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이 어디든 내 마음대로 방향을 바꿨다. 구글맵을 보고 열심히 찾아간 카페에서도, 우연히 들어간 식당에서도, 늘 내 앞엔 1인분의 커피, 1인분의 식사가 놓였다. 그 테이블에 앉아 나는 나와 보낸 시간을 ‘일기’라는 이름으로 기록했다.
과도한 친화력이 불편하다. 어제 함께 귤을 먹자고 방문을 두드리던 옆방 남자. 그는 자신의 노크가 공포가 될 수 있다는 걸 모르겠지.
2016. 2. 29. 제주
바다 보다는 산, 대리석 보다는 나무, 하얀벽 보다는 회색벽, 카페모카 보다는 아메리카노, 케이준 샐러드 보다는 리코타치즈 샐러드, 온돌 바닥 보다는 침대, 어색한 여럿 보다는 외로운 혼자.
2016. 3. 1. 제주
비를 맞으며 한참을 걸었다. 카메라를 많이 꺼내지 못했다. 외국인이라서, 혹은 관광객이라서? 아무도 신경 쓸 필요가 없는데 나는 왜 아직도 ‘무언가’를 의식하는 걸까. 이게 그냥 나인 걸까.
2016. 6. 17. 시애틀
포틀랜드로 가는 기차 안이다. 손짓, 발짓을 동원한 짧은 영어로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다. 여행하고 있다. 역시 모르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게 더 부끄러운 일이다.
2016. 6. 20. 시애틀
오늘 꽤 많은 곳을 다녔다. 정말 여행자다운 여행. 그치만 이런 여행은 정말 나랑 맞지 않는다. 숨차고 초조한 것, 도장을 찍기 위해 뛰는 것. 누군가의 일상에, 나도 일상으로 만나고 싶다.
2016. 6. 20. 시애틀
집에 가는 길은 항상 편했는데, 낯선 곳에서 떠나고 돌아오는 것을 반복하다 보니, 떠나는 것보다 돌아오는 것이 훨씬 어려운 것 같다. 실제로 더 어려워. 떠나는 것과 돌아오는 것,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것.
2016. 6. 21. 시애틀
감각해야지만 감각할 수 있는 것들에 관해 생각한다. 흐릿했던 도로 위 차들의 불빛이 선명해지는 걸 바라보며, 아름다웠던 물에 비친 그림자를 바라보며. 사랑과 슬픔, 아픔은 어디까지가 나의 것일까. “어서-차라리-어두워버리기나 했으면 좋겠는데-벽촌의 여름-날은 지루해서 죽겠을 만치 길다.” 이상을 읽으며 영원히 알 수 없을 것도 생각한다.
2016. 11. 21. 도쿄
많이 걸었고, 많이 멈췄다. 길을 잃어서이기도 했고, 놀라움 때문이기도 했다.
2016. 11. 22. 도쿄
쓸모없음을 사고 싶다. 오로지 아름다움으로 기능하는 것들을 사보고 싶다. 기념 사진을 찍고 다시 상자에 담겨 서랍 깊숙이 넣어둘 것들을 갖고 싶다.
2016. 11. 23. 도쿄
카레 집을 찾으러 가는 길에 서양인 두 명이 내가 사진 찍은 시계탑을 찍었다. 다른 사람의 눈으로 관광객인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여행이란 그런 거겠지, 일상에 틈을 만들어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하는 것.
2016. 11. 23. 도쿄
음악을 한 곡도 듣지 못했다. 언제 바닥을 보일지 모르는 휴대폰 배터리가 문제였다. 맥북을 간이 충전기처럼 가방에 지고 다녔다. 그럼에도 추운 날씨에 제멋대로 꺼지는 휴대폰은 안심할 수 없었다. 음악이 없는 여행을 했다. 귀를 감싼 노래만이 따뜻했던 지난 겨울의 제주를 떠올리며, 그래서 이번 여행이 더 추운 것일까.
2016. 11. 24. 도쿄
혼자 떠나는 여행과 일기
여행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나에게 여행은 너무나 고단한 일이다.), 그럼에도 떠난다면 여전히, 역시 혼자다. 아직 덜 자란 내가 여행에서 가장 보고 싶고 궁금한 것은 ‘나’이기 때문이다. 뭔가 거창하게 들리는데, 사실 별거 없다. “너 지금 뭐 먹고 싶어?”, “오늘은 어디에 가고 싶니?” 그냥 끊임없이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현실은 나를 혼잣말하게 가만두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결국 내가 선명해진다. 알고 보니 나는 대로변 넓은 도로보다 골목길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때로는 무용하지만 아름다운 것을 갖고 싶어 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별다른 할 일이 없으니, 발견한 것을 일기로 기록한다. 평소에 잘 쓰지 않는 일기는 여행자에게 부여된 고단하지 않은 숙제일지도 모르고, 여기에 적힌 글들을 작년의 내가 기꺼이 해낸 숙제다. 사실 나는 일기를 모으는 사람이다. 마침 책꽂이에 《모스크바 일기》와 《애도일기》가 보인다. 나 같은 누군가에게 이 일기가 사소하고도 은밀한 즐거움이 되길, 그리고 누구든 혼자 떠나 일기를 써보길, ‘나’를 만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