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란 쓸모에서 살아가요 함께

손수현 — 배우

수현의 목소리는 다소 낮고 단정하다. 자분자분 이야기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그사이에 깃든 배려가 들린다. 내 목소리가 무른 마음을 긁진 않을지, 내 이야기가 누군가를 울타리 바깥에 두진 않을지. 천천한 음성은 어쩌면 깊은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사려 깊은 수현의 이야기를 담은 《쓸데없는 짓이 어디 있나요》는 참 좋았고, 그와 대화하는 것은 더욱 좋았다. 

다 의미 있다고 여기려고 하지만, 문득

무의미한 것 같다는 생각이 치고 들어올 때가 있어요.

허무함, 무력감… 그런 걸 견디며 의미를 찾아 나가는 게,

그렇게 살아가는 게 해야 할 일이란 생각을 유독 많이 했어요.

집 안 곳곳에 볼거리가 정말 많아요. 이 고양이 엽서 너무 귀엽네요(웃음). 초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 그 엽서 저도 참 좋아해요. 온 세상 고양이가 다 그려진 것 같은 엽서죠. 집에서 인터뷰하는 게 처음이라 기분이 묘하네요. 여기서 사진을 찍다니(웃음). 만나서 반가워요. 연기하는 손수현입니다. 

 

많은 걸 하고 있는데 “연기하는 손수현”이라고 소개하는군요. 

다른 일들도 좋아하고 재미있게 하고 있지만, 연기를 가장 오래 하고 싶고, 또 잘하고 싶어요. 그래서 제 정체성은 연기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연기하게  된 사연은 꽤 긴데, 여러 계기로 자연스럽게 시작한 거여서 처음엔 연기하고 있다는 인식도 크게 없었어요. 그러다 처음 연기가 즐겁다고 느낀 건… 신승은 감독님과 단편 영화 작업을 하면서예요. 

 

연기가 즐겁다는 건 어떤 기분이에요? 

작품은 보통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고 캐릭터를 만들어요. 배우는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감독이 만든 캐릭터를 자기만의 해석으로 구성해 나가죠. 신승은 감독님과 작업할 때 캐릭터를 바라보는 시선을 맞춰가는 과정이 특히 즐겁다고 느꼈어요. 제가 생각한 부분이 감독님 생각과 맞을 땐 통했다는 느낌이 들고, 다를 땐 차이를 조율해 나가는 게 좋았죠.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왜 이 인물이 이런 말을 하고, 이런 행동을 하는지를 서로 이해시키는 작업인데요. 제가 감독님을 설득하고, 감독님께 설득당하면서 인물이 구체화되는 과정이 즐겁더라고요. 

 

감독과 배우가 촘촘하게 캐릭터를 구성해 가는 거군요. 

그렇죠. 시나리오 안에서 캐릭터의 일생을 모두 보여줄 수는 없으니까 보통 어떤 사건들을 통해 인물의 생애나 성격을 보여주잖아요. 시나리오에 다 표현되지 않은 수많은 부분을 상상하고 채워 나가는 게 연기인 것 같아요. 한 인물의 세계를 더 잘 전달하기 위해 고민하는 거죠. 

 

직접 시나리오를 쓰기도 하는데, 그건 인물을 넘어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거겠네요. 

연기할 땐 이 캐릭터가 왜 이렇게 생각하고 움직이는지를 집중적으로 생각한다면 시나리오를 쓸 땐 이 이야기가 말이 되게끔 설득력을 갖추는 데 좀더 집중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세부적인 장치들이 필요하죠. 연출가로서의 저는 한참 부족한 것 같아요(웃음). 경험이 얼마 없는 데다가 자주 주춤거리거든요. 정말 쓰고 싶은 이야기가 생길 때도 있는데, 시나리오로 옮기려고 할 때마다 ‘이거 괜찮나?’ 하는 의문이 들어요. 

 

연기할 땐 어때요? 

음… 현장에 가기 전엔 캐릭터의 성격과 행동, 습관 같은 걸 나름대로 해석하고 확신이 서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데요. 현장에서 그걸 어떻게 표현하는지, 어떻게 표현되는지가 관건인 것 같아요. 제 연기가 카메라에 그대로 잡히니까 객관적으로 보게 되는데, 제가 상상한 모습과 같을 때도 있고 다를 때도 있거든요. 그러니까 항상 확신이 선다고 하긴 어려운 것 같아요. 사실 늘 후회하는 편에 가까워요. ‘더 잘할 수 있는데…. 한 번만 더 해보고 싶다.’ 하면서요. 그래도 계속해 나갈 수 있는 건 제가 신뢰하는 감독님이 “오케이!”를 외쳐주기 때문이에요. 그 목소리를 믿을 때 다음 신으로 넘어갈 수 있죠.

맡은 인물을 어떻게 표현하느냐도 장르에 따라 다를 것 같아요. 수현 씨가 대중적으로 이름을 알린 건 대성의 뮤직비디오일 텐데요. 뮤직비디오랑 영화는 대사 유무도 그렇고 여러모로 차이가 있을 것 같아요. 

뮤직비디오도 어떻게 찍느냐에 따라 다를 거예요. 대사 없이 이미지로만 전개되는 것도 있고, 서사가 있는 뮤직비디오도 있으니까요. 사실 저는 어떤 장르든 이미지적으로 연기하는 게 부담이 덜해요. 공포 영화를 볼 때 음소거를 하면 무섭지 않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만큼 사운드가 주는 힘이 엄청 크다는 이야기일 텐데요. 배우의 음성도 마찬가지예요. 이미지로만 전달하는 것과 음성으로 연기하는 건 무게감이 다르거든요. 이를테면, 가끔 현장 사운드를 사용하지 못하게 될 때 후시 녹음이라고 목소리만 따로 녹음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럴 때 같은 대사여도 어떤 뉘앙스로 말하느냐에 따라 다른 감정이 느껴지게 돼요. 그 의미도 다르게 다가가고요. 음성 언어는 에너지가 크고 너무 직접적이어서 조심스러워요. 뉘앙스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니까 고민이 더 많아지죠. 

 

말투나 말씨 하나까지 체크해야 해서 좀더 복잡하다는 거군요. 캐릭터를 연기하는 건 수현 씨지만, 그 캐릭터를 만든 사람은 대개 감독이니까 좀더 생각이 많아질 것 같아요. 

맞아요. 그래서 저는 만드는 사람들이 얼마나 서로를 믿느냐에 따라 작품의 성패가 좌우된다고 생각해요. 배우가 감독을 믿지 못하면 자기가 연기하는 캐릭터도 믿지 못하게 돼요. 감독과 배우가 캐릭터를 다르게 해석할 때도 그렇고요. 그런 상황에서 제가 감독님을 설득하지 못하거나 감독님 생각에 동의하지 못한다면 결국 확신이 없는 상태로 카메라 앞에 서게 돼요. 저한테 그건 정말 최악의 상황이에요. 신뢰라는 건 감독님뿐만 아니라 현장에 있는 모든 스태프에 해당하는 이야기일 거예요. 신뢰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으니까요. ‘저기 왜 저런 소품을 갖다 놨지?’부터 ‘나는 왜 이런 옷을 입고 있지?’까지, 모든 게 엉키게 될 거예요. 

 

캐릭터를 믿는다는 건 어떤 느낌이에요? 

연기하기 전에 감독님과 충분히 대화를 나누는데도 현장에서 의견이 틀어지는 경우가 있어요. 예를 들어, 제 해석으로는 이 캐릭터가 이번 신에서 절대 화를 낼 성격이 아니거든요. 근데 감독님은 지금이 화낼 타이밍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이럴 때 제가 감독님을 설득하지 못하면 결국 화내는 연기를 해야만 해요. 캐릭터에 대한 감독님 해석을 납득하지 못한 채로요. 그런 연기는 불안할 수밖에 없어요. 

 

어… 만일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앞선 연기까지 다 흔들릴 것 같아요. 

맞아요. 하나씩 짚어보게 되죠. ‘이 장면에서 화낼 인물이라면 이전 장면에서 그런 행동을 안 했을 것 같은데.’ 하면서요. 감독님이 오케이 했다는 걸 떠올리며 계속 연기해 나가려고 하지만 집중이 잘 안 돼요. 이게 맞는 건지 스스로 재차 질문하게 돼요. 

 

제가 생각해 온 것보다 훨씬 더 큰 문제네요. 작품 전체가 뒤집히거나 앞뒤가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엄청 그렇죠. 제가 한 신에서만 연기를 잘 못해도 영화 전반이 흔들릴 수 있어요. 반대로 어느 한 신에서 굉장히 좋은 연기를 한다면 그 한 장면만으로도 영화가 탄탄해질 수도 있고요. 신과 신도 그렇지만, 사람과 사람, 캐릭터와 전개 모두가 섬세하게 연결돼 있는 거죠. 

 

그런 의미에선 내가 만든 캐릭터를 직접 연기하는 게 가장 편할 수도 있겠어요. 

맞아요. 제가 책임지면 되는 데다가 제가 제일 잘 아니까. 근데, 두 번 정도 그런 경험을 해봤는데, 너무 어려워요. 절대 쉽지 않아요. 여유와 자금이 충분히 보장된다면 어찌어찌해 볼 텐데, 그럴 만한 상황이 되지 않는 이상 정말 힘든 일이더라고요. 다시는 하지 않겠다 다짐할 정도였어요.

<프리랜서>(2020)가 그런 작품이었지요? 

맞아요. <선풍기를 고치는 방법>(2020)도 그랬는데, 제 마음대로 되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지난 6월에 첫 단독 에세이 《쓸데없는 짓이 어디 있나요》를 출간했어요. “취미가 뭐예요?”라는 물음에 “그런 질문을 요즘 누가 하냐” 싶었다길래 묻고 싶었어요. 취미가 뭐예요(웃음)? 

그냥, 책 읽고, 영화 봐요(웃음). 아, 요즘 새로운 취미가 생겼어요. 풋살. 저는 취미라는 게 쉴 때, 스트레스를 풀고 싶을 때 하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평생 운동을 안 좋아한다고 믿어온 제가 운동을 취미로 할 거라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요. <골 때리는 그녀들>을 보면서 풋살을 해보고 싶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안 그래도 요즘 여성들이 그 프로그램 때문에 풋살을 많이 한다는데, 저도 풋살팀에서 공격수로 뛰어다니고 있어요. 아직 골 결정력이 없는 공격수죠(웃음). 마음으로는 공격을 잘하고 싶은데 뜻대로 잘 안 돼요. 정확히 말하자면 ‘어시 하는 미드필더’가 아닐까 싶어요. 한창 열심히 할 땐 일주일에 두세 번씩 뛰곤 했는데, 최근 서너 달은 바빠서 제대로 못 하다가 최근에야 다시 시작했어요. 죽을 뻔했죠. 너무 힘들어서(웃음). 새삼 축구 선수들이 대단하더라고요. 엄청나게 큰 운동장을 전후반 합쳐서 90분 풀타임으로 뛰는 거니까요. 

 

“죽을 뻔”하게 힘든데도 풋살을 취미로 삼는 이유가 뭐예요? 

다 잊게 해주니까요. 취미라는 게 많은 사람에게 그럴 거예요. 누구나 자기만의 일이 있지만, 아무리 의미 있다고 해도 가끔은 스위치를 끄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반대로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거나 해야만 해서 억지로 일하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그런 사람들에게도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를 충족해 줄 활동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저는 취미가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풋살을 이야기하기 전에 ‘책 읽고 영화 보기’가 취미라고 하셨는데, 그건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의미 같기도 해요. 

많은 콘텐츠가 이야기를 담고 있죠. 우리가 이야기를 찾는 이유는 아마 다른 삶을 간접적으로 경험해 보고 싶어서일 것 같아요. 우리는 어쩌다 ‘나’로 태어나서 자기의 삶을 살아요. 마음먹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되어볼 수가 없죠. 그걸 간접적으로나마 해볼 수 있는 가장 간편한 방식이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는 일 같아요. 물론 그냥 재미를 좇아서 보는 경우도 있겠죠. 이 외에도 분명히 많은 이유가 있을 거고요. 이렇듯, 이야기를 찾는 데는 다양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다양한 형식과 작품이 계속 생겨나는 것 같아요. 

 

그럼 수현 씨는 <골 때리는 그녀들>을 어떤 이유로 보고 있어요? 

처음엔 순전히 재미로 봤는데, 풋살을 시작하고부터는 가볍게 볼 수가 없겠더라고요. ‘저 선수는 어떤 기술을 쓰지?’, ‘어떻게 공간을 활용하면 더 잘할 수 있지?’ 같은 생각을 하게 돼서요. 선수 관점으로 보려고 하는 건 아닌데, 풋살에 관심이 생기니까 자꾸 그런 쪽으로 보게 돼요. 

 

같은 걸 봐도 내 상황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거군요. 

맞아요. 자기감정이라든지 지금 처한 상황이라든지…. 

 

볼 때마다 달라지는 작품 있어요? 

저는 한 번 본 작품은 다시 보지 않아요. 이미 내용을 다 알고 있잖아요. 

 

정말요? 저는 봤던 작품만 다시 보는데. 

역시 사람은 참 다양해요(웃음). 제 룸메이트가 그런 편이에요. 좋아하는 영화를 계속 다시 보더라고요.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땐 참 신기했어요. 물론 저도 돌려 보는 경우는 있어요. 연기 때문에, 인터뷰를 준비해야 해서, 모더레이터를 하게 돼서…. 여러 번 보면 보이지 않던 게 보이기도 하죠. 하지만 아무리 좋았던 작품이어도 굳이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은 잘 안 해요. 아, 생각해 보니 다시 본 작품이 있네요. 최근 몇 년은 크리스마스 즈음이면 <나 홀로 집에>(1990)를 챙겨 봤거든요. 아주 어릴 때 보고 최근에 다시 본 건데, 시각이 달라졌다는 게 느껴졌어요. 어릴 땐 어린아이 관점에서 케빈이 혼자 있는 게 너무 무섭겠다고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도둑들이 너무 아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남의 집에 침입한 건 잘못이지만 그거랑 별개로 뾰족한 거에 찔리고 불에 데고… 얼마나 아플까요. 어릴 땐 케빈에게 감정이 이입된 거 같은데, 지금은 도둑의 통증도 생각하게 되는 게 재미있어요.

경험치에 따라 와닿는 지점이 다르겠단 생각도 들어요. 참, 수현 씨 생일이 특이하더라고요. 윤달 2월 29일에 태어나셨다고요. 

맞아요. 근데 자각을 잘 못 해요. 어릴 땐 가족들이 2월 28일에 생일을 챙겨줬고, 지금은 친구들에게 2월 28일이랑 3월 1일 이틀을 축하받고 지내거든요. 그래서 특별한 감상은 없지만, 그래도 새해가 오면 가장 먼저 2월 달력을 펼쳐요. 윤달인지 확인하고는 ‘올해는 29일이 나타났구나!’ 하면서 반가워하죠. 

 

그럼 윤달이 아닌 해엔 SNS에 생일이 어떻게 표시돼요? 

아무 표시도 없어요. 딱 2월 29일에만. 그래도 내년엔 오랜만에 제 생일이 돌아와요. 

 

(달력을 본다.) 어? 아닌데요. 윤달은 내후년이에요. 2024년. 

어? 그러네요. 이번엔 윤달이 왜 이렇게 먼 것 같죠(웃음). 

 

계속 시야에 귀여운 생명체가 걸려서 시선이 바빠요(웃음). 고양이 세 마리와 함께 지내고 있죠. 소개해 주실래요? 

첫째 슈짱, 둘째 앙꼬, 셋째 땅이에요. 아이들 나이는 매번 헷갈리는데, 첫째가 열셋, 둘째가 열 살, 셋째가… 벌써 네 살이네요. 셋은 성격도 다 달라요. 첫째는 아무래도 나이를 먹고 삶이 좀 능숙해졌어요. 사람이 와도 피하지도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죠. 둘째랑 셋째는 겁이 많아요. 아마 오늘 제대로 얼굴 보기 힘드실 거예요. 둘째는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슬그머니 얼굴을 비추기도 하는데, 셋째는 절대로 나오지 않죠. 그래도 저한테 애교가 가장 많은 건 셋째고, 둘째는… 식탐이 정말 많아요. 오늘 아침 습식 캔 두 개를 땄는데, 둘째 혼자 한 캔 반을 먹고 나머지 반을 첫째랑 셋째가 나눠 먹었어요(웃음). 

 

먹는 이야기 하니까 에세이에 “일어나서 첫 번째로 꼭 밥을 먹어야 한다.”고 쓰신 게 생각나요. 오늘 뭐 드셨어요? 

빨리 해치워야 할 표고버섯이 있어서 대파랑 달달 볶다가 다진 마늘을 넣어서 쌀밥이랑 같이 먹었어요. 비건 김치랑 비건 스팸도요. 요즘 풀무원에서 비건 식단이 많이 나오는데, 쏠쏠하게 애용하고 있어요. 점점 이런 선택지가 많아지는 게 좋더라고요. 

 

집에 출연한 작품의 포스터나 스틸컷이 많이 붙어 있어요. 수현 씨 뒤엔 <프론트맨>(2020) 포스터가 걸려 있네요. 아쟁을 전공하는 고등학생 역할이었죠. 근데 실제로 아쟁을 전공하셨다고요. 

맞아요. 요즘도 가끔 연주하고 싶단 생각이 들면 꺼내서 연습하곤 해요. 원래는 딴딴한 굳은살이 손 안쪽까지 박이는데, 연습을 안 하다 보니 손끝이 야들야들해졌어요. 요새는 30분만 연주해도 물집이 터지곤 하죠. 연기를 시작하면서 그만두었지만 여전히 아쟁 소리가 그리울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연주하거나 유튜브에서 아쟁 연주를 찾아보기도 해요. 같이 전공하던 친구들이 뭐 할까 궁금해서 검색해 보기도 하고요. 밴드에서 아쟁 파트를 맡아 연주하는 친구도 있고, 전자음악과 결합해서 연주하는 친구도 있고… 굉장히 다양한 방식으로 활동하더라고요. 

 

<프론트맨>은 과거와 현재의 수현 씨가 합쳐진 작품이네요. 어땠어요? 

고등학생 때 생각이 정말 많이 났어요. 그땐 지금과 다르게 경쟁심에 불타올랐거든요. 1등이어야 하고, 1등 하고 싶고, 내가 제일 잘했으면 싶고. 지금은 세상에 다양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각자의 방식을 존중하며 지내는데, 그땐 입시 제도 안에 편입돼 있던 상황이라 압박이 심했어요. 친구랑 경쟁해야 한다는 게 큰 스트레스였죠. 제가 정말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랑 경쟁할 때 특히 심했어요. 이 친구한테 지면 분하고, 화나고, 약오르고, 슬펐거든요. 대학을 가려면 상을 타야 하고 선생님한테 인정도 받아야 하는데, 그 경쟁을 친구랑 하려니까 힘이 들었던 거죠. 그런 감정을 싸이월드 미니홈피 다이어리에 비공개로 막 털어놓곤 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친구가 상대적으로 무던해서 제가 더 분했던 것 같아요(웃음). 저는 바싹 약이 올라 있는데, 친구는 너무 덤덤했으니까요. <프론트맨>도 비슷한 이야기예요. 물론 구조적으로는 성차별에 대한 영화인데, 두 여자 주인공이 아쟁을 잘하고 싶어 하는 모습이 나오거든요. 연기하면서 고등학생 때를 정말 많이 생각했어요. 아쟁을 오랫동안 해오면서 레슨비도 많이 들고 노력도 많이 했는데, 결국 안 하게 된 게 쓸데없는 짓이었나 싶은 적도 있었거든요. 근데 이걸로 연기를 하니까 전공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책 제목처럼 쓸데없는 짓은 없구나 싶기도 했고요. 

 

집에 티브이가 없다고 했어요. 휴대전화가 보편화되고 집 전화가 사라지는 것처럼, 요새는 티브이가 아니더라도 휴대폰이나 PC, 태블릿으로 영상을 접하게 됐지요. 

맞아요. 저도 노트북이나 컴퓨터 모니터로 이것저것 보곤 하는데요. 요즘 계속 생기고 있는 OTT 플랫폼이나 유튜브 영상을 보면 ‘사람들이 여유가 없나 보다.’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돼요. 책을 펼쳐볼 여유가 없어서 영상으로 정보를 얻고, 이마저도 1.5배속, 2배속 기능을 사용해서 빠르게 보는 사람도 많아졌고요. 요즘은 작품 안에서의 호흡도 빨라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최근에 고전 영화를 한 편 봤는데 속도가 굉장히 느리더라고요. 롱테이크도 많고, 화면 전환도 느리고, 컷도 거의 쪼개지 않고 진행되고요. 물론 필름을 쓰던 시대여서 그런 면도 있겠지만, 사람들이 빠른 걸 원하게 되면서 지금은 영화도, 예능도, 드라마도 전부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아요. 이러다 점점 더 빨라져서 지금보다 빠른 세상이 오면 제가 할머니가 됐을 때 따라잡을 수 있을까요? 

 

생각해 보면 케이블 채널이 없던 시절엔 드라마도 시간 맞춰서 본 방송을 봐야 했죠. 재방송 보려면 신문에서 편성표를 찾아봐야 했고요. 

맞아요. 요즘은 OTT 플랫폼에 전편이 다 올라오니까 그런 수고를 들일 일이 전혀 없죠. 이런 빠른 흐름 때문에 요즘은 문해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많아졌대요. 스마트폰을 스크롤 하면서 보다 보니까 글을 한 줄, 한 줄 읽지 않고 대각선으로 훑듯이 본다는 거예요. 결국 맥락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되는 거죠. 

 

시간이 많이 흐르면 지금이랑 엄청 다른 무언가가 생겨 있을 것 같아요. 

그땐 정말 못 따라갈 것 같아요. 최근에 엄마가 우쿨렐레 스트랩이 필요하다고 대신 구매를 부탁하신 적이 있어요. 온라인 쇼핑을 하려는데 입력할 게 너무 많으니까 힘드셨나 봐요. 그걸 부탁하면서도 굉장히 미안해하시는 거예요. 사실 엄마가 미안해할 일이 아니잖아요. 그런 걸 보면 편리하자고 만든 시스템인데 모두에게 친절한 세상은 아닌 것 같단 생각도 들어요. 

 

맞아요. 저희 엄마도 온라인 쇼핑이 어려우니까 URL을 손글씨로 한 자 한 자 옮겨 적어서는 저한테 구매를 부탁하신 적이 있어요. 상품 페이지니까 URL이 엄청 길더라고요. 

어떡해요…. 정말 속상하셨을 것 같아요. 분명히 빨라지고 편해진 세상이지만, 모두를 위한 시스템이 필요한 시대인 것 같아요.

수현 씨 목소리는 참 침착하고 단정해요. 그런 목소리로 말해 주니까 안타까움이 마음에 와닿았어요. 그런데, 에세이에 “음성 언어를 잘 못한다. 사람들 앞에 나서서 음성으로 말을 할 바에야 텍스트로 전달하는 것이 훨씬 편안하다.”고 쓰셨더라고요. 

말하는 걸 싫어하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말하기는 좋아하는데, 많은 사람 앞에서 정제되지 않은 말을 하는 게 부담스럽다고 하는 게 정확할 것 같아요. 자유롭게 말할 때 말에 무게가 생기는 게 두려운 거죠. 연기는 정제된 대사가 있고 저는 그걸 이야기하는 거니까 부담이 덜해요. 오늘 인터뷰도 한 번 정리가 될 걸 아니까 편하게 대화하고 있는데요. 많은 사람 앞에서 말했을 땐 제 말이 의도와 다르게 왜곡될지도 모른다는 게 좀 무서워요. 내 말이 다르게 가닿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공감해요. 저는 글도 그래요. 몇 번이고 수정할 수 있는 글은 괜찮지만, 메신저는 빠르잖아요. 오늘도 이동하면서 급하게 메시지 보낼 일이 있었는데요. ‘혹시 내 뉘앙스가 잘못 읽혔으면 어떡하지?’ 하고 걱정했어요. 

맞아요. 저는 메일 보낼 때도 몇 번을 확인하고 고민해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고 써놓고 ‘오늘이 좋은 하루가 아니면 어떡하지….’ 생각하고, “오늘 하루도 마무리 잘 하시고요.” 해놓고 ‘하루가 아직 안 끝났으면 어떡하지?’ 싶고요. 말이란 뭘까요? 가끔은 상대랑 뇌가 연결되면 좋겠어요. 제 생각이 고스란히 전달되게요. 

 

이번 에세이를 쓸 땐 어땠어요? 

계속 고치고, 수정하고, 고민하고, 생각하면서 썼어요. 제가 아무리 정제해도 의미는 해석하기 나름이어서 혹시 제 문장이 누구한테 상처를 주진 않을까 싶어서 걱정됐거든요. 

 

그런 마음이 느껴졌어요. 많은 문장에서 누군가 소외되진 않을까, 배제되진 않을까 고민한 흔적이 보이는 것 같았어요. 

정말요? 그렇게 읽혔다니 너무 다행이에요. 원고를 수백 번 읽고 고쳤어요. 누군가의 불안을 자극할까 봐 걱정되고, 단정 지을까 봐 고민하고. 여러모로 신경을 많이 썼어요.  

 

책에 “내 앞에서 웃고 있는 사람이 뒤돌아서면 어떤 표정 어떤 생각을 할지 알 수 없다.”는 말을 쓰셨잖아요. 그 구절을 찍어서 SNS에 올렸더니 사람들이 무슨 책이냐고 묻더라고요. 우리 모두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솔직히 꺼내놓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감정을 나만 느끼는 게 아니구나 싶어서 위로도 되었고요. 

사실 제가 책에 쓴 이야기가 다 시시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요. 이런 시시함이 누군가의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쩌면 모두가 시시하게 살고 있지 않을까, 이런 시시함이 많아지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기기도 했고요. 이런 후기를 들으니까 조금 마음이 놓여요. 책이 나오고 정말 기뻤지만, 어떻게 읽힐까에 대한 고민이 끊이질 않았거든요. 

 

책 제목이 《쓸데없는 짓이 어디 있나요》잖아요. ‘쓸데없다’는 말은 참 부정적인데, 이건 사회가 정해놓은 기준 같아요. 성공하지 못하면, 그럴듯한 결과를 내지 못하면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서요. 수현 씨한테 쓸모의 기준을 묻고 싶어요. 

관념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쓸모가 없다는 건 ‘없는 것’이에요. 존재하지 않는 거요. 지금 세계는 자본을 기준으로 쓸모를 구분하는 것 같아요. 사실 책을 쓰면서 ‘이거 너무 쓸데없는 얘기인가?’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이걸 누가 읽을까 싶기도 했고요. 그래서 제목이 이렇게 나온 건데,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 같아요. 저는 그 기준을 자본에 두지 않으려고 해요. 만일 성공이나 빛나는 결과가 쓸모라면 사람이 태어나서 사는 것 자체가 쓸데없는 일이 아닌가 싶거든요. 우리는 어차피 죽을 거고, 사라질 텐데, 이름을 알리고 성공하는 것이 과연 쓸 데 있는 일일까요􏚐 하다못해 돈을 모으고, 집을 사는 것도요. 근데 그 기준을 자본에 두지 않으면 좀더 쓸모 있는 일이 많아져요. 좋아하는 친구랑 시간을 보내는 거, 고양이랑 하루를 시작하는 거… 모든 게 쓸 데 있는 일이 되니까요. 언젠가 사라지더라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성공이 아니더라도 행복하다면 그것만으로도 쓸 데가 있다…고 생각하기 위해 엄청 노력해요. 요즘 여러가지가 쓸데없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거든요. 

 

왜요? 

바쁜 일이 몰아치다 지나가니까 모든 게 허망하단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뭘 위해 이렇게 살지?’라는 생각을 하다가 ‘모두 왜 태어난 걸까?’라는 생각까지 가더라고요. 그 생각을 해소하기 위해 기타로 노래도 만들었어요. 근데 그것마저 쓸데없는 짓을 한 것 같단 생각이 들었죠. 요즘 제 삶의 분위기가 좀 그랬어요. 왜 그런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복합적인 것 같아요. 뉴스를 봐도 안 좋은 이야기만 들리잖아요. 최근엔 신당역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이 정말 괴롭고 화가 났어요. 영화제가 줄줄이 폐지되는 것도 그렇고요. ‘쓸모없는’ 영화제라는 기사를 보고 문화예술을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싶은 생각도 많이 들었죠. 이런 일들이 한꺼번에 겹치면서 화가 나는 상태인 것 같아요. 근데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무력감을 느껴요. 그러면서 이 세상이 만들어진 게 쓸모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쓸모를 찾기 위해 애쓰는 거예요.

쉽지는 않지만 ‘생겨난 이상 쓸모는 있다.’고 생각하려는 거네요. 

네. 노력하는 거죠. 예컨대, 대기업에서 돈은 많이 벌지만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잖아요.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그런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에요. 근데 저처럼 프리랜서로 고정 수입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자본의 기준으론 인정받지 못하거든요. 제가 아무리 친구들이랑, 고양이랑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 저는 쓸모가 없어지는 거죠. 그래서 사회적인 성공이 아니더라도 의미 있는 삶은 많다고 생각하기 위해 노력하는 거예요. 자본에서 벗어나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 많아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요. 

 

자본주의를 기준으로 삼아서 쓸모를 나누는 건 좀 폭력적이란 생각도 드네요. 사람마다 각자의 기준이 있을 테니까요. 

맞아요. 제 직업도 그래요. 연예인은 보통 화려하고 돈도 많이 번다고 생각해요. 근데 그런 사람은 소수고, 대부분은 다른 일을 병행하면서 생계를 유지해요. 연예인도 똑같은 사람인데 유난히 연예인이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하면 마치 생활고에 시달리는 게 신기한 일이라는 양 미디어에서 크게 다루잖아요. 배우도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거든요. 직장인이 투잡 하는 건 이상하지 않은데, 연예인이라고 잣대가 생기는 게 부자연스럽다고 느꼈죠. 사람들이 이 직업을 좀더 평범하게 바라보면 좋겠어요. 누구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유동적으로, 또 자유롭게 하는 세상이면 좋겠다는 거죠. 

 

그런 시각을 위해 책에 아르바이트 이야기도 쓰신 거죠? 

네. 고정 수입이 없으니까 종종 생계 유지를 위해 다른 일을 하기도 해요. 저는 베이비시터랑 택배 일을 했는데요. 운전하는 걸 좋아해서 택배 배달이 재미있더라고요. 지금은 주말에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요. 연예인이라고 해서 부업이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걸 자극적으로 이슈화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고정된 시선이나 잣대가 사라지길 바라니까 자꾸 원고를 솔직하게 쓰게 되더라고요. 

 

지난해 키워드가 ‘관계’라고 하셨죠.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 주는 걸 좋아한다.”고 쓰셨어요. 특히 “수현아.”라며 다정하게 불러 주는 걸 좋아한다고요. 수현 씨는 누군가와 다정하게 관계 맺기를 바라는 것 같아요. 최근에 그런 경험 있었나요? 

오늘이요. 다정함을 굉장히 많이 느꼈어요. 우리 고양이들에게 인사해 주시고 친절하게 말을 걸어 주셨잖아요. 다정함이란 말뿐만 아니라 풍기는 분위기도 포함하는 것 같아요. 커뮤니케이션은 꼭 음성 언어로만 하는 게 아니니까요. 바라보기, 경청하기… 그 모든 걸 포함했을 때 완성되는 것이고 저는 지금 다정함을 느껴요. 이런 기분은 특히 친구들이랑 있을 때 많이 느끼는데요. 고민을 진심으로 들어주고 걱정해 주는 마음이 전해지는게 저한테는 곧 다정함이에요. 

 

저도 오늘 무척 다정한 대화를 나눈 기분이에요. 올해는 어떤 키워드로 기록될 것 같아요? 

‘의미’요. 쓸모라는 건 다른 말로 의미 같아요. 다 의미 있다고 여기려고 하지만, 문득 무의미한 것 같다는 생각이 치고 들어올 때가 있어요.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은 있을 것 같아요. 허무함, 무력감… 그런 걸 견디며 의미를 찾아 나가는 게, 그렇게 살아가는 게 해야 할 일이란 생각을 유독 많이 했어요. 

 

올해 의미 있다고 느낀 일을 꼽아볼까요? 

올 초에 친구가 강아지 여섯 마리를 구조했는데 같이 임시 보호하면서 다섯 마리를 입양 보냈어요. 전부 좋은 가족을 만난 게 가장 뜻깊은 일이었어요. 에너지가 넘치는 강아지들이라 임시 보호하는 게 사실 힘들었거든요. 근데 한 마리, 한 마리 보낼 때마다 벅차더라고요. 이제 딱 한 마리 ‘보들이’만 남았는데 올해 안에 보들이를 입양 보내는 게 목표예요. 사람들이 여전히 펫숍에서 강아지를 사고팔고 있어요. 입양하는 사람은 8퍼센트에 그친다더라고요. 불법 상업 행위가 이제는 사라졌으면 좋겠어요. 보들이는 에너지가 넘치는 어린 강아지라 몸 쓰는 걸 좋아하는데요. 머리를 쓰는 멋진 강아지가 되려고 지금 학교에 입학해서 교육도 받고 있어요. “앉아. 서.” 하는 훈련이 아니라, 무작정 몸만 이용하는 게 아닌 머리로 대화하는 법을 배우는 교육이죠. 정말 순하고 착한 아이인데, 보들이가 올해 안에 꼭 새로운 가족을 만나면 좋겠어요. 이런 의미 있는 일도 제가 살아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거겠죠? 그러니까 내년도, 후년도 이렇게 의미를 찾으면서 살아가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남길게요. 강아지는 꼭 사지 말고 입양하세요!

《쓸데없는 짓이 어디 있나요》에 수현은 손글씨로 이렇게 적었다. “‘쓸데없는 짓은 없다’라는 믿음이 마냥 막연하지 않은 이유는 걷기 때문”이라고. 사려 깊은 수현과 함께 발맞춰 걷고 싶다. 가끔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면서.

에디터 이주연

포토그래퍼 Hae 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