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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연애는 실패하기 마련이다
세상의 모든 연애는 실패하기 마련이다
홍상수의 영화를 보면 반드시 찌질한 남자들이 나온다. 그들이 내뱉는 속보이는 대사와 한심한 행동에 자주 낄낄대다가도, 영화가 끝나면 찝찝한 여운 탓에 쓴웃음을 짓게 된다. 아닌 척했지만 내 안에 숨어있던 실패의 기억을 마주한 탓이다. 홍상수 영화 속 남자들과의 공통점을 발견해가며 나는 한 가지 확신을 갖게 된다. 결국 세상의 모든 연애는 실패의 반복일 뿐이라고.
첫 번째 기억
시작은 택시로부터
<북촌방향>의 성준(유준상)은 일행과의 술자리에서 우연히 옛 애인과 닮은 여자를 만난다. 그녀는 술집 주인으로 나름의 숨겨진 사연을 가지고 있다고 전해진다. 성준은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와 이렇게 독백한다. ‘여주인이 혹시 나올까 하고 밖에 나와서 기다려봤다. 제발, 나와라.’ 그러나 그의 시그널에 답한 건 여주인이 아닌, 자신의 친한 형과 모종의 사이처럼 보이는 ‘여자 일행’이다. 여기서 그녀의 관심 어린 질문. “나는 어떤 사람 같아요?” 그러나 애인이 될 가능성이 희박한 여자에게 성준은 방어적인 태도를 보인다. “내가 관상쟁이도 아닌데요, 뭐.” 그러나 곧이어 여지를 남기는 애매한 대사를 읊는다. “관심이 있습니다. 정말 좋은 사람 같아요(내 스타일은 아니지만 걸리면 좋고, 아님 말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성준은 다시 한 번 담배를 피우러 나온다. 이번에는 여주인이 밖으로 나온다. “전 만두 사러 가요.”, “혼자 가세요? 같이 가요.” 둘은 함께 만두를 사고, 술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키스를 한다(홍상수 영화의 키스 신은 대개 난데없이 이뤄진다). 그리고 동튼 새벽, 눈발이 날리는 거리에서 술에 취한 일행을 모두 보낸 채 마지막으로 남게 된다.
나는 ‘K(사생활 보호를 위해 이니셜을 사용합니다)’라는 남자를 기억한다. 그 역시 성준과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 낯선 사람들과의 술자리에서 한 여자가 마음에 들었고, 그녀에게 끊임없는 신호를 보낸다. ‘내 옆에 앉아라. 제발, 앉아라.’ 그러나 상황이 여의치 않자 화장실에 가 오랫동안 자리로 돌아가지 않는다. 마침 여자가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왔고,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건다. “집이 어디예요? 상수? 우와, 되게 가깝다. 우리는 마포 주민!” 하이파이브를 한다. 마침 몇 명의 마포 주민이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운다. “그럼 우리 동네 친구들끼리 단톡방 하나 만들까요?” 자연스럽게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자리로 돌아가 앉는다. 그 후로 K는 그녀와 더 자주 눈을 마주치게 된다. 술자리가 파하고, K는 기어코 모든 사람들을 택시에 태워 보낸 후 마지막으로 여자와 둘이 남게 된다. K의 집을 잘 아는 친구가 택시 창문을 내리며 소리친다. “너 집 그쪽 아니잖아.” 그러자 K가 말한다. “아니야, 나 이사했어.” 그게 말이야, 방구야.
두 번째 기억
착한 아이 증후군
<옥희의 영화>의 진구(이선균)는 전형적인 모태 솔로 캐릭터다. 막무가내로 떼쓰고 징징대고 사랑을 구걸한다. 가방에 든 소주를 꺼내 마시며, 맥락도 없이 고백한다. “(옥희야) 난 너만 보인다. 이런 느낌 처음이야. 널 사랑해. 너무 안고 싶어. 널 너무 그냥 꽉 안고 싶어. 너 너무 예뻐 진짜”, “나 안 예쁜데, 네가 또라이라서 그런 거야.” 둘은 키스를 한다(역시). 진구는 간절한 눈빛으로 이렇게 말한다. “나 정말 처음이야. 나 너 사랑해도 되지.” ‘처음’이라는 말로 순수를 증명하려는 듯, 진구는 끊임없이 자신의 ‘첫’을 어필한다. 그러나 연애에 있어 과한 순수는 자칫 집착이 된다. 그건 상대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는 구멍이 되기도 한다. 옥희(정유미)의 집 앞에서 밤샘 기다림 끝에 사랑을 나누게 된 두 사람의 대화. 옥희가 말한다. “난 네가 착해서 좋다. 넌 착해.” 그러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진구가 답한다. “착할게.”
여기서 다시 K라는 남자를 소환해보자. 그는 오랜 연애 공백 끝에 한 여자를 만난다. 이제껏 만나온 여자들과는 아주 다른 성향이다. 그녀는 소주보다는 와인을, 영화보다는 오케스트라를, 고기보다는 채소를 더 즐긴다. 감정의 기복이 없어 K가 무엇을 준비하든 크게 웃거나 화내지 않는다. 지나가듯 그녀가 말한다. “넌 차분해서 좋아.” K는 곰곰이 생각한다. ‘내가?’ 삼겹살과 소주를 즐기고, 시끄러운 음악에 늘 취해있는 K로서는 그녀의 평가가 의아하다. 하지만 곧 생각을 고친다. ‘나는 차분한 성격이야. 그래, 차분할게.’ 결과적으로 둘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K는 온몸에 압박붕대를 감은 듯 부자연스럽게 행동했고, 그녀는 K를 떠난다. ‘착한 아이 증후군’은 타인에게 착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자신의 욕구나 소망을 억압하는 행위를 말한다. 아이를 착하게 만드는 것은 단순한 칭찬 하나에서 비롯된다. 그러니까 그녀가 좋은 이유를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K에게 사랑은 강박이 되는 것이다.
세 번째 기억
그 남자의 착각
<우리 선희>에는 세 남자가 등장한다. 선희(정유미)가 자신을 일부러 찾아왔다고 믿는 전 남자친구 문수(이선균), 선희에게 평생 네 편이 되어주겠다며 설레하는 동현(김상중), 오도 가도 못 하고 선희 주변만 맴도는 재학(정재영). 세 사람에게 선희는 ‘우리’ 선희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만의 선희를 추억한다. 단순히 보면 선희는 여우다. 세 명의 남자에게 먼저 술을 먹자고 한 것도 선희, 술에 취해 먼저 스킨십을 한 것도 선희, 원하는 것을 얻고 난 후에 뜨뜻미지근한 태도를 보이는 것 역시 선희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선희는 그들에게 ‘우리 선희’가 될 생각이 애초에 없던 것은 아닐까. ‘누구의 것도 아닌’ 선희를 판단하고 훈수 둔 것은 전적으로 남자들의 자발적인 선택이었다. 그들은 아마도 자기가 선희를 가졌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러나 영화 말미에 그토록 원하던 선희는 없고, 세 얼간이는 한결같이 바보 같은 표정으로 선희를 추억하고 있다.
K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한 여자를 만나 호감을 느낀다. 둘은 자주 만나 데이트한다. 여자는 감수성이 풍부한 편이다. 별이나 달, 길거리에 버려진 것들을 오래 바라보는 습관이 있다. K는 여자의 그런 모습이 좋다. 그녀는 먼 도시에서 갓 상경한 상태로, 낯선 곳에 적응하기까지 많은 도움이 필요해 보인다. 이건 이렇게, 또 저건 저렇게, K는 자신의 방식대로 그녀를 코치한다. 그러던 어느 날 K와 여자는 다른 이들과 술을 마시게 된다. 당연히 그녀의 옆자리는 K의 차지다. 몇몇 남자들이 그녀에게 농담을 건넸으나 K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그녀에게서 연락이 뜸해진다.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요?”, “저 남자친구 생겼어요.”, “네? 그럼 우리는요?” 남자는 배신과 분노, 절망의 트라이앵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여자의 마지막 문자에 남자는 조용히 마음을 접기로 한다. “우리가 언제 사귀자고 했던가요?”
네 번째 기억
매일을 처음처럼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의 영수(김주혁)는 소문에 민감하다. 여자친구 민정(이유영)이 술을 먹고 소란을 피웠다는 얘기를 듣고 그녀를 채근한다. “너 왜 나한테 거짓말하니? 정말 네가 술을 끊든지 헤어지든지 결단을 내자.”, “내가 술 먹고 다닌다고 누가 그래요?”, “그냥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그래.”, “누구긴 누구겠어. 당신 친구들이겠지. 가서 그 사람들하고 살아요.”, “너 술이 그렇게 좋냐? 아무 새끼하고나 술 먹고 뽀뽀하고, 그러니까 좋냐?”, “그냥 선택을 하세요. 내 말은 하나도 안 믿을 거면서 왜 나를 사랑한다고 그래요?” 민정은 당분간 시간을 갖자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영수는 민정을 찾기 위해 온 동네를 뒤진다. 심지어 앉은 자리에서 꿈도 꾼다. 하지만 도통 그녀는 보이지 않고, 친구들은 오히려 그녀가 다른 사람을 만나고 다닌다며 비난한다. “자기들은 민정이를 너무 몰라. 이해를 못 하는 거 같아. 내가 직접 본 게 아니잖아. 내가 그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의심했다고.” 우여곡절 끝에 영수는 길거리에서 울고 있는 민정을 만난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은 민정이 아니라고 말한다. “저를 아세요?” 믿을 수 없지만 그녀를 만나야 했기에 영수는 기꺼이 대답한다. “(난 너를 잘 몰라) 다 말해줘, 너의 모든 걸. 자신 없지만 그래도 해볼게.”
K에게는 아주 오래 만난 여자친구가 있다. 오래 만나 모든 걸 안다고 생각하던 여자. 그래서 더는 흥미롭지 않은 사람. 딱히 헤어질 이유도, 만날 이유도 없었기에, 둘은 헤어지기로 한다. 한참을 떨어져 각자의 삶을 살던 어느 날 K는 친구한테 그녀의 소식을 듣게 된다. 그녀가 오래 앓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외국으로 떠났다는 것. “오래 앓던 병? 얼마나?”, “선천성이라는데?” K는 부랴부랴 전화를 걸지만 그녀의 번호는 사라진 지 오래다. K는 그녀 가족의 번호조차 알지 못한다. ‘저를 얼마나 아세요?’ K는 그제야 자신이 아무것도 몰랐다는 사실 하나를 분명히 알게 된다.
다섯 번째 기억
사랑의 이유
<자유의 언덕>의 모리(카세 료)는 한때 자신이 사랑하던 여자를 찾아 한국에 머물고 있다. 그는 그녀에게 몇 장의 편지를 남기는데, 하필 편지가 뒤섞이는 바람에 여자는 인과를 알 수 없는 모리의 행적을 천천히 재조립할 수밖에 없다. 꿈처럼 뒤섞인 영화의 흐름 속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의외로 게스트하우스 주인 구옥(윤여정)과 모리의 대화 부분이다. “난 보통은 일본 사람들 좋아해요. 굉장히 착하고, 예의가 있고, 깨끗해서요.” 구옥이 말하자 모리가 대답한다. “하지만 예의 있고 깨끗한 건, 그냥 그것일 뿐이죠. 그걸로 사람을 사랑하거나 존경하게 되지는 않죠.”
K는 이제껏 모든 연애에 실패했다. 그 말은 곧 ‘성공한 연애는 없다’라는 말로 바꿔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시작은 했으나 늘 헤어졌고, 헤어지고 있으며, 언젠가 헤어질 거라는 전제가 있기에 가능한 말이다. 이별의 순간을 다만 유예할 뿐이다. K는 헤어짐이 두려워 시작조차 꺼린다. K에게는 당장 사랑할 수 없는 이유들이 사랑해야 할 당위보다 크다. 하지만 사랑은 인과에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다. 네가 착하고, 예의 있고, 깨끗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사랑에 어울리는 수식은 ‘잘 모르겠다’는 말 하나면 충분하지 않을까?” 내 말에 K는 조금 망설인다. 애초에 알 수 없는 것, 이를테면 우주나 유령, 신에게 존재 이유를 물을 수 없듯이 사랑도 다만 거기에 있을 뿐이라는 걸 K가 알았으면 좋겠다. 때때로 현실보다 더 현실 같아서, 차마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처절하고 찌질해서 응원하기 민망하던 모든 홍상수의 남자, 그리고 세상의 모든 실패한 K들에게, 좀 더 열심히 사랑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사랑은 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기 마련이기에.
서울,
홍상수 여행을 하며
함께 들른 곳
01 정독도서관
<북촌방향>의 성준이 영호에게 자신의 옛사랑을 이야기하던 곳으로, 1977년 옛 경기고등학교 자리에 개관한 도서관이다. 일반 도서 열람뿐 아니라 강연과 음악회 등 다양한 행사를 진행한다. 서울의 숨겨진 벚꽃 명소로도 유명하다.
A. 서울시 종로구 북촌로5길 48
H. jdlib.sen.go.kr
T. 02 2011 5799
O. 08:00~22:00, 첫째, 셋째 수요일 휴관
02 아차산 생태공원
<옥희의 영화>에서 옥희가 젊은 사람과 나이든 사람을 번갈아 만나 등반한 곳이다. 아차산은 해발 295미터의 아담한 산으로 고구려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전설로도 유명하다. 다양한 등산 코스와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다.
A. 서울시 광진구 광장동 370-2
H. gwangjin.go.kr/achasan
T. 02 450 1192
O. 연중무휴
03 창경궁
장식이 아름다운 돌다리 ‘옥천교’와 국보 제 226호 ‘명정전’, 영화 속 배경 ‘춘당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 ‘대온실’ 등이 특히 아름답다. 매월 셋째 주, 넷째 주에는 야간 특별관람을 진행한다.
A. 서울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H. cgg.cha.go.kr
T. 02 762 4868
O. 화~일 09:00~18:00, 월요일 휴궁
04 아리랑
<우리 선희>에 등장하는 술집으로, 연극배우이자 만요漫謠 가수인 최은진 씨가 운영하는 문화공간이다. 그날 그날 주인의 기분에 따라 안주를 만들어준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고향’이라는 만요 역시 최은진 씨의 작품이다.
A. 서울시 종로구 북촌로1길 17
T. 010 6341 0232
O. 월~토 저녁(대중없음), 일요일 휴무
05 민생 멸치다시 국수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에서 ‘황태구이집’으로 불리던 실내 포장마차로 날이 좋으면 길에 테이블을 펴고 술을 마실 수 있다. 멸치국수를 비롯한 다양한 안주를 취급한다. 연남동과 연희동 사이 굴다리에 있어 자칫 지나치기 쉽다.
A.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맛로 1-10
T. 010 5591 4452
O. 매일 11:00~02:00
06 휴안게스트하우스
<자유의 언덕>에서 모리가 머물던 한옥 게스트하우스다. 여섯 개의 방과 작은 앞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북촌 골목에 있어 찾기가 어려울 수 있으나 그만큼 조용하게 쉴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A. 서울시 종로구 북촌로6길 32-1
T. 02 745 6638
에디터·포토그래퍼 김건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