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두 스쿱의 시간

녹싸 ㅡ 녹기 전에

작은 컵에 담긴 아이스크림을 떠올려본다. 눈으로 한껏 음미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알지만,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형태를 잃어버려 녹기 전에 한 스푼 떠먹어야 한다. 이윽고 퍼지는 달콤함, 그 충분한 행복을 만끽하기 위해 사람들은 ‘녹기 전에’로 향한다. 녹기 전에가 건네는 컵에는 두 가지 맛의 아이스크림만 담기지 않는다. 오는 이를 향한 환영, 자신을 지키는 일상과 가치, 존재의 유한성까지. 어느 한 가지 맛도 허술하게 대하지 않는 녹싸로부터 흐르는 두 스쿱의 시간을 듣는다.

아이스크림 가게가 문 열기 전에 와본 적은 처음이에요(웃음). 정오에 오픈하는데 언제쯤 출근하세요?

보통 9시쯤 오는데요. 오픈 준비를 한 시간가량 하고 남은 시간엔 책 읽거나 빈둥거리거나 산책을 해요. 방금 잠에서 깬 사람처럼 부스스하게 시작하고 싶지 않거든요. 일찍 와서 가게 상황에 몸을 충분히 적시고 에너지를 끌어올린 상태로 일하는 걸 좋아해요.

 

일종의 예열이네요. 먼저 호칭을 정하고 싶은데 ‘박정수’와 ‘녹싸’ 중 어떤 게 좋으세요?

음, 녹싸라고 불러주세요.

 

좋아요. 녹싸 씨의 소개를 듣고 싶어요.

마포구 염리동이라는 작은 동네에서 아이스크림 가게 ‘녹기 전에’를 운영하고 있어요. 연초에 《좋은 기분》이라는 책을 내서, 작가로 소개되기도 합니다. 스스로 쓰는 말은 아니고요(웃음). 저는 여전히 상인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작가라는 건 잠깐의 즐거운 일탈이었다고 생각해요. 책에 관해 바빴던 일들은 거의 마무리가 되어서 이제 다시 본업에 충실해야 하는 시기죠.

 

준비된 맛이 매일 달라지던데 오늘의 메뉴는 정해졌어요?

아, 오늘은 메뉴가 꽤 좋은 편에 속합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피스타치오’가 있거든요. 맷돌처럼 생긴 콘칭기라는 기계에 피스타치오 원물을 사흘에서 나흘 정도 갈아요. 진한 페이스트로 만들어서 쓰다 보니 시간과 공, 마음도 필요한데 아주 맛있습니다.

 

이따 한번 먹어볼게요. 오는 길이 한적해서 좋았는데 염리동은 어떤 동네인가요?

되게 특이해요. 지도로 보면 가로 500미터, 세로로 1.5킬로미터 정도 뻗어 있어서 위아래로 긴 지형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위쪽부터 상염리, 중염리, 하염리라고 부르는데 여기는 중염리예요. 동네 재개발이 덜 되어서 시장과 집, 경의선숲길 공원이 엎치락뒤치락 공존하는 동네이기도 하죠. 옛날에는 소금 장수들이 살았던 터라 ‘소금 염鹽’과 ‘마을 리里’를 써서 염리동이라 불리는 거래요.

 

굉장히 자세하게 알고 있네요.

어디 놀러 가거나 이사 갈 때 동네를 많이 살펴보거든요. 지도에서 찾아보거나 실제로 가보기도 하고 동네 이름의 유래부터 역사, 총 인구수, 지도의 형태도 보곤 해요. 포털 사이트 거리뷰를 보면 10년 전 모습도 볼 수 있어서 이곳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도 알 수 있어요. 저는 그게 삶을 좀더 다채롭게 사는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그랜드 캐니언을 떠올려보면, 아름답고도 엄청난 퇴적층이 시간의 누적을 나타내고 사람은 그걸 보며 멋진 감정을 느끼게 되잖아요. 하지만 우리 주변 대부분은 끊임없이 모습을 갈아엎으니까 현재성밖에 느낄 수 없죠. 그래서 자료를 찾아보면서 어떤 동네인지 알아보게 돼요.

 

덕분에 새로운 방식으로 염리동을 알게 되었어요. 보통 어떤 손님들이 오는지 궁금해요.

오픈부터 오후 2시까지는 직장인이 대부분이라면 오후 5시 정도에는 학생들이 찾아와요. 초등학생 친구들도 가끔 있고 중·고등학생, 대학생들도 와서 개강했다고 인사하고요. 저녁에는 퇴근길에 아이스크림 포장해 가는 분들이라면, 주말에는 ‘을밀대’에 평양냉면 먹으러 온 분들이 들르시더라고요.

녹기 전에는 손님을 위한 이벤트가 있잖아요. 주변 학교의 개교기념일을 챙기고 보물찾기도 한다고요.

맞습니다. 개교기념일이 다가오면 그 학교만의 맛을 만들어줘요. 그중 한번은 하교 시간이 되니까 가게 앞에 200명 넘게 줄 선 적도 있고, 교장 선생님을 뵙거나 학생회장 친구가 찾아와서 인터뷰한 적도 있어요. 보물찾기는 경의선숲길에 쪽지를 숨겨두고 찾아오는 손님에게 선물을 드리는 건데요. 아이스크림 관련된 할인, 무료 증정 혜택은 물론이고 저와 동료들과의 식사권도 들어 있어요. 애장품 증정으로 제가 정말 아끼는 돌멩이를 드린 적도 있고요. 물론, 돌멩이라고 해서 실망하실 수도 있는데요. 어떤 절 앞에 흐르는 시냇물에 있던 돌이라 힘들 때마다 꼭 쥐며 질량을 느꼈던… 아주 소중한 겁니다.

 

(웃음) 녹기 전에만의 재미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겠어요. 팬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사실 저는 ‘팬’이라는 단어를 굉장히 경계합니다. 내가 왜 받아들이지 못할까 생각해 보니, 그 단어를 쓰려면 팬인 사람이 좋아하는 대상을 만나기 어려워야겠더라고요. 그런데 저희는 언제나 여기 있잖아요. 팬보다는 편하게 단골손님들이라고 생각해요.

 

그럼 단골손님의 디저트 시간을 방해하지 않도록 부지런히 이야기 나눠볼게요. 녹기 전에는 어떻게 떠올린 이름이에요?

당시만 해도 젤라토를 파는 아이스크림 가게 이름들이 이탈리아어라 어려웠어요. 저는 이태리 유학파도 아니고 마트에서 투게더 먹던 사람인데 굳이 그런 이름을 쓰고 싶지 않더라고요. 게다가 아이스크림에 시간이라는 가치를 부여하고 싶어서 일상적인 단어 중 ‘녹다’와 ‘전에’라는 말을 붙인 거죠. 둘 다 시간의 흐름이 내재된 말이고 줄여서 ‘녹전’이라고 부르기도 좋으니까요. 처음에는 영어로 생각했는데 구청에서 신청서를 내기 직전에, 줄 긋고 한글로 적어 냈어요.

 

왜 시간이라는 가치를 아이스크림에 담은 걸까요?

시간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치이자,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화두라고 생각해요. 산다는 건 멈춰 있는 게 아니라 정해진 시간 사이를 어떻게 헤쳐 나가느냐잖아요.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어도 언젠가 죽을 거니까 점과 점 사이를 어떻게 잇는지가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인 거죠. 그리고 삶뿐만이 아니라 예술과 문화, 소비처럼 모든 것의 근원을 파고들면 시간의 유한성이 드러나거든요. 이런 생각을 어릴 때부터 했으니까 늘 호기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어요. 그렇다고 가까운 이의 죽음이 있거나 죽음의 위기를 느꼈다는 등의 계기는 없지만요.

 

특별한 계기보다도 자연스럽게 감각되는 게 시간인가 봐요.

감각이라는 표현이 되게 중요한데 제 감각 방식에는 시간도 포함돼요. 흐르는 강물을 시간에 비유하듯 물을 만지면 시간을 만지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후각과 미각, 촉각처럼 시간을 느끼곤 하죠.

 

같이 일하는 동료들도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녹 가문’이라고 녹싸와 녹밤, 녹초가 있어요. 녹밤은 제조 영역을 맡고 있고, 녹초는 주로 제가 담당했던 접객과 매일의 메뉴 선정을 해주세요. 저는 미드필더처럼 접객과 제조 사이를 넘나들며 필요한 부분을 도와주고 사무 업무나 기획을 도맡고 있고요.

 

이전에 함께할 팀원을 뽑기 위해 정리했던 ‘접객 가이드’가 화제였죠. 거기에 내용을 더해 《좋은 기분》이 만들어진 거고요.

총 몇 페이지더라. (곁에 있는 가이드를 꺼내본다.) 가이드는 164페이지네요. 이걸 정리하게 된 첫째 이유는 이 일을 굉장히 즐기기 때문이었어요. 저는 순수한 즐거움이 느껴지는 제조부터 저 자신이 바뀌게 된 접객도 정말 좋아해요. 그런데 요즘은 온 세상에 키오스크가 생기고 있잖아요. 심지어 점원이 앞에 있는데도 기계에서 주문해야 하고요. 옳고 그름이나 노동 생산성 같은 걸 떠나서 그런 모습이 허용 가능한 시대에 대한 위기감을 표현하려고 했어요. 둘째로는, 평소에 느낄 수 있는 행복에 대해 나누고 싶었어요. 일상을 살면서 행복이 되게 귀하잖아요. 이 글을 읽고 어떤 사람이 함께 해줄지는 모르지만 여기서 일하면서 어떤 기쁨을 얻을 수 있는지, 그 기쁨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가이드를 쓰게 됐죠.

 

내용을 살펴보니, 녹기 전에의 정체성을 아이스크림 파는 곳이 아닌 이야기와 기분을 전달하는 곳으로 정했더라고요. 

다른 일을 할 생각이 없다면 지속 가능한 가게가 되는 게 가장 중요하겠죠. 그러기 위해서는 제품이 좋아야 하는지, 공간이 뛰어나야 하는지 이런저런 기준을 떠올리게 되는데요. 가장 우선인 건 ‘오는 사람이 무엇을 느꼈는지’라고 생각해요. 만드는 이가 공간, 음악, 상품 등 무얼 준비해 두었든 손님이 얻어 가는 마음이 있어요. 그게 좋은 기분이라면 다음에 같은 마음을 안고 또 오실 테니까, 좋은 기분이 오랫동안 유지되는 게 지속 가능성을 높이고 결과적으로 매출에도 도움이 될 거예요. 그러니까 녹기 전에는 어떻게 하면 손님 기분이 더 나아질지를 고민하는 곳일 수밖에 없죠.

 

오는 이에게 좋은 기분을 만들어주는 방법이 바로 접객일 텐데요. 어떤 의미가 담긴 행위일까요?

저한테 접객은 풍선 같아요. 풍선은 모든 면이 똑같이 생겼지만 유독 다른 형태인 입구에서만 아웃풋이 발생해요. 수학 시간에 배운 점과 선, 면, 접점을 떠올려볼까요? 브랜드와 손님이 마주하는 오프라인 공간에서 접점은 접객원이에요. 공간이라는 면도 있지만 접점에 해당하는 접객원이 어떻게 응대하느냐에 따라서 모든 결과가 바뀔 수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어디서 아무리 잘한다고 하더라도 직접 대면했을 때 침을 뱉어버린다면 그건 끝이잖아요. 손님한테는 접객이 반드시 필요한 거죠.

《좋은 기분》에서 “지금의 환대가 시간을 거슬러 가까운 과거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라고 쓰셨죠. 평소에 전혀 체감하지 못했지만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어요.

맞아요. 의식하지 못 했을뿐 실제로 그렇거든요. 힘들게 간 가게인데 무성한 소문과는 다르게 기분이 나쁘다면, 그곳을 가기 위해 찾아보고 기대했던 시간부터 현재까지 몽땅 후회가 되곤 하니까요.

 

손님을 마라톤 주자로, 접객원을 결승선에 선 사람으로 비유한 것도 재미있었어요.

어떤 손님들은 들어올 때 한껏 상기되어 있는데 그게 마라톤 결승선에 들어온 것처럼 보여요. 그런 분들은 보고 반기지 않을 수가 없어요(웃음). 그 기분에 저희가 동화되어서 응원하고 환호하게 되거든요. 기다리는 사람은 상대방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지만, 무얼 거쳐서 이곳에 도착했든 힘든 세상을 뚫고 오신 거니까 저희는 늘 환대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결승선에 들어선 것처럼 환영받는다면 몇 번이고 다시 가고 싶을 것 같은데요. 반대로 접객을 하는 사람한테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배울 점이 무척 많아요. 우리는 결국 사람을 통해서 배우거든요. 책이나 수업, 이론을 통해서 알게 되더라도 그건 결국 사람이 만든 거고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건강한 생각도 하게 되고, 저마다의 고충도 알게 되고, 내 삶도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손님에게 주는 힘이 크다 보니 내가 누군가에게 굉장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도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좋은 접객의 기본 방법은 무얼까요?

인사나 질문에 대한 친절한 답변, 이런 걸 떠올릴 테지만 그게 아니에요. 좋은 접객을 하기 위한 가장 첫 번째 단계는 자기가 먼저 좋은 삶을 사는 거예요. 일상이 행복한 사람은 응대가 조금 서툴러도 돼요. 그렇다면 이 사람이 기분이 나쁜 상태에서 대충 하다가 실수한 건지, 나한테 진심으로 긍정적인 기분을 주고 싶은데 서투른 건지가 보여서 받아들일 수 있거든요. 내가 오늘 어떻게 기분을 챙겼고 어떤 기분으로 출근했는지, 다른 이에게 전할 수 있는 마음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를 판단하고 자신을 다스리는 일이 기본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안 되어 있으면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을 정도로요.

 

“좋은 기분이란 자신을 갉아먹는 게 아니라, 자가 복제를 통해서만 나눌 수 있다.”라는 책 문장이 떠오르네요.

기분은 그대로 드러나고 계속 번지는 것이다 보니까 나와 행동이 다를 수가 없다는 의미로 쓴 거예요. 기분이라는 말 자체가 ‘기분을 나눈다’는 뜻이에요. 기분이 좋지 않은 사람은 암만 가려도 눈에 띄거든요. 그걸 가리고 있고, 가리기 위해 애쓰는지도 보여요. 반대로 기분 좋은 사람도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출 수가 없죠. 자가 복제를 하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복제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좋지 않은 걸 억지로 조작하고 속여가면서 좋은 척한다면 지속 가능하지 못해요. 그렇게 할수록 나의 상황이 점점 더 비참해지고 내일을 보장할 수 없는 접객이 되어버려요.

내가 먼저 좋은 삶을 만든 후에 직접적인 응대 방식을 고민해 볼 수 있는 건가요?

그렇죠. 그 다음에야 상대방을 살피면서 어떤 크기와 어느 정도의 또박또박함으로 말할지, 맛 추천이나 여담은 나눌 건지 등의 정의가 내려질 수 있겠죠. 상대방을 살피는 방법으로는 인사가 우선일 거예요. 정보가 없는 말인데도 굳이 하는 이유는 상태를 표현하기 위함이거든요. 상대의 인사를 듣고 나의 시작점을 설정해 보는 게 좋아요.

 

누군가는 아주 지친 상태로 결승선에 도착했을지도 모르니까요. 어느 정도 센스가 필요한 영역처럼 보여요.

사실은 굉장히 센스의 영역이죠(웃음). 근데 기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완전히 센스라고만 정의하기에는 어려운 것 같아요. 내 기분을 체크하듯 상대방 기분을 살펴보면 되거든요. 내 기분을 알아채는 센스가 없으면 삶이 힘들어져요. 나를 위해서라도 응당 갖춰야 되는 능력 아닐까요?

 

그러게요. 지금까지 듣고 보면 우리 모두를 위한 행위인데 왜 접객의 가치가 저평가되고 있을까요?

인원 감축, 재료비 절감 같은 여러 가지 상황이 얽혀 있겠지만 이런 측면도 있을 것 같아요. 우리 몸에 아주 많은 호르몬이 있죠. 엔도르핀, 아드레날린, 세로토닌 같은 호르몬이 사람에게 특정한 감정을 유발하는데 요즘엔 바야흐로 무엇의 시대죠?

 

도파민…. 맞죠?

네. 도파민이 원래는 쟁취나 성취를 해서 얻어야 되는데 현대 사회는 시각적인 자극이나 제품 소비를 통해서 쉽게 느끼곤 해요. 도파민을 사용해서 하루를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해 버리니까, 다른 호르몬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훨씬 장기적이고 건강한 기분을 잊고 사는 것 같아요. 일상 속 편안한 대화를 통해 얻는 몽글한 감정을 느낄 새도 없고 느끼고 싶어 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나 봐요.

 

나의 일상은 어땠는지 돌아보게 되는 말이네요. 접객을 받는 이의 태도도 한번 짚어보고 싶어져요.

그 부분이 가이드에는 없고 책에는 추가된 내용인데요. 손님들에게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 게 이 가게에서 인생 대부분을 누리려고 하면 안 돼요. 문 밖에 훨씬 넓은 세상과 기쁨이 있고 5.5평짜리 녹기 전에를 떠나면 본인들의 삶이 있으니까 그곳에 충실하면서 행복해지기 위한 노력을 해야지, 모든 위안을 여기에서 받으려고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자신의 삶이 어떻게 하면 즐거워질지, 기분 좋은 순간을 누리기 위해 무얼 할 건지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어요. 그 이후에 이곳에 왔을 때 늘 우리가 응대하고 싶은 손님이길 바라요.

 

가이드와 책까지 상당한 분량인데, 자신만의 또렷한 가치관과 생각을 담은 글은 술술 써지던가요?

전부터 녹기 전에가 전하는 가치에 대해 쓰려고 했지만 도무지 써지지가 않아서 포기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사람을 구해야 할 때가 왔고, 지원자에게만 정보를 요구하기보다 우리 가게가 어떤 곳인지 알려주고 싶다는 마음이 드니까 봇물 터지듯 써지더라고요. 무슨 계시받은 것처럼 춤추듯 썼거든요(웃음). 하루에 쓸 원고 분량을 정해두고 매일 아침 이 시간마다 카페에 가서 정리했어요. 응대하면서 떠오른 아이디어는 손님이 메뉴 고르실 때 메모장에 적어두고 추가했더니 총 33일이 걸리더라고요. 이 책의 첫 독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저예요.

그럼 두 번째부터 수없이 이어질 독자들에게는 어떤 책으로 닿길 바라요?

어떤 책은 저자에게 눌리기가 쉽잖아요. 글쓴이처럼 못하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좋은 기분》은 가슴 높이에서 언제든 꺼내볼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잘 모르는 이야기나 특별한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책이 아니거든요. 이미 쓴 사람만큼 알고 있는데 남의 언어로 표현된 것뿐이니까, 독자분들이 스스로 저자라고 여기면서 좋은 기분에 대해 여러 번 곱씹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녹싸 씨의 지난 시간에 대해 좀더 이야기해 보고 싶어요. 카이스트에서 전기전자를 전공하고 대기업에 들어갔지만 오래 일하진 않으셨다고요.

소설이나 철학책을 좋아하는 터라 자주 읽으면서 자신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봤어요. 그때 이미 저는 회사를 다닐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게 ‘규정’되었다고 느꼈죠. 다만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교 가고 졸업한 사람이 좋은 회사를 가면 따라오는 허울이 궁금했어요. 목적 자체가 경험이었기 때문에 대기업 두 군데를 각각 짧게 다니고 퇴사해서 창업을 준비했죠. 그때만 해도 직업을 5년에 한 번씩 바꾸겠다는 다짐이 있었는데요. 왜냐하면 죽을 때 가장 행복하고 싶은 로망이 있고 그러려면 기억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기억이 많아지려면 일상이 다채로워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직업이 많으면 되겠다는 결론에 이른 거죠.

 

재미있는 결론이에요. 꼬리 물기처럼 답을 찾아나간 거네요.

맞아요, 꼬리 물기! 어쨌든 첫 직업은 죽을 때 행복하기 위해 앞으로 일을 바꿀 거라는 의식을 담아 정하고 싶었어요. 5년마다 직업을 바꾸려면 질리지 않는 게 중요하잖아요. 질린다는 건 어떤 감각의 역치를 넘어버려 느끼는 정도가 둔화되는 거니까, 나의 역치가 높은 걸 고민해 봤어요. 그랬더니 면 요리와 아이스크림은 언제 먹어도 좋더라고요. 특히 아이스크림은 어떻게 만드는지 다들 잘 모르니까 내가 좀더 알면 남들보다 많이 아는 거겠다 싶었고요. 시간의 의미와 죽음도 상기할 수 있어서 선택했어요.

 

어떤 아이스크림을 특히 좋아했어요? 녹기 전에 말고요(웃음).

저 좋아하는 거 무지 많죠. 일상적으로 편의점에서 사 먹는 건 ‘옥동자’, ‘앤초’, ‘메로나’, ‘메가톤’이고요. 베스킨라빈스에서는 ‘엄마는 외계인’ 가장 좋아합니다.

 

그럼 ‘레인보우 샤베트’는요?

그건 절대 안 되죠.

 

왜요? 마무리로 입가심하기 딱 좋은 맛인데.

불쾌하네요. 오늘 대화는 여기까지…. 장난이에요(웃음).

 

각자의 취향을 존중해 주기로 해요(웃음). 부드러운 겉모습과 달리 아이스크림 제조에는 수학적인 방식이 필요하다고 알고 있어요.

요리는 불을 이용하니까 화학적인 과정이 많잖아요. 아이스크림 만드는 건 물리적인 과정에 가까워요. 분자 사이를 듬성듬성하게 만들고 다른 분자를 넣어서 특정한 온도의 특정한 구조로 만드는 일이라서요. 요리사가 문어로 요리를 만들겠다고 하면 당장 썰거나 볶겠지만, 제가 아이스크림을 만들 때는 종이와 펜을 쥐고 계산을 해야 해요. 그 이후에는 파우더와 재료를 섞고 얼리는 지리멸렬한 과정들이죠(웃음). 레시피도 그런 방식으로 만드는 거예요.

 

녹기 전에는 1월 한 달간 문을 닫잖아요. 그때 주로 무얼 하며 보내세요?

보통의 쉬는 날처럼 산책하고 독서하고, 목욕하고 불멍 때리곤 해요. 전부 인류가 원시시대부터 해오는 오래된 행위인데, 저는 이런 행위를 통해서 충분히 정신적인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걸 믿어요. 어디 멀리 있는 리조트에 가지 않더라도, 비싼 제품을 사지 않더라도 일상을 만족할 수 있죠. 네 가지 중에 하기 어렵거나 돈이 드는 게 거의 없거든요. 저는 3만 원짜리 욕조에 눕는 걸로 절대적인 행복을 얻고 있어요. 그렇게 한 달을 온전히 쉬고 나면 남은 11개월은 그때 떠올린 것들을 구현하면서 한 해를 보내요.

 

익숙하게 여기는 행위 이면에서 의미를 찾는 분 같아요.

끊임없이 어떤 장면에 대한 속내를 헤아려보고 싶어 하니까요.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감사합니다(웃음). 일상을 즐겁게 사는 여러 방식 중 그게 가장 쉬운 방법처럼 보여요. 무엇이든 그 이면을 상상하다 보면 무한한 세계가 있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어디가 뛰어난 게 아니라 호기심이 많은 것 같아요. 평범한 사람이고요.

이번 호에서는 먹는 일에 관한 이야기를 모아보는데요. 식사는 제때 잘 챙겨 드세요?

솔직히 어려운 부분이네요. 일할 때는 배달 음식을 자주 먹는데, 그나마 다행인 건 저는 음식을 사고의 연료로 여겨요. 맛있는 거 먹으면 감동하면서도, 더 이상 배고프지 않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거든요. 에디터님은 의식주 중에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식’이라고 생각해요.

아마 모두가 그렇지 않을까요? 자는 건 아무데서나 잘 수 있고 옷을 입지 않아도 살 수 있지만, 못 먹고는 며칠 버틸 수도 없죠. 결국 사람에게는 먹고 사는 게 극심한 문제예요. 사람이 광합성만 해도 충분하다면 저는 다 내던지고 전 세계를 돌아다닐 것 같아요. 먹는다는 건 우리한테 가장 중요한 행복이고, 의무이자 족쇄처럼 느껴져요.

 

그럼 녹싸 씨에게 먹는다는 건 허기를 채우는 것 이상으로 어떤 의미가 있나요?

음, 사람은 도넛 같은 존재라고 할까요? 의학적인 용어로 말해서 우리 입과 항문은 연결되어 있고 속은 비어 있어요. 음식물을 섭취하면 안에 두고 있는 것 같지만 음식물은 들어온 적이 없어요. 다시 나가니까요. 잠시 정류장에서 머물면서 미세한 영양소만이 남는 거예요. 몸에 있는 분자가 한 달이면 전부 교체되는데, 그렇다면 한 달 전에 먹은 불량 식품과 좋은 음식이 현재의 나를 구성하는 거겠죠? 또한 미각과 섭취에 대한 경험, 생존 본능 등이 전부 몸을 이룰 테고요. 광합성으로만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 먹는 게 나를 만든다는 생각을 해요.

 

먹는 것 중에서 특히 아이스크림은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게 되는 이유가 뭘까요?

디저트에도 단백질이나 탄수화물, 지방, 미네랄 등이 들어 있어서 적당히 먹으면 건강하고 합리적인 식품이긴 해요. 다만 좀더 일상적인 의미를 찾아보자면 디저트는 내가 가진 여유를 대변하는 것 같아요. 바쁘게 버스 타러 가는데 삼각김밥은 먹어도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서 ‘엄마는 외계인’ 달라고는 안 하잖아요. 여유를 상징하고 누리게 해주는 존재인 거죠.

 

여유를 선물하는 녹기 전에가 ‘영속적인 가게’가 되길 바란다면서요. 5년 마다 직업을 바꾸고 싶었는데 달라진 이유가 있을까요?

가끔 진지하게 죽음을 상상해 보는데, 그 후가 무서울 때가 있더라고요. 슬퍼하던 사람들도 내가 완전히 사라지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텐데 갑자기 잊히는 게 겁이 났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잊히지 않을까를 또 고민해 봤죠(웃음). 그러기 위해서는 문화적인 장치가 필요하겠더라고요. 문화는 사람의 목숨을 넘어서는 가치로 전승되어 오는 거잖아요. 그런 문화를 만들려면 직업을 계속 옮기는 게 아니라, 하나의 일에서 지긋이 발자국을 남기는 게 중요한 거죠. 게다가 8년째 같은 일을 해도 아직도 재미있으니까, 이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많이 남겨두고 싶어요.

 

아이스크림 가게를 지키는 할아버지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웃음).

그럴지도 모르지만 아닐 수도 있죠. 미래에 어떤 모습일지는 아무도 모르니까요. 다만 가끔 영화적인 상상을 하는데요. 뙤약볕 강한 여름, 할아버지가 된 제가 시골에 놀러 가서 조그마한 동네 슈퍼에 앉아 ‘월드콘’을 먹는 거예요. 그럼 옆에 모르는 꼬마가 앉아서 “할아버지, 아이스크림 좋아하세요?”라고 묻는… 상상을 해봤어요(웃음). 아이스크림을 먹는 ‘올드맨’과 ‘영보이’, 거기서 시간의 흐름과 압축에 대해 생각하면 아름답지 않을까요?

 

그때까지도 시간에 대해 더듬어 볼 모습이 눈에 선해요. 마지막으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지금 손에 한 컵의 아이스크림이 쥐여 있다면 녹기 전에 뭘 하고 싶어요?

요즘도 종종 아침에 오롯한 한 컵을 먹거든요. 오롯하다는 게 손님에게 드리는 것처럼 두 가지 맛에 맛보기 스푼을 얹어서, 다도를 즐기듯 질감을 느끼며 먹는 거예요. 저한테는 그게 가장 큰 행복 중 하나예요. 농구에서 파울이 생기면 서서 자유투 하는 거 아시죠? 치열한 경기 중처럼 공을 잡고 급하게 움직이는 게 아니라, 자유투 하듯이 컵 하나를 쥐고 곰곰이 생각하면서 먹고 싶어요. 저 혼자 오롯하게요.

이야기 매듭을 지은 후, 고대하던 결승선에 들어온 사람처럼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제 아이스크림 주문해도 되나요?” 시간과 마음을 들여 만들었다는 피스타치오와 선명한 보랏빛을 띠는 블루베리, 맛보기 스푼에는 당근 케이크 맛을 골랐다. 담뿍 채워진 나만의 컵을 쥐고 감상하다 스푼으로 조금씩 떠먹으니 적당한 단맛이 기분 좋게 흩어진다. 아이스크림이 줄어드는 대신 여유가 차오르는, 충분히 즐거운 한 컵의 시간. 바로 이 맛이지!

에디터 이명주

포토그래퍼 강현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