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단둘이 여행을 떠나본 적 있나요?

이재용 가족

여행은 용기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일상에 쉼표를 누르는 것도, 생경한 길에 올라 오직 이 순간만을 살아보겠다는 것도. 지지보다 보호가 필요한 아이를 동반하려면 더 용감해야 하지 않을까. 낯선 사람들이 두려워 아빠 뒤에만 꼭 숨어 있거나, 호기심을 좇다 길을 헤맬 수도 있을 테니까. 스스로 낯선 환경으로 걸어가 긴 여행을 마친 아빠에게 물었다. 아내 없이 7개월을 세계 일주한 부녀의 용기에 대해서.

엄마 없이 떠나는 용기

딸과 둘만의 여행을 떠난 아빠. 놀라워요. 평소에도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많았나요?

저는 활동적인 사람이에요.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시고 사람들을 만나길 좋아하는 성향이죠. 하지만 부모가 되고 나서 자연스럽게 우선순위가 바뀌었어요. 제가 어찌할 수 없는 제 유전자를 가진 존재가 태어난 거잖아요. 지금까지의 모든 일은 정말 아니다 싶으면 돈을 주던가, 욕을 먹던가 하면 되돌릴 수 있었어요. 하지만 아이는 그렇지 않잖아요. 아이를 키우면서 고민이 많아지고 어깨가 무거워지는 건 당연한 일이죠. 저희는 맞벌이 가정인데요. 아내가 육아휴직 3개월 이후 복직을 했고, 아이는 백일 때부터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했어요. 아내가 아침 일찍 출근하면 제가 아이 깨워서 어린이집에 보냈고, 퇴근하면서 아이를 데리고 오곤 했어요.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이 많지 않은 편이었네요.

그렇죠. 아이가 커 가는데 저희 부부는 회사 일로 바빴어요. 집에 일찍 오면 일곱 시, 늦으면 여덟 시가 되어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곤 했어요. 어린이집과 학원에서 아이를 잘 보살피고 있고 우리는 잠시 저녁에 애를 봐주는 식이었어요. 돈 좀 주고 육아라는 부모의 역할을 어린이집이나 학원에 떠넘기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지만, 별다른 방법은 없었죠. 그러다 아이가 다섯 살 때 괌으로 여행을 갔어요. 아이가 가슴팍 아래까지는 수영을 잘했는데 발이 닿지 않는 바다를 보더니 구명조끼를 입어도 무서워서 못 들어가더라고요. 제가 안아주고 잡아주고 오리발을 사서 채워주면서 조금씩 수영이 늘었어요. 돌아오기 전날엔 혼자 구명조끼 없이 4킬로미터의 거리를 수영하게 됐어요. 그때 느꼈어요. ‘아 내가 정말 많은 걸 놓치고 있구나.’ 제가 못 보는 순간에도 아이는 날마다 성장하고 있었겠죠. 옆에서 도와주며 아이의 성장을 보는 거야말로 부모로서 가장 행복한 일이 아닐까 깨달았어요.

 

성장을 가까이 지켜보는 다른 방법도 많았을 텐데 왜 여행을 떠났나요? 

아내가 임신하면서부터 우리가 아이를 어떻게 키우면 좋을까 얘기를 많이 했어요. 그때는 막연히 경험이 많은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아이가 점점 나이를 먹으니까 20~30년 후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어떤 사회가 되어 있을까에 대한 고민도 함께 들더라고요. 좀 구체적으로 생각을 정리해봤어요. 먼저 현실에 잘 적응하고 잘 사는 게 가장 중요하겠죠. 다음으로 국제 사회와 협력할 수 있는 능력, 언어를 잘하는 것뿐만 아니라 문화를 잘 이해할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마지막으로 온라인 세상에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 중요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 모든 걸 해소할 수 있는 게 여행이겠더라고요.

처음부터 7개월을 계획한 거예요?

그건 아니에요. 좀더 오랜 시간을 아이와 보내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육아휴직이란 제도를 써보기로 했죠. 부모가 각 1년씩 총 2년까지 쓸 수 있었어요. 아내는 사기업을 다니다 보니 휴직이 쉽지 않았고, 저는 큰 문제가 없는 상황이었어요. 육아휴직이 가능하다면 세계를 한 바퀴 돌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가 엄마 없이 아이를 오롯이 돌볼 수 있을까에 대한 확신이 없었어요. 반 정도 확률로 한 달 안에 돌아오지 않을까 생각했죠. 내년에 학교를 가야 하니까 최대 7개월이 될 거라고 희망을 품긴 했지만요.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많을 거라 여겼기에 첫 나라를 정한 뒤 첫 숙소만 예약하고 출발했어요.

 

서윤이가 엄마 없이 여행을 가겠다고 하던가요?

처음 서윤이한테 세계여행 그림책을 한 권 사줬어요. “여기를 가면 큰 산이 있대. 낙타도 탈 수 있네. 눈 덮인 산도 있고.” 하면서요. 스스로 가보고 싶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어요. 엄마 없이 가야 하니까 스스로 원해야 할 거 같았어요. 아내와 가족, 회사의 동의도 얻어야 했을 텐데요.아내는 대학 시절 1년 동안 호주에 워킹홀리데이로 머물던 기억을 아주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어요. 서윤이도 이런 경험을 어릴 적부터 하면 삶에 큰 도움이 된다는 데 공감해줬어요. 서윤이 외할머니가 걱정을 많이 하셨지만 설마 7개월 있을 거라곤 생각 못 하셨을 거예요(웃음). 회사에는 함께 일하는 팀과 본부에 일 년 전부터 계획에 대해 말하고 업무를 조정해 와서 큰 무리 없이 허락해줬어요. 물론 몇 분에게 ‘세상 좋아졌다. 아빠가 애 키우냐.’라는 가시 있는 말을 들어야 했지만요.

 

첫 여행지로 안나푸르나를 선택했어요. 아이와 트레킹을 하셨던데….

변수가 많은데 동쪽으로 돌면 미국부터 가게 되잖아요. 그럼 돌아오기에 너무 머니까 서쪽으로 돌자고 생각했죠. 그런데 동남아 지역은 짧은 휴가로도 갈 수 있는 곳이니까 조금은 더 멀면서 휴가로 갈 수 없는 곳을 가보자 싶었어요. 너무 멀지 않은 아시아 지역에 한번 가보고 더 지내볼지를 결정하려고 했죠. 히말라야가 세계의 지붕이라고 하잖아요. 거기서 시작하는 것도 큰 의미가 있을 거 같았고요. 또 이 여행을 제가 잘 해낼 수 있을지, 아이가 자기 배낭을 메고 잘 걸어 다닐 수 있을지 체력도 걱정이 됐어요. 첫 여행지인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잘 해낸다면 우리의 긴 여행에 희망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 거죠. 네팔은 엄마도 휴가를 내서 같이 갈 수 있었고요.

 

서윤이는 많이 걷고 거머리도 만났지만, 이런 일쯤은 별거 아니라는 듯 태연하던데요.

안나푸르나에 가기로 하고, 떠나기 한 달 전부터 매일 달리기를 했어요. 저녁 먹고 집에서 하천 5킬로미터 정도를 달렸죠. 그 덕분인지 생각보다 너무 잘했어요. 안나푸르나 정상까지 올라간 건 아니고 푼힐POON HILL 전망대라고, 해발 3200미터까지 올라간 건데요.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면 하루에 고도를 1000미터 이상 올리지 않아요. 고산병이 올 수 있어서 가이드가 그 이상을 가지 않는 게 좋다고 하죠. 거기만 올라가도 공기도 부족하고 많이 힘들거든요. 하루에 네 시간을 걷는 일정이었어요. 아내와 저는 날이 갈수록 지쳐 가는데 서윤이는 쌩쌩해지더라고요. 2~3일째부터는 비가 많이 왔어요. 산속을 걷다 보니 거머리도 많고 추위로 조금 떨었죠. 그래도 아주 잘 해줬어요. 여기서 저는 우리가 더 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봤어요.

 

둘만의 여행을 가기로 했지만, 아빠도 두려웠겠죠.

네팔에서 엄마가 한국으로 돌아가고 저희는 카트만두에 며칠 더 머물렀어요. 이제야 둘이 남은 거죠. 엄마가 얘기한 몇 가지 당부들과 함께 제가 매일 잊지 않고 할 것들에 대해 생각을 정리했어요. ‘매일 사랑한다 말해주기. 자기 전 아이에게 하루 있었던 일에 질문할 시간을 주기. 좋은 질문을 하면 많이 칭찬해주기. 아이를 위한 일에 부끄러워하지 말기. 위험한 상황이 생겨도 꼭 아이를 보호하기. 무슨 일이 생기든 절대 나 혼자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기.’

 

유튜브를 보고 머리 땋는 법도 연습하셨다고요(웃음).

맞아요. 아, 정말 어려웠어요(웃음). 고무줄도 꼭 가지고 다녀야 하고요. 외출할 때 물티슈와 속옷, 원피스를 여분으로 챙겨 다녀야 해요.

 

실전 여행 육아네요(웃음). 그런데 네팔에서 서윤이가 많이 아팠다고요.

엄마가 한국으로 가고 첫날은 엄마가 없으니까 오히려 더 어른스럽게 굴더라고요. 그런데 카트만두가 공기가 정말 안 좋거든요. 신경 쓴다고 음식도 끓여 먹이고 했는데 이틀째부터 계속 설사를 했어요. 밤에 아이가 잠이 들어서 저도 이어폰 꽂고 컴퓨터를 하고 있는데, 나중에 봤더니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체온계가 없어 열이 몇도인지 모르겠는데, 엄청 뜨거웠어요. 야간 진료하는 데도 없어서 해열제를 먹이고 재웠어요. 다음 날 병원에 가보고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했어요. 아픈 아이를 보니 참 미안하더라고요. ‘아빠 욕심 때문에 세계여행은커녕 일주일 있다가 돌아가는구나. 엄마 떠날 때 우리도 다른 데로 떠날걸.’ 하고 자책도 했고요. 공기 때문이라는 증거는 없는데, 아빠로서 나름 원인을 찾는 거죠. 그런데 아침에 열이 뚝 떨어지더라고요. 컨디션도 좋아지고요. 좀 나으니까 또 생각이 바뀐 거죠(웃음). ‘조금만 더 가도 될까?’ 아이와 함께 다음 여행지를 찾으면서….

친구가 필요해

트레킹을 멋지게 해내는 서윤이를 보고 너무 어른스러운 것 같아 마음이 짠했어요. 어른인 우리는 이미 여행의 가치와 즐거움을 알죠. 산을 오르면서 아이가 보면 좋을 것도요. 하지만 아이들은 그만큼의 가치를 모르잖아요. 부모가 좋을 거라고 해서, 약간의 흥미를 안고 떠나는 걸 수도 있을 텐데요. 

맞아요. 그걸 우연히 들른 조지아 트빌리시의 놀이터에서 깨달았어요. 박물관이 문을 닫아서 어쩔 수 없이 놀이터에 갔어요. 놀이터에 아빠랑 가면 재미없잖아요. 시소를 타도 무게가 안 맞고요. 힘들게 놀고 있는데 한 아이가 서윤이에게 다가와서 자기랑 같이 타자고 하더라고요. 남아프리카에서 와서 영어를 쓰는 아이였는데 둘이 재미있게 놀다가 헤어졌어요. 그런데 서윤이가 내일 또 만나기로 했다는 거예요. 서윤이가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약속을 했을까 싶었어요. 반신반의하면서 다음 날 가봤는데 그 친구가 정말 왔더라고요. 그 전까지 외국 사람들을 만나면 맨날 아빠 뒤에 숨어 있었는데, 신나서 “아빠, 이거는 영어로 어떻게 얘기해야 해?”라고 묻기 시작했어요. 친구와 한마디라도 해보려고요. 주노를 만나 서윤이는 너무 기뻐했고, 저는 그동안의 여행에 반성을 했어요. ‘서윤이가 원하는 것보다 제가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줬구나.’ 싶었어요. 

 

부모가 모든 걸 채워줄 순 없는 거네요.

친구를 사귀면서 아이가 너무 많이 바뀌었어요. 며칠 뒤 둘이 또 만나서 자연사박물관에 같이 갔는데, 주노가 서윤이를 데리고 다니면서 설명해주더라고요. 아빠랑 박물관 가면 시큰둥했거든요. 근데 너무 재미있게 즐기는 거예요. 말도 잘 안 통하는데 정말 잘 놀길래, 놀 때는 아빠보다 친구가 필요하다는 걸 또 한 번 깨달았죠. 그때부터 여행의 방향을 바꿨어요. 동네 놀이터를 찾고, 거기서 마음 맞는 친구를 만나면 그 친구와 며칠 만나며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식으로요.

여행 중에 관계를 쌓긴 쉽지 않잖아요. 어떻게 만남을 이어갔어요?

단기 여행에서는 힘들겠지만 저는 놀이터가 답이라고 생각해요. 보통 이 또래 아이들이 놀이터에 가면 엄마들이 옆에 있어요. 근데 좀 멋쩍어요. 모르는 아주머니에게 가서 “내일도 같이 노실래요?”라고 말하는 게(웃음). 그때 제 원칙을 다시 새기면서(아이를 위하는 일에 부끄러워 하지 말자) 아주머니한테 내일 뭐 하시는지 물어보고 같이 놀자고 하고, 시내 구경도 가고 박물관도 함께 갔어요. 그 이후부터 숙소를 정할 때 놀이터와 가까운 곳에 방을 잡고, 아이가 있거나 애완동물을 키우는 에어비앤비를 골랐어요. 런던에서 뮤지컬 볼 땐 우연히 옆자리 앉은 노르웨이 여행자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노르웨이에서 보자는 약속도 했어요. 약속을 지키려고 간 오슬로에서 언니를 만나 함께 스케이팅도 탔고요.

 

스페인에서는 한 달 살기를 했어요. 이유가 있었나요?

아내가 추석에 잠깐 나와서 프라하에서 만났어요. 네팔에서 헤어질 때 느낀 게 누군가는 남고 누군가는 떠난다는 게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동시에 떠나기로 했어요. 아내가 비행기를 타는 같은 시간에 스페인 말라가로 가는 비행기가 있더라고요. 3개월 넘어가면서 여행도 좀 권태기가 오더라고요. 매일같이 무거운 짐을 둘러메고 떠나는 것도 좀 지쳤어요. 안정을 찾고 좀 눌러살고 싶었어요. 마침 친구를 만나러 말라가에 왔는데 날씨가 너무 좋고 물가도 싸더라고요. 친구도 스페인 중 말라가에서 한 달 살기를 추천해줬어요. 그나마 영국 사람들이 많이 살다 보니까 영어를 잘하고, 살기 좋은 동네라고요. 지중해에선 10월까지 수영할 수 있으니까 서윤이가 좋아하는 수영도 마음껏 할 수 있을 거 같아 좋았고요.

 

생활인으로 살아보니 여행자와 어떤 차이가 있던가요? 

육아가 정말 어려웠어요. 떠돌아다니는 것보다 더요(웃음). 매일 여행을 하면 오늘은 어디 갈까 하면서 나가고, 아이도 관심사가 계속 생겨요. “저건 왜 저래?” 물으면 거기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좋은 곳을 보고 먹고 싶은 걸 먹으러 가면서 새로운 경험들이 생기죠. 근데 한곳에 살다 보니까 새로운 호기심을 자극해줄 만한 것도 없고 물놀이도 두세 시간이면 끝나죠. 이제 아이와 트러블이 생기더라고요. “하지 마!”라는 말을 하기 시작한 거죠. 애가 계속 아빠를 찾아요. 아빠 없으면 안 된다고, 하루에도 수천 번 불러요. 계속 놀아주다 보니 저도 힘들었어요. 그래서 넷플릭스를 보여줬는데 켜주면서 제가 티브이나 보여주려고 여기 왔나 싶더라고요. 제 나름대로 한국에서 육아를 많이 하고 잘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엄마처럼은 안 되더라고요. 둘이서만 하루 종일 붙어 있는 건 정말 쉽지 않았어요.

 

맞대고 살아보는 본격적인 육아가 시작된 거네요. 

처음엔 아빠만 부르는 게 힘들었는데, 제가 할 일을 같이 하면서 방법을 찾아나갔어요. 서윤이의 포지션을 점점 넓혀주면서요. 요리를 하면, 처음엔 밀가루 반죽, 도우 만드는 것만 시키다가 나중에는 채소 칼질까지 시켰어요. 팬케이크, 달걀프라이, 야채샐러드 같은 건 이제 제법 만들어요. 그리고 친구를 사귈 겸 영어 학원도 다녔어요. 영어는 좀 덜 가르쳐줘도 뛰어노는 곳으로요. 학원 보내니까 저한테도 일주일에 3일, 한 시간 여유가 생기더라고요. 아빠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 돌아간 것 같아 꿈만 같았어요(웃음).

 

아빠와 서윤이, 모두를 위해 하루 빨리 친구를 만들어야 했겠네요.

그즈음 숙소의 수영장에서 영어를 쓰는 딸 또래의 아이를 발견했어요. 이 집이랑 친해져야겠다고 생각했죠(웃음). 어떻게 하면 자주 보면서 놀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아이들 엄마에게 부탁했어요. “제가 영어 발음이 안 좋아요. 아주머니가 책을 좀 읽어주시면 좋겠어요.”라고요. 발음 과외를 부탁했는데 처음에는 굳이 하고 싶지 않은 눈치더라고요. 그때 저희가 패들보드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 집 애들을 태워주면서 같이 놀곤 했거든요. 과외비 대신 패들보드 드리고 간다고 하니까 아주머니도 좋아하셔서 계약이 성사되었어요(웃음). 엘리, 소피라는 또래 친구들이었는데, 같이 그림을 그리거나 수영하며 잘 놀았어요. 거기서 놀면서 밥 얻어먹고, 저도 간식 사다 주고 그랬죠. 서윤이가 말이 트이니까 수다쟁이가 되었어요. 친구 사귀면서 경험하는 게 저랑 여행하는 것보다 더 크더라고요.

 

첫 이도 뽑았던데요. 여행 내내 많이 자랐죠?

서윤이가 일곱 살 때까지 엄마는 모든 걸 도와주었어요. 밥 먹기, 씻기, 옷 입기 등등. 아빠와 둘이 여행을 시작하면서 엄마 같은 자상한 손길은 없었죠. 혼자 샤워하고 혼자 밥 먹고 혼자 옷을 골라 입었어요. 그러면서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점점 늘어났어요. 아이는 자신감 있고 자존감 강한 아이로 성장하고 있어요. 아빠에 대한 애정도 커졌고요. 아내는 더 아빠 닮아서 왔다고 해요(웃음). 뜨거운 사막에서 하얀 설원의 나라로, 기독교에서 이슬람으로,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아프리카로 아메리카로 우리의 여행은 가끔 계절을 거스르고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을 만났어요. 아이는 지구가 어떻게 생겼고 우리가 어디로 여행하는지, 지리에 관심이 많아졌어요. 이 나라 사람들은 뭘 먹는지, 왜 종교가 다른지, 세상 돌아가는 일에 호기심도 커졌고요. 

 

흐뭇하네요. 호기심이 꿈으로 이어지기도 하잖아요.

맞아요. 좀더 현실적인 꿈을 꾸더라고요. 한국에 있을 땐 ‘엘사공주’나 ‘인어공주’가 되고 싶어 했거든요. 물론 이 나이에 꾸는 꿈이 이루어질 거라 생각지는 않지만, 뭔가 새로운 꿈을 찾는 딸의 모습을 보는 게 참 행복했어요. 런던에서 뮤지컬 <알라딘>을 보고 뮤지컬 배우, 비엔나에서 오페라의 공연을 접하고는 발레리나를 꿈꿨어요. 스페인에 한 달 살면서는 요리사가 되겠다고 했죠. 노르웨이 아이스링크에서 매일 스케이팅을 할 때는 스케이트 선수도 하고 싶다고 했고요. 뉴욕에 있을 땐 사이언스 뮤지엄에 매일 갔는데요, 바느질과 공예 놀이를 하며 옷 만드는 사람이 되면 어떨까, 하는 꿈도 꾸더라고요. 여행을 마치면서는 여행 스크랩북을 만들며 책을 쓰는 사람이 되겠다는 목표도 생겼고요. 여행하며 유튜브 동영상을 찍고 개인방송인의 꿈도 키우고 있어요.

 

아빠에게는 어떤 경험이 쌓였나요? 

저는 아이에 대한 공감 능력이 많이 늘었어요. 한 달 살기 할 때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지 막막했는데, 생활 속에서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것을 찾은 게 큰 도움이 되었어요. 지금도 확신할 수 있는 건 죽을 때까지 가장 잘한 일이 이 여행일 거라는 거예요. 어떤 사람들은 그랬어요. 직장도 다녀야 하고 할 일도 많은데 육아휴직까지 할 필요가 있냐고요. 저는 그래요. 부모가 누리는 가장 큰 기쁨은 아이가 커가는 과정을 보는 거라고요. 일곱 살은 기억도 못 하고 돈만 버리고 오는 거라는 말도 들었죠. 하지만 저는 조급했어요. 친구들한테 듣기로는 딸아이들은 크면 아빠랑 안 놀아준다고 하더라고요. 좋은 타이밍이었다고 생각해요. 어쨌거나 지금까지의 경험이 조금은 아빠랑 친한 딸이 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바람이 있어요. 

아이와 둘만의 여행이다 보니 현지인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도 있었을 텐데요. 

기본적으로 아이에게 친절한 나라들이 있어요. 영국의 지하철 개찰구에서 아이 요금을 내고 제 요금을 지불하려니 교통카드에 요금이 부족해서 막혔어요. 아이에게 꼭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고 불과 10미터 떨어진 교통카드 충전기에 다녀왔어요. 약 4~5분 정도의 시간이었는데, 어떤 영국인 아주머니와 역 직원 두 명이 아이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기다려 주고 있었어요. 여행하다 보면 아무리 주의를 기울인다 해도 제가 아이를 돌보지 못하는 순간이 와요. 그때 아이를 보살펴주는 눈이 있다는 건 아주 고마운 일이었죠. 에어비앤비 숙소 주인들도 기억에 남아요. 조지아 호스트는 택시에 놓고 간 휴대폰을 택시 회사까지 가서 찾아주셨거든요. 터키의 호스트는 요리사였는데, 맛있는 음식도 해주시고, 아이와 보드게임도 하며 잘 놀아주셨어요. 사하라에서 만난 장기 여행자들도 기억나고요.

 

서윤이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친구겠고요. 

저와 서윤이 모두 앞에서 얘기한 주노라는 아이가 무척 기억에 남아요. 저는 서윤이가 그 아이처럼 자랐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했거든요. 스스럼없이 다가가 인사하고 먼저 놀자고 하는, 주변 사람이 알아듣지 못해도 열심히 같이 뛰어놀던 친구였어요. 여행이 5개월이 넘어갈 무렵 노르웨이에 갔어요. 겨울의 아이스링크에서 놀고 있는데 주변에 아이들이 오자 서윤이가 다가가서 챙겨주는데 소름이 돋았어요. 딱 제가 처음 본 주노의 모습인 거예요. 여행을 하면서 더 긍정적으로 밝아진 점도 놀라웠고요.

 

뿌듯했을 거 같아요. 

그러면서 좀 슬펐어요. 그동안 여행이 쌓여가면서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알고 있는 듯했거든요. 너무 많은 만남과 헤어짐을 겪었기 때문에 내가 저 애와 놀려면 지금 내가 더 다가가야 하는 거죠. 어떤 관계를 맺기 위해 기다릴 시간이 없다는 걸 깨달은 거 같아요. 

 

아이와 머무르기 가장 좋았던 곳을 꼽는다면요?

여행지는 나와 맞는 여행지와 맞지 않는 여행지가 있지, 좋은 여행지와 나쁜 여행지가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계절이 좋지 않았거나 사람에 대한 기억이 나쁘면 나와 맞지 않은 여행지가 되는 거죠. 특히 누구를 만나느냐가 아주 중요한 거 같아요. 그래서 가장 인상에 남는 곳은 한 달 살기 한 스페인 미야스예요. 심리적인 안정감으로는 사하라가 기억에 남아요. 일주일 정도 있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평온한 게 너무 좋았어요.

 

서윤이가 가장 좋아한 나라는 어디였어요?

아무래도 오래 머문 스페인 얘기를 많이 하고, 안나푸르나와 사하라 사막, 캐나다에서 스키 타던 얘기도 자주 해요.돌아와 바로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텐데, 어려움은 없었나요?서윤이가 입학한 학교는 같은 유치원 친구들이 그대로 초등학교까지 올라오더라고요. 서윤이는 직장 어린이집을 다녀서 아는 친구 없이 입학했어요. 어린이집 친구들은 학교에 가기 싫어한다고 하더라고요. 서윤이도 얘기 안 하고 있는 건가 싶어서 물어봤더니, “아빠 괜찮아. 다 한국말 하는 데 뭐~.”라고 하더라고요(웃음). ‘아… 그렇구나!’ 서윤이의 이 답이 우리 여행을 설명해주는 명언이라고 생각해요. 서윤이는 여행하느라 한글을 못 배우고 학교에 갔어요. 교과서가 ‘ㄱ’ 단어를 쓰고 뒤에 그걸로 시작된 단어의 그림을 그리게 되어 있어요. ‘ㄷ’ 페이지에 도로를 그리고 그림을 그렸는데 산 정상에 눈이 쌓였더라고요. 여기 어디냐고 물었더니 ‘안도라 산’이래요. 피레네 산맥이죠. 다리를 쓰고 브루클린 브릿지도 그렸어요. ‘우리가 건넌 미국의 그 다리’라면서요.

 

여행이 끝날 무렵 아쉬움은 없었나요?

크게 아쉬운 부분은 없었어요. 개인적으로 뉴욕은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좀 아쉽긴 해요. 그 돈으로는 유럽을 가는 게 안전하고 좋을 거 같아요. 그리고 체력을 좀더 키워 갈걸 싶었어요. 실제적으로 힘을 쓸 수 있는 권투 같은 것도 좋을 거예요. 소매치기도 많으니까 좀더 건장하면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이도 좀더 당당하게 지켜줄 수 있고요. 그 무엇보다 한국에 돌아오는 게 가장 아쉬웠네요(웃음).

 

저는 배낭이 너무 무거워 보여서 안타까웠어요.

제가 카메라 장비 욕심이 좀 많아요(웃음). 그래도 아이의 손을 꼭 잡고 다니려고 트렁크를 끌지 않고 배낭을 택했어요. 20킬로그램을 정확하게 맞췄고 아이 가방은 아이가 들게 했어요. 이동을 하다 보니 가방이 빵빵해지잖아요. 그런데 아이는 사고 싶은 게 생겨요. “아빠 이거 사고 싶어.”라고 말하면 “사줄게. 대신 네가 들어.”라고 말해야 했어요. 그러다 보니 정말 갖고 싶은 것만 가지게 되었어요. 좋은 습관을 얻었죠.

 

또 가실 거 같은데요?

아직 못 가본 데가 있죠(웃음). 서윤이가 아프리카에 가보고 싶어 했는데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딘가를 꿈꾸고는 있어요. 여운을 남기는 여행이 다음 여행을 꿈꾸게 하잖아요. 다른 계절의 여기는 어떨까 궁금하기도 하고요. 서윤이는 어제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아빠 내가 빨래 해줄게. 아빠는 글 써. 책 내고 돈 벌어서 우리 또 여행 가자.”

아이와 여행을 준비할 때 참고하면 좋을 것들

기간

여행에 지치지 않고 재미있게 놀기에는 3~4개월 정도가 적당하다. 엄마랑 6~7개월 동안 떨어지면 아내와 아이 모두 힘들어할 수 있다.

 

나라

선택 부모의 성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안전, 위생, 즐길 거리, 도시 경관, 자연 경관, 친절, 물가 등을 고려했을 때 영국(런던), 노르웨이(오슬로), 오스트리아(비엔나), 스페인(마르베야, 말라가), 조지아(바투미), 안도라, 캐나다(캘거리), 미국(하와이), 스페인(마드리드), 포르투갈(리스본, 포르토)를 추천한다.

 

비용

총 3,300~3,400만 원 정도 비용이 들었다. 2,000만 원은 적금을 깼고, 육아휴직 급여 1,000만 원 정도를 받아서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외의 준비사항들

· 현지 재료로 요리할 수 있는 실력

· 딸이라면 머리 묶고 땋는 법 배워놓기(유튜브), 고무줄 늘 가지고 다니기, 여벌 옷, 속옷, 물티슈 챙겨 다니기

· 구연동화 연습해가기(책은 무거우니 한두 권을 외워서 들려주면 좋다)

· 현지인 가족과 지속적으로 만날 수 있는 환경 만들기

· 아이 사진 찍을 때 좋아하는 음악 틀어주기

· 전쟁사, 커피의 기원 등 부모와 아이의 관심사에 맞는 세계사 알아보기

· 체력 갖추기

에디터 김현지

사진 이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