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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사적인 계보
흑백영화에 관한
지극히 사적인 계보
흑백영화는 우리가 도저히 알 수 없던 한 세계를 또렷이 인식하게 한다.
영화는 각각 세계의 창조이다. 하지만 흑백영화만큼 다른 세계를 또렷이 인식하게 하는 것은 없다. 실제 배경이 세트든 로케이션 장소든 상관없이 그 세계는 오직 영화적이다. 빛으로 모든 것이 통제되는 세계. 빛이 있으면 볼 수 있고, 빛이 사라지면 세상은 어둠에 잠긴다. 빛은 세상의 색을 보여주지만, 흑백영화에서 빛은 그것의 형상만을 제시한다. 흑백영화가 영화적인 이유도, 실은 이와 관련된다. 보여주는 동시에 가려버리는 것. 선택하는 동시에 배제해버리는 것.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이렇듯 대조적인 것의 동시적 수행 상태다.
‘어떤’ 흑백영화가 아니라 ‘흑백영화’라는 범주 자체를 떠올릴 때면 내 머릿속에서 흑백영화는 즉각 필름 조각으로 대체된다. 아마도 형태를 있음과 없음으로 단순화시키는 특성 때문인 것 같다. 흑백영화에는, 필름 조각처럼그것이 찍힐 당시의 시공간이 달라붙어 있어 자꾸만 영화의 원형을 기억하게 한다. 한때 필름은 영화와 사진의 모든 것이었다. 사진관에서 현상한 사진을 찾을 때면, 두툼한 사진 뭉치 뒤로 뭉텅뭉텅 잘린 필름 조각이 늘 부록처럼 딸려왔다. 때로는 조그만 필름 조각 속에서 사진을 상상하는 편이 실제 사진을 확인하는 것보다 즐거웠다.
작은 프레임 속 세상은, 보이는 어두움과 보이지 않는 밝음으로 반전된 채 거기 웅크리고 있다. 세계의 이면이 담긴 필름처럼 흑백영화는 우리가 원래 안다고 생각하던 것의 이면이 있음을 그 표면 위에 새기고 있다.
관객들은 전혀 확인할 수 없는 색을 언급하는 흑백영화를 기억한다. 샹탈 애커만은 자신의 영화 <나, 너, 그, 그녀> 에서 일종의 퇴행적 수행자로 출연한다.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은 그녀의 행위를 설명하거나 지시한다. ‘첫째 날, 나는 가구를 파랗게 칠했다.’는 화면 밖 음성과는 달리, 이어진 숏에서 ‘나’(샹탈 애커만)는 의자에서 등을 돌린 채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다. 칠한 이후인지, 이전인지 혹은 거짓 정보인지 알 수 없다. 화면은 그대로 페이드아웃 되고, 검은 화면 위로 두 번째 내레이션이 흐른다. ‘둘째 날, 나는 그것들을 녹색으로 칠했다.’는 보이스오버 내레이션 이후, 페이드인하면 이번에는 ‘나’가 정면에 놓인 테이블 뒤에 턱을 괴고 앉아 있다. 이후에도 무언가 칠하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으므로, 관객은 음성 정보와 비주얼 이미지의 관계를 영영 알 수 없다. 나는 이렇듯 영화에 새겨진, 내가 도저히 알 수 없는 어떤 것을 사랑했다.
그전에도 몇몇 영화를 봐왔지만, ‘이것이 영화구나.’라고 인식한 것은 어느 날 안방의 조그만 아날로그 텔레비전에서 나오던 한 흑백영화를 보았을 때다. 그 영화가 레오스 카락스의 <소년 소녀를 만나다>라는 것은, 그 이상스러운 배우가 드니 라방이라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나는 앞부분을 보지 못해 어떤 내용인지도 모르는 영화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때 나를 사로잡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알렉스(드니 라방)가 입고 나온 흑백 격자무늬 재킷 때문이었을까. 흑백영화에서 유독 도드라져 보이던 그 격자무늬를 비롯해 내가 영화에 관해 기억하는 것은 파편들이다. 특히 여자 주인공 미레유(미레유 페리에)가 자살하려던 순간과 이때 등장한 가위의 이미지를 강렬하고 또렷하게 기억했다. 그전까지 내게 영화는 서사와 동일했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를 만난 그 순간, 영화가 강렬한 시각 이미지일지도 모른다고 자각했다.
‘모른다’는 자각은 ‘안다’는 자각보다 영화적이다. 영화라는 세계는 모른다는 것이 두려움이 아니라 가능성이 되는 반전의 세계였다. 책에서 만난 나의 영화 스승은 영화란 사유의 무능력을 경험하는 거라고 말했다. 들뢰즈는 아르토를 경유해 “우리는 전능한 하나의 사유를 재건하려 하지 않고 이 무능력을 우리의 사유방식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질 들뢰즈, 《시간-이미지》). 여기에서 들뢰즈는 아르토에게서 드레이어에게로 향한다. 나는 들뢰즈가 인용한 <게르트루드>(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대사보다 들뢰즈의 사유를 잘 드러내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들뢰즈가 인용한 <게르트루드> 속 주인공의 대사는 다음과 같다. “내가 젊었었나? 아니다, 그러나 나는 사랑했다. 내가 아름다웠던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사랑했다. 내가 살았었나? 아니다, 그러나 나는 사랑했다.” 이 인용된 대사를 읽기 전까지 내가 영화이론서를 읽다가 눈물을 흘리게 될 줄은 몰랐다. 이것은 온전히 대사가 가진 힘이라기보다는, 대사가 들뢰즈의 사유와 뭉쳐 내게 날아와 꽂힌 거라고 생각한다.
<게르트루드>를 다시 보다가 이 영화가 드레이어의 전작 <잔 다르크의 수난>과 깊이 연결되었음을 느꼈다. 게르트루드(니나 펜스 로데)는 어떤 인물과 대화할 때,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대신 카메라 너머 어딘가를 보곤 한다. 카메라는 여간해서 컷을 나누지 않은 채 흐르며, 게르트루드와 왈츠를 춘다. 게르트루드의 시선에서, <잔 다르크의 수난>의 마리아 팔코네티를 떠올렸다. 팔코네티가 연기한 잔 다르크의 시선 역시 카메라 너머를 향했다. 드레이어는 시선의 유비를 통해 어떤 종교인의 숭고한 영적 체험을 한 여인의 통속적 사랑 버전으로 반복한다. 잔 다르크의 시선이 속세 너머 영혼을 향한다면, 게르트루드는 기억을 더듬거나 꿈을 꾸는 것 같다. 이들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보지 않지만, 그녀들의 시선은 카메라와 관계되어 있으며 카메라 너머의 관객을 의식한다.
훗날 장 뤽 고다르는 <비브르 사 비>에서 <잔 다르크의 수난>의 한 장면을 인용한다. <비브르 사 비>의 주인공 나나(안나 카리나)는 극장에서 <잔 다르크의 수난>을 보다가 눈물짓는다. 나나는 팔코네티를 바라보고, 관객인 우리는 그런 카리나를 바라본다. 때때로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는 카리나의 몽환적인 눈빛은 환상의 벽을 깨는 동시에 또 다른 환상의 벽을 공고히 구축한다. 그 속에는 자각과 환영이 동시에 깃든다. 우리는 영화를 바라보고 영화는 우리를 바라본다. 오래된 환상의 눈 맞춤. 그 눈 맞춤은 관객이 영화와 닮아 있음을 표시한다. 영화가 상영되는 어두운 영화관 속에서 관객은 익명의 형상으로 빛난다. 각자의 자리에서 페이드인의 기대감과 페이드아웃의 여운을 품은 채, 어둠으로 빛나는 영화 안에 우리가 있다.
글 김소희(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