번에는 내가 있는 곳으로 그녀가 오기로 한 덕분에 오랜만에 내가 식당을 결정하게 되었는데, 여간 고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급기야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Y와 함께 먹었던 것 중에서 가장 맛있었던 것이 무엇이었던가를 더듬어보았고, 언젠가 그녀의 집 근처 ‘뜰애우’에서 먹었던 양 곱창을 떠올렸다. 그리고 나는 망설임 없이 ‘세광 양 대창’에 전화를 걸고 외쳤다. “목요일 오후 여섯시 삼십분 2명이요!”
세광 양 대창은 저녁마다 양 곱창이 불판 위에서 지글거리고 소주와 맥주가 연거푸 테이블로 배달되는 가게다. 불판을 몇 번씩 바꿔가며 고기를 배 터지게 먹고도 모자라 양밥을 추가로 시켜 이제 막 와서 앉은 것처럼 다시 시작하는 곳. 분명 얼마 전에 오픈한 곳인데, 어디선가 영업하던 곳을 떼다가 옮겨온 것 같은 내외부 인테리어가 굉장히 오래된 노포를 연상시킨다. 이게 바로 레트로 열풍의 증거이겠지.
이 가게의 맛있는 양 대창 만큼이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다. 가게에는 군데군데 특이한 구석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테이블에 비치된 머리 고무줄이다. 그런데 이 머리끈은 묶고 나서 자국이 남는 짱짱한 고무줄이 아니다. 스프링처럼 말린 플라스틱 고무줄은 긴 머리 질끈 묶고 전투적인 식사를 마친 후에 다시 풀어도 가게에 들어올 때처럼 촤라락 흩날리는 머릿결로 돌아가게 해준다. 게다가 머리카락이 엉키거나 뽑힐 염려도 없다. 필시 여자들만 아는 작은 배려일 테지만, 이런 섬세함이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이곳을 찾게 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계산하고 나가는 길에는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무료로 뽑아 먹을 수 있다. 새하얀 아이스크림을 예쁘게 말아 올려야 하는 긴장감과 적당히 얼음 맛(?)이 느껴지는 우유 아이스크림은 슬그머니 어릴 적 추억을 소환한다.
Y를 만날 때마다 내 입은 먹느라 바쁘고, 마시느라 바쁘고, 말하느라 바쁘다. 물론 듣는 두 귀 또한. 나보다 연차가 조금 더 많은 그녀는 분야는 다르지만 몇 남지 않은 업계 선배로서 그 자체로 귀하다. 우리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이야기로 몇 시간을 순식간에 채우곤 한다. 만날 때마다 금세 늦은 밤이 되니 아쉬워하며 다음을 기약하는 헤어짐이 반복되는 것이다. Y와 나의 반경에서 일어나는 일은 적절히 겹치고 적절히 다르다. 그래서 같은 사건에 대해 의견을 나누기도 하고, 다른 영역에서 벌어진 새로운 이야기들이 데이터화되어 쌓이기도 한다. 우리는 종종 흥분하여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한숨을 내쉬기도 하는데, 그것은 모두 우리가 우리의 일을 열렬히 사랑하는 증거라고 나는 믿고 있다.
일이 힘든 때는 언제인가. 자꾸만 회식을 유도하는 부장님? 잦은 야근? 꼬이고 꼬여버린 인간관계? 나의 경우, 일이 내 의지로 컨트롤할 수 없는 범위 밖으로 저만치 가 있을 때다. 분명 신이 나서 움직여야 하는데 어느새 누군가의 마리오네트 인형이 되어 움직여지고 있을 때. 그럴 때일수록 주변과 적당히 타협하면서도 일의 주도권을 잘 쥐고 있어야 한다고 알려준 것도 Y다. 중요한 것은 Y는 단 한 번도 이런 조언을 이야기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그는 언제나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일은 늘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그 넘실거리는 ‘부침(이라 쓰고 ‘빡침’이라 읽는다)’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체온을 나누고 안부를 물으며 생존해나갈 것이다. 여전히 오늘처럼 머리를 질끈 묶고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으면서. 술잔도 부딪혀가면서.
세광 양대창 신사역가로수길점
A.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1길 24 T. 02 543 2363
We Around Project
내가 오늘 분명히 먹은 것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점심 먹고 나오는 길에 저녁 메뉴를 고민하고, 저녁 식탁을 치우면서 내일 점심을 고민합니다. 바쁜 일상 중에도 마음에 선명히 남는 한끼의 식사가 있습니다. 음식을 앞에 두고 떠오르는 생각과 마음의 대화를 적으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