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고 싶어요]

인과관계

이상해 보이는 사람이 없다.

이상해 보이는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그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에 서서 움직이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언제라도 갑작스럽게 행동할 사람처럼 불안해 보였다. 메고 있던 가방을 열고 길 한가운데에 캠을 비치해 두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캠을 향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는 더 이상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카메라 앞에서 우스꽝스러움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과장된 목소리로 소리 지르고 크게 웃고 우스꽝스러운 춤을 췄다. 그의 행동이 신경에 거슬리긴 했지만 여전히 이상하지는 않았다. 요즘은 어지간해서는 이상해 보이기 쉽지 않다. 예전 같으면 걸어가면서 혼잣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요즘은 이상해 보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카메라를 들고 있다면, 그 모습이 이상할수록 더더욱 치밀하고 계획적인 사람으로 비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시청자의 요구에 따라 그는 더 이상해지는 방법을 찾아 나섰다. 그는 우스꽝스러움을 넘어 비참해지기로 결심한 듯 바닥을 뒹굴며 옷을 더럽히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뒹구는 비참함을 그라고 모를 리는 없을 것이다. 오래전 코미디언들이 레몬을 씹어 먹고, 까나리액젓을 마시고, 얼굴에 테이프를 붙이며 신체를 학대했던 이유도 비참함과 우스꽝스러움을 혼동했기 때문이다. 그도 같은 이유로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무엇보다도 비참해지기 위해선 주변 사람의 시선이 필요하니까 그는 길을 지나는 사람에게 카메라를 들이대고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을 찍으려 했다. 이미 저 먼 곳에서부터 불안감을 감지한 사람들은 일찌감치 동선을 틀어 그를 피해 지나갔고, 인테리어 공사 현장에서 나와 잠시 땀을 식히던 외국인 노동자 한 명만이 어색한 표정으로 호응해 주었다. 원하는 만큼 충분히 비참해지지 않아 아쉬운 스트리머는 다른 사람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어기적거리며, 먼 곳에서부터 해죽해죽 웃으며 나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횡단보도 앞에 서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빨간 신호가 녹색 신호로 바뀌기를 기다리며, 아니 애원하며, 초조한 마음으로 신호등의 빨간 동그라미를 노려보았다. 한편 스트리머의 걸음은 뛰는 것처럼 빠르게 느껴졌다. 그의 걸음이 자신을 이상하게 봐 달라며, 될 수 있는 한 비참하게 만들어 달라며 애원하고 있는 것처럼 간절하게 느껴졌다. 자신을 좀 때려 달라고, 아니면 침 뱉고 모멸감에 가득 찬 눈빛을 보여 달라고 애원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대체 내가 왜 그런 일을 떠맡아야 하는가? 단지 여기 서 있다는 이유로? 그것이 싫다면, 그의 비참해지기에 협조하고 싶지 않다면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카메라는 피하거나 촬영되는 물건이었는데 언제부터 나에게 태도를 요구하는 물건이 되었을까? 

방송이 권력이던 시절 카메라는 사람들이 반기던 물건이었다. 가까운 곳에 살던 친척은 뉴스에서 인터뷰한 장면을 녹화해서 집에 갈 때마다 여러 번 보여주곤 했다. 그때 기자의 등 뒤에는 항상 사람이 북적거렸고, 카메라에 간택된 사람들은 주목받는 사람의 기쁨을 숨기지 못한 채 이를 모두 드러내고 이야기했다. 그때는 유명해지는 삶과 성공하는 삶은 분리되지 않았다. 유명해지는 삶을 성공한 삶이라고 여기던 사고는 정말이지 순수한 인과관계였다. 방송이라는 절대 권력이 힘을 잃고 난 뒤 길거리는 동물의 왕국이 되었다. 스트리머들이 카메라를 들고 이곳저곳을 촬영하며 돌아다니고, 카메라에 포획당한 사람들은 채집망에 걸린 야생동물처럼 요란스럽게 행동한다.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고, 불쾌해하고, 소리도 지른다. 채집망을 들고 다가오는 스트리머에게 나도 협조적으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 그의 이상함에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가 내 곁으로 다가왔을 무렵 때마침 신호가 바뀌어 길을 건널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내 뒤에서 소리 내어 괴상하게 웃었고, 나는 불쾌했지만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가 의도한 대로 그를 비참하게 만들어주었다. 이렇게까지 이상한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고 무시하다니! 

어른들은 종종 어린아이들 앞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곤 한다. 내 어린 시절의 어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꽤나 흐뭇한 표정으로 메뚜기를 구워 먹고 개구리 잡아먹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늘어놓곤 했다. “너희는 개구리가 얼마나 맛있는지 모르지?”

어른들이 보기에 우리 세대는 인과관계를 잃어버린 세대였다. 우리를 ‘회색 도시’에서 ‘아스팔트 바닥’을 밟고 사는 인공물처럼 여겼고, 집 밖에 나가지 않고 게임이나 피시 통신을 통해 인공적인 소통을 하는 것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기는 사람도 많았다. 식탁에 있는 쌀은 어떻게 나는 건지, 밤은 나무에 열리는 건지 땅에서 캐내는 건지 모르고 사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요즘은 점차 기계의 인과관계를 잊어가고 있다. 어느 시대나 그랬듯 어른들은 어린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기를 좋아한다. 요즘 어른들은 아날로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펼쳐 놓으며 (정말 부러워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기계의 촉감을 모르는 요즘 세대의 부러움을 사고 싶어 한다. 바람에 나부끼는 보리밭이나 꿈틀거리는 개구리의 촉감까지는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버튼을 누르면 끼깅거리며 움직이던 기계의 촉감을 알고 있다. 터치스크린과 전기 자동차는 기계에서 마땅히 발생하던 작은 진동을 사라지게 해버렸고, 이제 삶에서 마땅히 느껴야 할 인과관계는 모두 사라져버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쌀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밥을 먹는 것이 뭐가 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예전에 어른들은 그런 점을 꼭 알려주고 싶어 했다. 예전에는 컴퓨터를 켜면 ‘음 음 음…’ 소리가 났고 용량이 큰 영상을 재생하려면 기계의 진동과 함께 끙끙거리는 하드디스크의 소리를 들어야 했다고, 요즘은 그런 이야기를 많이들 한다.

그런데 모순적이게도, 비교적 인과관계가 뚜렷해 보이던 예전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더 많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카메라를 쫓아다녔으며 폭력을 사랑했다. 자신에게 도움 되지 않는 일에 시간과 정성을 쏟기도 했다. 화면을 누르면 무리 없이 영상이 재생되고, 요리할 줄 몰라도 원하는 거의 모든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요즘, 그래서 인과관계는 모두 제거된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면에서 인과관계는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장면들이 거리에서 쉽게 발견되지만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돈을 벌기 위해 눈에 띄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화면에 자신의 이미지를 기증한 행인의 불쾌감이 모두 매트릭스의 숫자로, 수익과 배분의 함수관계로 읽히기 시작했다. 이상한 행동은 거의 수익을 위한 것이다. 불쾌한 것은 동의 없이 사용되는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1999)에서 시각적 풍경이 모두 걷히고 초록색 숫자가 화면을 가득 채우던 것처럼, 노스탤지어와 신화적인 권력이 걷히며 시스템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길에서 만난 스트리머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흡사 남몰래 협박당하고 있는 사람처럼 안쓰러워 보였다. 비참한 모습을 중계해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안타까운 인물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상 틀리지 않은 말이므로 그것이 이상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먼 훗날이 오면, 그때도 예전이 좋았더라며 이런 식의 인과관계를 회상하며 흐뭇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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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한승재―푸하하하프렌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