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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옥빌딩
삼옥빌딩을 알게 된 건 우연이었다. 좋아하는 일러스트레이터가 하루 동안 자신의 작업실을 공개하는 ‘삼옥 오픈 스튜디오’를 여는데 같은 빌딩에 머무는 작업자 여럿도 함께한다고 했다. 느슨한 형태의 전시를 위해 작업물과 공간을 보기 좋게 정리하고, 오는 이가 허기지지 않도록 맛있는 간식도 준비한단다. 온전히 개인적인 작업실을 열어두는 이 특별한 하루를 작업자들이 자발적으로 준비했다니. 호기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결국 그들의 삼옥빌딩으로 찾아가기에 이르렀다. 회현역과 시청역 사이 그 어디, 풍채가 큰 한국은행을 꼿꼿이 마주 보고 서 있는 삼옥빌딩은 1961년 준공되었고, 미색 외벽에 단정한 창문이 아름답다. 전면 창이 측면을 살짝 감싸고 있는데 창틀뿐 아니라 층을 구분하는 선까지 모두 검정색으로 칠했다. 창문에는 저마다 바쁜 작업자들이 언뜻 비친다. 3층의 예성 ENG와 6층의 원형들, 7층의 아티스트 오유우와 8층의 일러스트레이터 렐리시까지, 호기심이 많은 낯선 사람을 위해 한 번 더 작업실의 문을 열어주었다. 직장인들이 점심 먹으러 삼삼오오 거니는 골목 한편, 우연히 모인 작업자들이 어떤 세상을 만들어 두었을지 부푼 마음을 안고 문고리를 돌린다.
:: 601호 ::
원형들·타일즈
박용준·김지나
솔직히 털어두자면 601호로 향하는 걸음마다 물음표가 따라왔다. ‘원형들’은 독특하고 매력적인 디저트를 만드는 카페인데 왜 작업실이 여기에 있을까. 내색하지 않으며 열린 문 앞에 섰는데, 천 조각에 통통하게 솜을 채워 ‘타일즈Tiles’라는 글자를 만들어 두었다. 이건 또 뭐지? 뭉게뭉게 피어나는 궁금증을 안고 인사하니, 두 명의 대표가 미소를 띠며 마중한다. 그리고 잔잔한 목소리로 이어지는 대화 중에 깨달았다. 원형들의 일원이자 머지않아 탄생할 브랜드 ‘타일즈’의 캐릭터를 채워나가는 박용준, 김지나 대표는 지금 경계를 긋는 중이란 걸.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어요. 원형들과 타일즈는 어떻게 다른 건가요?
용준 반갑습니다. 흔히 알고 계시는 카페 ‘원형들’과는 다른 모습일 텐데요. 원형들이라는 큰 팀에서 다른 플레이를 하기 위해 분리된 팀이라고 생각하시면 편할 것 같아요. 올해 타일즈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브랜드를 준비하고 있어요. 의류나 리빙 굿즈, 패션 아이템들로 예상하고 지금은 한창 작업에 몰두하는 시기입니다.
지나 원형들의 팀원들이 하고 싶은 분야가 굉장히 많은데, 그 이름 안에서는 이미지가 고정되어 있더라고요. 디저트나 카페처럼요. 그걸 과감히 지우고 해보고 싶은 걸 시도하기 위해 작업실을 꾸렸어요.
그래서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군요. 이름의 의미가 궁금해요.
용준 자유롭게 의견을 던지다 나온 이름이에요. 처음에는 인테리어 업체 같다는 피드백도 있었지만, 가장 첫 번째로 제시된 거라 쓰다 보니 익숙해지더라고요(웃음). 전체 개념은 ‘타일즈 하우스’라고 정해두었어요. 집 안에서 보고 쓰고 입을 수 있는 것들을 다뤄보려고요.
두 분은 원래 원형들에서는 어떤 작업을 하셨어요?
지나 베이커라고 부르는데요. 지금도 디저트 디자인과 케이터링 일을 담당하고 있어요. 원형들이라는 브랜드의 비주얼 디렉티브나 미장센을 다루는 작업이에요.
용준 저는 브랜드 운영과 외부 협업 등을 관리하고 있어요. 원형들은 베이커가 중심에 서 있고 조형물이나 영상 콘텐츠, 타일즈처럼 서브 프로젝트 등을 진행하는 크루들로 구성되어 있어요.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일하지는 않아도 프로젝트 단위로 모였다가 헤어지기도 하는 방식으로 작업에 맞춰 일하고 있습니다.
원형들의 작업에 대해서도 살짝 듣고 싶어요. 그간 고수나 버섯, 콩, 허브 등을 활용한 케이크를 선보였는데요. 색깔도 디저트에서 보기 힘들던 초록, 파랑, 노랑처럼 다채롭죠. 아는 재료를 낯설게 느끼도록 만드는 이유가 뭘까 궁금했어요.
지나 원형들 보다 충무로의 ‘섬광’이라는 카페를 먼저 오픈하고 운영했어요. 섬광이 많은 분들께 사랑받았으니, 이번에는 독특한 걸 해보자는 마음으로 가볍게 시작했던 거죠. 세상에 없는 우리 걸 만들고 웹에 콘텐츠를 남기고 싶었기 때문에 모양과 재료도 전부 낯선 방식을 선택한 거고요. 사실 지금처럼 일이 쏟아지는 브랜드가 될 거라고는 저희도 예상하지 못 했던 것 같아요. 무척 감사하죠. 이제는 와주시는 분들이 무얼 원할까를 고민하면서 구상하기도 해요. 계절감을 충분히 살리고 싶어서 겨울이면 딸기에다가 바질이나 유자를 섞어볼까, 그때만 나오는 잼이나 꽃이 있다면 얹어볼까, 아이디어를 쏟아내 보고요. 달마다 케이크를 작업하기 때문에 아이디어도, 고객 반응도 틈틈히 수집해 둬요. 주로 핑크색을 좋아하시더라고요(웃음).
신기하네요. 그럼 이번에는 타일즈를 향해 가벼운 마음으로 나아가 보는 거군요.
용준 맞아요. 바꿔말하면 무모한 마음인데(웃음)…. 오프라인의 단점이 직접 찾아주지 않으면 소비되지 않는 거라서 그 통로 말고 다른 길도 보고 싶어요. 창의적인 친구들이 힘을 한번 써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 같아요. 그래, 딱 1년만 해볼까? 이런 태도로요. 무엇이든 수명이 있다고 보거든요. 우리가 경계를 친 구역 안에서 언제까지나 새로운 걸 보여주기는 힘들 테니까, 수명을 조금이라도 더 늘리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영역을 그대로 두되 다른 영역을 파보는 거죠.
지나 막상 타일즈를 오픈할 때가 되면 지금과는 또 다른 모습이 되어 있을지도 몰라요.
그럼 삼옥빌딩에는 언제 들어온 거예요?
지나 여기 의자와 테이블에 앉아 있게 된 건… 3개월 정도 됐네요.
일단 오늘 만나는 분들 중에서는 가장 짧게 계셨어요(웃음). 여길 선택한 이유가 있어요?
지나 7층 오유우 작가에게 소개받았어요. 다른 분들도 소개로 들어오시기도 하더라고요. 오우유 작가는 원래 아는 사이였는데 삼옥빌딩에 한번 와보면 반할 거라고 했어요. 정말로 창문이 너무 예쁘던데요? 창이 크니까 바깥 풍경도 잘 보여서 좋아요. 지리적인 이점도 물론이고요.
용준 그리고 한국은행이 앞에 있다는 것도 기분이 좋아.
지나 맞아. 다만 엘리베이터가… 조금 작아요.
삼옥 오픈 스튜디오는 작년에 처음 참여했잖아요. 무얼 준비했어요?
용준 워낙 바쁜 시기라 준비가 어려웠는데, 삼옥빌딩 동료 작업자분들이 저희 몫까지 힘을 많이 써주셨어요. 정말 감사했죠. 작년 행사가 열릴 때쯤에 여기가 텅 비어 있었거든요. 저희는 이곳이 과연 작업실로 보일지 걱정돼서, 그냥 이사 온 콘셉트로 모든 짐에 하얀 천을 감쌌어요. 짐을 아직 안 푼 것처럼요. 그리고 원형들의 디저트들을 가져다 놓고요.
원형들답게 잘 풀어낸 것 같은데요? 한편으로 일상의 공간과 작업의 공간이 나눠져 있는 건 어떤지 궁금해요.
용준 아이디어나 공상, 생각은 어디서든 할 수 있는데 그걸 실천할 공간이 작업자들에게 필요해요. 그래서 집과 작업실이 분리되는 게 좋고요. 그런데 가만 보니 게으른 사람들만 그런가 봐요.
지나 맞아요(웃음).
오늘 만나는 삼옥빌딩 작업자들에게 똑같은 질문 하나를 던지려고요. 삼옥빌딩은 네모다! 네모를 채워주세요.
용준 인큐베이터 같은 공간이라고 생각해요. 밖에서는 잘 안 보여도 이 안에서는 열심히 성장하고 생산하고 있거든요. 동료 작업자들이 아니라면 우리가 이 안에서 무얼 하는지 모르시는 분들도 많을 거예요. 여기서 잘 준비해서 올해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어요.
:: 802호 ::
일러스트레이터
렐리시
작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동그란 버튼 중 ‘8’을 눌렀다. 꽤 높구나, 생각하는 순간 문이 열리고 복도가 드러났다. 어느 한 작업실의 열린 문틈 사이로 빛이 쏟아진다. 일러스트레이터 렐리시의 공간임을 확신하고 들어서니 빛뿐만 아니라 온갖 색이 경쾌한 춤을 춘다. 그 사이에서 환한 미소를 짓는 렐리시 작가는 우리를 반기며 자리를 내어줬다. 잠시만, 도대체 어떻게 공간과 사람이 이렇게 똑 닮을 수가 있지? 하나의 사람은 이 공간에 애정을 담뿍 담았음을, 하나의 공간은 이 사람을 통해 완성됐음이 분명하다.
반가워요. 삼옥빌딩이 8층까지 있는 줄 몰랐어요.
안녕하세요! 렐리시라고 합니다. 위층에 건물 대표님이 쓰는 공간과 작은 옥상 정원이 있어요. 아마 오늘 만나는 분들 중에 제가 제일 높은 층이겠네요. 오래전에 지어진 곳이라 4층이 없어서 저는 7층에 지내는 셈이죠. 이곳에 온 지는 2년 정도 되었고요. 이전에는 작업실 하나를 친구랑 함께 썼는데, 그 친구는 ‘블랙 앤 화이트’를, 저는 ‘컬러풀’을 좋아했어요. 서로의 색깔을 잃어간다며 우스갯소리를 하다가 삼옥빌딩에 첫 개인 작업실을 꾸리기로 마음먹고 들어왔죠.
그래서인지 컬러풀한 그림과 오브제가 눈에 띄어요.
개인 공간이고 외부 미팅도 여기서 하다 보니 작업물을 많이 드러내는 방식으로 꾸미고 싶었어요. 친구와 함께 쓰던 책상이나 수납장, 책장 등을 받아서 작업물을 전시하는 데 썼고요. 전자레인지도 있어요. 다들 혼자 쓰는데 가구가 너무 많지 않냐고 물어보는데, 저는 부족하던데요(웃음)? ‘맥시멀리스트의 꿈이 담긴 작업실’이라고 소개하기도 해요. 콘센트가 달린 벽면이 하나라 그쪽에서 디지털 작업을 하고, 원화 작업은 창가 앞에 이젤과 도구를 늘어두고 사용해요.
그러고 보니 이름의 의미가 궁금해요.
본명이 ‘김은정’인데 흔한 이름이라 작업할 때는 쓰고 싶지 않았어요. 친언니가 영화나 드라마 혹은 일상에서 무심코 발견한 영어 단어들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는데요. ‘렐리시Relish’가 저랑 어울릴 것 같대요. ‘즐기다’라는 말로도 쓰인다면서요. 작업할 땐 무엇이든 즐기자는 마음으로 고른 이름이에요.
작품에서 ‘알록달록하고 큰 친구’를 자주 봤어요.
애칭처럼 ‘빅 걸’이라고 불러요. 제가 일상적인 행동 하나를 하더라도 동작이 큰 편이거든요. 방금처럼 드립백을 터뜨린다던가 포토그래퍼님을 친다든가요. ‘세상은 나한테 좁다.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자!’라는 마음으로 크고 우당탕하는 느낌의 작업물이 많아진 것 같아요.
그림 그릴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있다면요?
작업할 때는 성숙해지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해요. 철없이 살아야 유쾌함을 잃지 않을 테니까요. 저는 일상에서 블랙 코미디 같은 순간이 재밌더라고요. 더운 날에 무거운 짐을 잔뜩 들고 걷는 내가 유리창에 비칠 때처럼, 누군가에겐 부정적일지 모르는 순간을 유쾌하게 바꾸고 싶어요.
이런 사적이고 온전한 공간이 존재한다는 게 작업자에게는 어떤 의미일까요?
나를 굳이 설명하거나 누군가를 설득하지 않아도 공간에서부터 나라는 사람이 드러나요. 나만의 작업이 탄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 같기도 해요.
수많은 작업실 중 삼옥빌딩을 고른 이유가 뭐예요?
먼저 입주한 701호 오유우 작가와 친한 사이라 삼옥빌딩을 알고 있었어요. 교통편도 아주 좋고 비용도 합리적이고 채광도 뛰어나더라고요. 가끔씩 놀러 올 때 좋아 보였는데 마침 개인 작업실을 찾고 있으니 남은 곳 없는지 물어봤거든요. 건물 대표님께 확인해 보니 바로 전날, 빈 작업실이 계약됐대요. 아쉬운 맘으로 고민하며 보내는데 며칠 뒤에 다시 전화가 왔어요. 입주 일정이 맞지 않아서 계약이 파기되었으니 들어와도 좋다고요. 뛸 듯이 기뻤죠.
타이밍이 아주 잘 맞았네요. 삼옥빌딩의 특징을 소개해 주실래요?
혹시 바깥에서 창문 보셨어요? 되게 예쁜데 사실 안쪽에 창문이 따로 달려 있어요. 바깥에 달린 건 옛날에 만들어진 거라 유리를 갈기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아예 제거하기에는 빌딩이 가진 매력이 사라져버릴 테니, 겉은 두고 안에 새로 만든 거예요. 층고가 높은 것도 특징이에요. 8층은 위층이 옥상이라 조금 낮춘 건데, 아마 다른 층에 가보시면 바로 느껴질 거예요. 그래서 조금 춥고요(웃음).
작가님이 ‘삼옥 오픈 스튜디오’ 첫 문을 열었다고요.
저와 오유우 작가, 옆방인 801호를 쓰는 포토그래퍼 박하림 작가 셋이서 처음 삼옥 오픈 스튜디오 1회를 열었어요. 사실 그때는 오유우 작가를 제외하곤 삼옥빌딩 작업실을 쓰지 않았어요. 개인 작업자에게는 전시나 페어 등에 참여하는 게 굉장한 에너지와 노력이 필요한데요. 그것보다는 좀더 캐주얼한 느낌으로 우리만의 전시를 하고 싶었어요. 마침 오유우 작가의 작업실이 함께 쓸 만하고 ‘삼옥’이라는 이름도 예뻐서 가볍게 시작했던 거죠. 사진 찍고 포스터 만들고 공간 구성하고 무료 전시지만 간단한 다과도 차리고요. 다시 생각해도 너무 재밌었어요. ‘다음 해에 또 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그사이에 저와 박하림 작가도 삼옥빌딩에 입주하게 됐어요.
삼옥빌딩이 작업자들을 끌어당겼네요?
그런가 봐요(웃음). 1회를 본 301호의 이예주 디자이너와 가까워져서, 2회에는 네 명이 3층에 라운지도 만들었어요. 작년에 열린 3회에는 더 많은 삼옥빌딩의 작업자들이 참여해 주셨고요. 라운지에서 와인 팝업을 열고 스몰 디시와 내추럴 와인을 나눠 마시기도 했죠. 사실 시작부터 큰 목적을 가진 게 아니기 때문에 규모가 점점 커지는 게 걱정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서로 도우면서 재미있게 하고 있어요.
매년 추억이 쌓여갈 때마다 보람도 크겠어요.
맞아요. 외부에서 삼옥빌딩 내부 작업자들을 더욱 가까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니까 일로 연결되기도 하고, 오시는 분들 덕분에 마음의 에너지를 얻기도 해요. 개별적이고 경계가 뚜렷해 보이는 작업자들이 하나로 모여 재미난 이벤트를 하는 곳에 내가 있다, 이런 자부심도 들고요.
다양한 분야의 작업자들이 모여 있기에, 끈끈한 사이가 될 것 같아요.
좋은 작업이 보이면 ‘나도 더 열심히 해야지!’ 하면서 분발해요. 아마 동료들이 없었다면 이 화려한 명동 하늘 아래, 너무 외롭고 심심했을 거예요.
삼옥빌딩 작업자분들께 공통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 답해주실래요? 삼옥빌딩은 네모다!
저 이런 거 되게 약하거든요. (웃으며 잠시 고민한다.) 삼옥빌딩은… 마을이다.
:: 301호 ::
예성 ENG
이예주
3층으로 내려오니 복도 창밖 풍경이 사뭇 다르다. 이곳은 디자이너 이예주가 이끄는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예성 ENG. 작업실의 문고리를 잡아 부드럽게 밀어보니, 가장 먼저 둥글고도 뾰족한 그의 작업물이 보인다. 어릴 때 쓰던 모양 자 같기도, 다 쓴 스티커의 흔적 같기도 한 모습은 낯설지 않지만 새롭다. 질서 정연하게 정리되어 있는 책장 너머로 작업실을 둘러보다 이예주 작가가 내어준 차 한 잔에 목을 축였다. 이곳에는 또 어떤 세계가 흐를까..
예성 ENG는 어떤 일을 하고 있어요?
문화와 예술을 기반으로 비주얼을 다루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도서 디자인과 브랜딩, 전시, 공간 디렉팅 등 그래픽 디자인이 주도하거나 스며들 만한 분야라면 다양한 작업을 시도하죠. 제 이름의 ‘밝을 예叡’와 ‘이룰 성成’을 조합했고요. ‘ENG’는 엔지니어링의 약자로 사용했는데요. 그 단어의 어원인 엔진이 ‘발명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어요. 우리 브랜드가 책뿐만이 아니라 아이템이나 공간 기획 등에서도 빛을 발한다는 바람을 담은 거예요. 일을 시작한 지는 8년 차 정도 되었네요.
건네주신 명함을 봤는데, 명함마다 뒷면 색이 전부 다르더라고요.
맞아요. 그것 역시 다양한 분야에 경계를 두지 않겠다는 마음을 표현한 거죠. 시도라는 느낌과 닮은 비비드한 컬러를 사용했어요.
이예주 작가님을 《19호실로부터》, 《자아, 예술가, 엄마》의 디자이너로 알고 있어요.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작업하는 이유가 궁금해요.
기질의 문제인 것 같아요. 저는 공간을 확장할 수 있는 그래픽 요소를 제작하는 일을 되게 좋아해요. 예를 들어 평면에서 시작한 작업물이 오브제로, 사물로 옮겨 갔다가 과거나 미래와 연결 지어 새로운 의미를 끌어낼 수도 있겠죠. 구조를 연결하는 방식과 결과물을 상상하고 실현하는 과정을 오랫동안 즐겼어요.
모양 자와 비슷한 구조물들도 그 결과물인가요?
맞아요. 제가 파주 타이포그라피 학교 1회 졸업생이에요. 거길 졸업하고 나서 5년 정도 충무로에 있는 작업실을 다른 동료들이랑 함께 썼거든요. 주변에 인쇄소가 아주 많았는데, 인쇄 후 가공 중 하나인 ‘도무송’이라고 특정한 모양의 접착 부분을 도려내면 파지가 발생하는 방식이 있어요. 파지의 모양이 매력적으로 와닿아서, 이리저리 활용해 보며 개인 프로젝트를 진행했죠. 프로젝트 내용이 책으로 옮겨진 후에는 여러 전문가들과 함께 카펫이나 가구 디자인에 녹여 보기도 하고, 스틸 소재의 오브제로 만들어 보기도 했고요. 지금은 사람들이 시도해 볼 수 있는 워크숍의 구조로도 구상하고 있어요.
일상의 경험에서 아이디어가 발현됐네요.
작업 환경에서 볼 수 있는 일상의 풍경을 의미있게 생각해요. 충무로 작업실을 사용할 때 주변 풍경에서 볼 수 있는 인쇄소 등 일상의 이미지를 중요하게 여긴 것처럼요. 이 파지에 푹 빠지는 바람에 프로젝트 초반까지는 온갖 파지를 수집했어요. 인쇄소 찾아가서 특이한 모양이 나왔나 기다리고요. 여기 있는 하트처럼요(웃음). 평면 소재여도 신체에 대입해 보면 언어가 훨씬 풍부해지기도 해요. 주요한 개념이 발현되는 채널은 계속 달라지지만 보는 이들에게 어렵지 않은 구조로 다가가고 싶어요.
그럼 이 작업실에서 작가님께 필수적인 도구를 하나 꼽아본다면요?
(잠시 고민한다.) 근원적인 매체는 손이라고 생각해요. 종이를 오리고 덧붙이고 콜라주를 하면서 확장이 되어가는 모든 과정에 손이 필요하니까요. 그 과정에서 상상력을 약간 더해주고요.
작업할 때 지키는 신조나 중심 같은 것도 있을까요?
호기심이나 즐거움이요. 어떤 마음으로든 일단 프로젝트를 시작했다면 이상하게 책임감이 생기더라고요. 개인 작업은 클라이언트나 마감도 없고 누구한테 허락받을 필요도 없는데요. 그래서 스스로 만족하는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신중한 태도로 작업에 임해요. 또 일하는 공간과 쉬는 공간을 확실히 구분해요. 예전에는 작업용 컴퓨터를 집에 가져간 적도 있는데, 작업과 휴식 어느 하나도 챙기지를 못하더라고요. 작업실은 몰입할 수 있는 곳으로 두고 집에서는 완벽히 휴식해요. 운동도 꾸준히 하며 체력을 기르는 것도 건강하게 일하기 위한 저의 원칙이에요.
삼옥빌딩과 작업실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싶어요. 이곳에서 가장 오래 지낸 작업자라고 들었어요. 삼옥빌딩은 어떤 이유로 선택했어요?
올해로 4년 차가 되었는데요. 동료들과 다 함께 쓰던 작업실에서 나와 저만의 작업에 몰두하고 싶었어요. 그때는 졸업하자마자 세 명이서 한방을 썼으니까 학교나 작업실이나 공간의 느낌이 별반 다르지 않았거든요. 보다 전문적이고 진지한 태도로, 예성 ENG라는 하나의 이름을 쓸 수 있는 작업실을 원했어요. 아티스트 프루프 최경주 작가가 이곳을 소개해 줘서 흔쾌히 들어왔죠. 먼저 높은 층들을 보고 오셔서 느껴질 텐데, 여기는 저층이라 바깥 풍경이나 걷는 사람들이 잘 보여요. 그래서 저는 창문에 커튼을 달아두는 게 집중이 훨씬 잘되더라고요. 고층으로도 한번… 가보고 싶네요(웃음).
(웃음) 그런데 가만 보니, 삼옥빌딩은 작업자가 또 다른 작업자를 이끌어주며 채워진 곳 같아요. 이 공간만의 매력이 뚜렷한가 봐요.
공간 자체에 밝고 좋은 에너지가 가득하기 때문 아닐까요? 그리고 바로 곁에 좋은 동료들이 함께하고요. 각자의 영역에서 뚜렷하게 일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프로젝트마다 협업하는 것도 재밌어요. 같이 만나서 즐겁게 차 마시고 밥 먹다가, 작업할 때는 누구보다 프로페셔널한 자세로 임하는 동료들이에요.
작업실이라는 공간의 새로운 면모를 삼옥빌딩 작업자분들이 보여주고 있네요.
그렇게 봐주시니 기뻐요. 올해에는 다들 더 잘되면 좋겠어요.
마지막 질문이에요. 삼옥빌딩은 네모다!
음… 열린 공간이라고 하고 싶어요. 이곳 사람들은 누군가 나가고 들어오는 데에 부정적인 마음이 없거든요. 항상 좋은 사람들과 시너지를 내길 바라니까요.
:: 701호 ::
공예 아티스트
오유우
앞선 대화에서 자주 등장한 이름을 떠올리며 마지막으로 7층에 가본다. 똑똑, 두어 번 두드리니 안에서 응답하는 밝은 목소리가 들린다. 이윽고 열린 문 안에는 커다랗고, 둥글고, 어딘가 모르게 귀여운 구석이 포착되는 것들이 보인다. 널찍한 공간 한편에는 잘게 찢은 종이 조각들이 커다란 포대에 담겨 있고, 공예 아티스트 오유우의 뒤편에는 나무 합판과 페인트 통이 제자리를 잡고 서 있다. 종이죽을 연거푸 얹으며 제작 중인 커다란 의자 옆에 앉아 그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가 오유우의 작업실이네요! 소개 부탁해요.
701호 작업자 오유우라고 합니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 좋아서 도자 작업을 시작했고, 현재는 제가 표현하는 도자와 결이 맞는 소재로 큰 오브제나 가구를 만들고 있어요. 오늘은 대화 나누러 오신다고 해서 예쁜 옷을 입었지만, 평소에는 편안한 작업복을 입어요. 생각보다 거칠고 먼지가 많이 나오는 작업들이라서요. 삼옥빌딩에서 청소를 해도 티가 잘 안 나는 유일한 작업실입니다(웃음).
이름이 둥글고 유연한 느낌이에요.
워낙 호기심이 많아서 다양한 시도를 해보는 걸 좋아해요. 그래서 하나로 규정되는 듯한 이름은 짓고 싶지 않았어요. 부모님 성함이 옥윤, 현우인데 모음이 두드러지는 부분을 모아 만든 이름이에요. 짓고 보니 동글동글한 느낌이 저도 좋더라고요.
그런데 종이죽으로 어떻게 가구를 만들어요?
미술 시간에 하회탈 만들어 본 적 있으신가요? 그 방식과 흡사해요. 저쪽에 잘게 찢긴 종이들이 모여 있는데요. 주변에 편집 디자인을 하는 친구들이 많아서 편집본 책이나 지난 포스터, 브로슈어를 곧잘 받아요. 종이는 전부 갈고, 목재와 철재를 사용해서 가구의 뼈대를 만들어 두어요. 이케아에서 리사이클용으로 제공되는 합판을 사용하거나, 건축자재업을 하시는 아버지 덕분에 얻을 수 있는 자투리 철재를 용접해서 뼈대로 사용하기도 하죠. 이후에는 잘게 자른 종이를 죽으로 만들어 살을 붙이는데, 완성품이 강도나 수분 등에 취약하지 않도록 시간차를 두고 여러 번 덧바르고 안료를 써서 색을 표현하기도 해요. 한 장의 종이는 유약해 보이지만 뭉쳐지면 꽤 단단하고 세답니다.
아까 8층에서 주워들으니, 삼옥 오픈 스튜디오 홍보 포스터도 모두 여기에 있다고….
맞아요. 남은 포스터들을 전부 모아서 갈아버렸어요(웃음).
(웃음) 작업 소재가 자투리인 이유는요?
부드러운 촉감을 좋아해요. 그래서 흙을 반죽할 때 받는 느낌과 유사한 재료를 찾다 보니 종이가 되었어요. 처음에는 달걀판도 써봤는데 얻을 수 있는 경로가 한정적이고, 작업을 위한 불필요한 구매는 하기 싫더라고요. 제가 엄청난 환경 지킴이는 아니지만요. 주변에 널린 종이를 먼저 활용해 보고 싶었고 자연스레 목재와 철재까지 시선이 닿았어요.
여기서 작가님이 좋아하는 작업물을 꼽아주실래요?
음…. ‘왕 의자’요. 삼옥빌딩 바로 앞에 높이 선 게 한국은행인데요. 제가 입주했을 땐 바닥 골조만 짜인 상태였어요. 한국은행이 올라오는 걸 보면서 ‘돈의 기운’을 얻고 싶어서 만들었어요(웃음). 보통 첫 번째 피스는 제가 갖고 있고, 제작 문의가 들어오면 요청하는 사이즈에 맞춰서 조금씩 변형하면서 제작해요. 공간이나 주변 사물과 잘 스며드는 작업물을 만들고 싶거든요. 삼옥빌딩 동료들과 함께한 작업도 좋아해요. 렐리시 작가와 만든 와인 칠러는 제가 만든 도자기에, 렐리시 작가가 저의 반려견이었던 친구 ‘까미’의 얼굴을 그려주었어요.
도자와 종이죽 작업실이 나눠져 있다고요. 작업 공간이 어디냐에 따라 작업에도 영향을 미치나요?
그럼요. 집 뒷마당에 세 평 남짓 창고에서 도자 작업을 하는데 거기는 가마와 물레, 석고틀과 도자 재료들로 가득 차 있어요. 작은 시골 마을이라 조용하고 산이 늘어서 있어 새소리가 들리죠. 혼자 생각하거나 섬세한 작업이 필요할 때는 그쪽이 편한 것 같아요. 여기는 작업물을 모아 두고 볼 수 있다는 점과 공간을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게 좋아요. 다양한 분야의 동료들과 언제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도요.
삼옥빌딩에는 4년 가까이 머무른 건데, 어때요?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더라고요. 처음에 701호를 임대한다는 글이 올라오자마자 두 시간 만에 발견해서 바로 다음 날 오전 10시에 계약했어요. 창이 ‘ᄀ’ 자 모양이라 해가 풍요롭게 들어오는 게 맘에 들었거든요. 무엇보다 건물 대표님이 굉장히 인자하세요. 젊은 사람들을 존중하는 태도로 바라봐 주시고 개인 작업자를 반겨 주시고요. 삼옥 오픈 스튜디오를 열고 싶다고 했을 때도 흔쾌히 허락하셨어요. 건물 지하에 남는 공간이 있으니 자유롭게 써보라고도 해주셨죠. 열심히 머리 굴리는 중이에요(웃음).
나의 공간이 있다는 게 작가님에게는 어떤 의미예요?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 같아요. 나를 닮았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모인 공간, 좋아하는 사람들을 불러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 있다는 게 얼마나 의미 있는지 몰라요. 때때로 일상에서 쌓이는 감정들도 해소하거든요. 웃고 싶을 땐 깔깔 웃고, 힘들 때는 엉엉 울기도 하고요. 여기에 나라는 사람의 여러 감정을 공유해 두는 것 같아요. 가끔 삼옥빌딩 동료들이 와서 흙을 만지다 가는데, 같은 흙으로 각자만의 형태가 표현되는 게 신기했어요. 그런 날은 제 작품을 물끄러미 보다가 가기도 해요. ‘나의 형태는 뭘까?’ 고민하면서요.
그럼 701호의 새로운 이름을 지어준다면 뭐라고 할까요?
701호라는 말 대신 새로운 이름으로 부른다는 거죠? 그럼 아무것도 안 써둘래요!
이곳에서 만난 동료 작업자들의 이야기도 빠질 수 없겠죠.
삼옥 오픈 스튜디오를 하면서 다양한 작업자들이 와글와글 모여 일하는 게 얼마나 재밌는지 알게 됐어요. 혼자 작업할 때의 에너지도 좋지만, 다 함께 있을 때의 시너지가 참 매력적이라는 것도요. 저는 아주 긴 시간 작업을 해온 것도 아니고, 전공자도 아니다 보니 외로울 때가 있었거든요. 각자의 방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동료라는 단어 하나로 끈끈함을 느끼는 게 좋아요. 서로 좋은 영향력을 주고받을 수 있어서 기뻐요. 다정하고 멋진 작업자들과 이 건물에 머문다는 게 행복인데, 앞으로의 삼옥빌딩은 또 어떤 모습이 될까 기대되고 궁금해요. 더 다양한 작업자들을 삼옥빌딩에서 만나길 바라요.
마지막으로 하나 더 여쭤볼게요. 삼옥빌딩은 네모다!
작업자를 반짝반짝 빛나게 해주는 공간이에요. 작업자에게는 그게 최고죠.
에디터 이명주
포토그래퍼 강현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