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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인가 실력인가
산책을 나서며 인생을 뒤바꿀 만한 우연을 기대하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함께 일하는 동료이자 친구인 한진이의 취미가 바뀌었다. 얼마 전까지는 낚시에 미쳐서 물어보지도 않은 사람한테 낚시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요즘은 농구에 미쳐 사는 것 같다. 물론 여전히 낚시에 흥미가 있다고 말하며 간간이 유튜브로 낚시 채널을 보긴 하지만 이미 낚시는 그에게 관심 밖의 일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내가 본인보다 더 잘 알고 있다. 나는 사무실에서 현관문에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고, 그래서 택배 기사님한테 모든 택배 상자를 건네받기 때문이다. 택배 상자만큼 자신을 잘 알려주는 물건은 없다. 주말에 분리수거 할 때 택배 상자를 잘 분류하다 보면 본인도 모르는 본인의 정체성을 찾을 수도 있다. 한진이의 택배는 주로 작은 것들이었다. 박스엔 알 수 없는 글씨가 쓰여 있었고, 가끔은 자전거 부품에 그려진 로고가 새겨져 있기도 했다. 자전거 기어를 만드는 회사가 낚시용품을 만들기도 한다는 사실을 한진이 덕분에 알게 되었다. 기사님한테 받은 박스를 전해주면 한진이는 개처럼 신나게 박스를 뜯어서 작은 물건을 꺼내 흔들곤 했다. 처음에는 칼을 찾다가 그냥 손으로 부지직 찢어 갈긴다. 그리고 곧 박스에서 반짝거리며 흐느적거리는 것들을 꺼내 들고 흔들거린다. 친구에게 ‘개처럼’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미안하지만 정말 매번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그의 모습은 언제나 먹이를 앞에 둔 흥분한 강아지를 연상시켰다.
그렇게 쌓아 둔 지식과 낚시 장비를 모두 챙겨 들고 한진이는 여러 번 바다낚시를 떠났다. 나도 여러 번 한진이를 따라나섰다. 그렇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날이 추워서,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으나) 조황이 맞지 않아서, 채비가 맞지 않아서 실패했다. 낚시하기 전에 회를 먹어서 절박함이 없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전 지구적으로 생선의 숫자가 감소했다는 데이터까지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가끔 작은 물고기가 잡히기도 했지만, 그것은 자신이 준비한 채비에 맞지 않는 물고기라고 하며 왜 잡혔는지 의아해하다 허탈해하기도 했다. 한진이는 낚시를 잘하는 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원하는 곳에서 잘 잡는다고 하는데 제대로 된 것을 잡는 걸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낚시는 우연인가 실력인가 의아한 부분이기도 하다.
요즘은 한진이의 택배 상자가 조금(아주 약간) 커졌다.
처음엔 농구공, 그다음엔 농구 양말, 농구화와 농구 저지는 직접 구매했다. 그다음엔 무릎 보호대가 택배로 왔고, 그다음엔 발목 보호대가 왔다. 그다음엔 더 좋은 무릎 보호대와 더 좋은 발목 보호대가 왔다. 한진이가 농구를 취미로 바꾸고 나서 한진이의 건강 상태까지 알게 되었다.
나는 산책을 자주 하는 편이다. 광화문 주변으로 집을 옮긴 후로 산책이 더 잦아졌다. 때로 전시를 보거나 특별한 장소를 방문하기 위해 계획하고 집을 나서기도 하지만 대부분 바깥과 연결되고 싶은 기분으로 산책을 나선다. 창문 안쪽 세상과는 달리 창문 바깥의 세상은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열려 있다. 집 안에서도 물론 재밌는 일을 많이 만들 수 있다. 책을 읽거나, 사운드 클라우드를 틀어 놓고 춤을 추거나 영화를 볼 수도 있다. 남들보다 훨씬 빈번한 빈도로 가구 배치를 바꾸기도 한다. 하지만 집 안에서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지 않으니까 그런 것들이 따분하고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최근 집 안에서 발생한 우연은 집 앞에 배달 음식 도착한 줄 모르고 한 시간 동안 기다림, 버리려고 했던 행거의 쓸 만한 용도를 찾음, 책장 높이와 스피커 높이가 꼭 같다는 것을 알게 됨… 등등이었다. 집 안의 우연들이 소소한 즐거움을 가져다주기는 하지만 그것은 겨우 무릎 높이에서 출렁이는 얕은 물에서 수영하는 것 같은 시시한 일일 뿐이다. 어느 것도 나에게는 위협이 되지 않으며 나를 변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택배 상자 뜯는 것처럼 그때그때 반응하고 지나갈 뿐이다.
매번 엄청나게 즐거운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며 집을 나서는 것은 아니지만 늘 기대하는 무언가가 있다. 내가 모르는 세계와의 조우를 꿈꾸며, 세상과 나의 뒤섞임을 기대하며, 그것이 나를 곤경에 빠트릴지라도 나를 뒤흔들어 주기를 기대한다. 모든 영화의 시작이 그러하듯이 우연이 발생해 주기만 한다면 그다음부터는 모든 이야기를 술술 풀어갈 수 있다. 하찮은 우연이라도 점화해 주기만 한다면 나는 아무쪼록 열심히 해볼 각오가 되어 있다. 하지만 우연이라는 것이 쉽게 발생하는 것은 아님을 금세 깨닫는다. 아파트 복도에 나 있는 출입문은 모두 닫혀 있어 그 누구의 모습도 볼 수 없고 누구의 소리도 들을 수 없다. 식당과 카페에서는 창문 안쪽에서 아는 사람들끼리 어울려 사진을 찍으며 소소한 우연을 만들고 있다. 안에 있는 사람들에겐 무슨 재미인지 모르겠지만 밖에서 보기엔 그저 보기 좋은 그림처럼 보일 뿐이다. 그렇게 우연은 벽으로, 유리로 안전하게 차단되어 있다. 길에서 시비를 거는 사람도, 길을 묻는 사람 하나 없이 산책은 비단길처럼 편안하게 이어진다. 길에서 만난 가장 흉포한 사람은 길거리 한가운데 주저앉아서 떼를 쓰는 아이였고, 인류에게 남은 마지막 우연이 그 아이의 손에 쥐어진 듯 길을 지나는 사람은 모두 그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의 부모는 팔짱을 끼고 아이가 일어나 주기만을 기다렸다. 주 예수를 믿으라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도 이젠 배경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같은 색 옷을 입고 몰려다니며 선거 전단지를 나눠주는 키 작은 패거리들도, 인상이 맑아 보인다고 말하며 접근하는 이마 좁은 젊은 사람도… 모두 배경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그들의 거짓 호의를 못 들은 척 지나쳐도 그들은 태연하게 받아들인다. 다음 사람을 찾아 나설 뿐 다시 불러 세워 적극적으로 속이려 들지 않는다. 나 역시 스스로 우연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나에게 되묻지 못하는 것들에게만 인사한다. 길에서 만난 고양이에게 “안녕?” 작게 인사하고 오래전에 지은 건물과 새로 돋아난 나뭇잎을 쳐다본다. 더 이상 바깥에서도 우연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면, 나는 그제야 다시 집으로 들어온다. 마트에 들러 2리터짜리 오렌지 주스를 하나 사고 네 개에 만 천 원 맥주를 살까 말까 고민한다. 지난주에도 맥주 샀었지… 지난주에도 오렌지 주스 하루 만에 다 마셨지… 그럼 두 개 살까? 그럼 이틀에 4리터를 마시는 건데 그건 좀 이상해…. 맥주까지 모두 6리터 액체를 이고 무겁게 현관으로 들어서며 속으로 한탄한다.
도대체 왜 나에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가! 왜 한진이에겐 고기가 잡히지 않는 것인가! 산책은 우연인가? 실력인가?
글·그림 한승재―푸하하하프렌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