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삶의 새로운 방식

결혼이나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아도 한집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공동체가 늘어나고 있다. 비슷한 가치관과 라이프스타일을 공유하는 ‘사회적 식구’에게 우리만의 집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이들에게 집은 사적 영역을 존중하면서도, 구성원과 느슨하게 연결되어 서로를 돌볼 수 있는 공간이어야 했다. 그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완성된 집을 찾아 응암동으로 걸음을 옮긴다.

● 풍년빌라

4층 방송작가 부부 사적 공간
3층 일러스트레이터 사적 공간 & 방송작가 부부 공유 공간
2층 임태병 소장 가족 & 일러스트레이터 작업실
1층 로모커피 & 임태병 소장 가족 공유 공간

풍년빌라: 가끔 신발을 신는 집

불광천을 가까이한 응암동의 고즈넉한 골목. 이곳의 기다란 4층 집에는 세 가구가 함께 산다. 부모도 형제도 아닌 이들은 오래전부터 서로 알고 지내던 지인 공동체다. 세 가구가 같이 살기에 꼭 맞는 집을 찾다 이곳 ‘풍년빌라’를 직접 짓게 됐다.

이 독특한 프로젝트의 기획자는 풍년빌라의 거주자이자 문도호제 건축사무소를 운영하는 임태병 소장. 그는 ‘건축사사무소 SAAI(사이)’를 거쳐 ‘어쩌다가게@동교’, ‘메종키티버니포니’, ‘A.P.C. 홍대’, ‘신촌문화관’ 등 다양한 공간 설계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풍년빌라는 일반적인 셰어하우스와 다르다. 셰어하우스는 주방, 거실 같은 ‘공용 공간’이 있지만, 이 집에서 모든 가구가 함께 사용하는 공용 공간은 여러 층을 잇는 계단실뿐이다. 대신 풍년빌라에는 ‘사적인 공유 공간’이 존재한다. 사적 공간과 공용 공간 사이를 유연하게 오가는, 문을 열고 닫는 것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는 공간이다.

이렇게 상상해 보자. 당신은 친구랑 한집에 살고 있다. 문을 닫으면 온전히 나만의 서재였던 공간은, 문을 열면 친구와 함께 사용하는 공유 서재가 된다. 풍년빌라는 이러한 전환 장치를 집 곳곳에 마련해 두었고, 그 공간의 이름은 ‘현관’이다.

1층과 3층에 자리한 현관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다. 사적 공간의 문을 열면 그곳은 현관으로 전환된다. 계단실과 현관에서는 반드시 신발을 신는다. 마지막으로, 현관에는 분명한 기능을 부여한다는 점이다.

임태병 소장 가족이 사용하는 1층 현관은 거실과 주방, 다이닝룸의 역할을 겸한다. 신발을 신고 드나들도록 계획해, 풍년빌라 거주자들의 모임은 물론 외부 손님과의 미팅 공간으로도 활용된다. 방송작가 부부가 사용하는 3층 현관은 평소에는 탕비실이자 식물 관리 공간으로 쓰이다가, 필요할 때면 거주자들이 함께 모이는 공유 공간으로 전환된다.

©김동규

임태병 소장 가족 공유 공간. 신발을 신고 생활하는 장소로 풍년빌라 식구들의 중요한 모임장소 중 하나다.

©김동규

풍년빌라 1층에 자리한 카페 로모커피

©김동규

카페와 마당에서 진행한 벼룩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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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인 공유 공간으로 사용하는 풍년빌라 3층 탕비실

중간주거 그리고 현관

임태병 소장은 어떻게 신발을 신는 ‘현관’을 풍년빌라에 적용하게 되었을까. 그리고 왜 사적인 공유 공간의 이름을 현관이라 불렀을까. 출발은 그가 설계한 집 ‘해방촌 해방구’였다.

평소 손님들을 집으로 초대해 음식을 해주길 좋아했던 클라이언트는 세컨하우스에 전용 주방, 다이닝룸을 갖추고 싶어 했다. 공간은 자연스럽게 1층으로 계획됐지만, 협소한 부지 탓에 여러 손님이 신발을 벗어둘 넉넉한 현관을 마련하기는 어려웠다. 이때 임태병 소장이 제안한 해법은 단순했다. 손님들이 신발을 벗지 않고 집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

한국에서는 낯선 방식이었기에 클라이언트 역시 처음에는 망설였다. 그러나 훗날 그는 이 선택을 ‘신의 한 수’라고 표현했다. 신발을 벗는 행위가 사라지자 집에 들어설 때의 심리적 장벽도 함께 낮아졌고, 사람들은 한결 편안하게 이곳을 드나들기 시작했기 때문. 손님을 초대해 식사하는 자리는 한 달에 대여섯 번이 되었고, 어느새 동네 주민들까지도 해방촌 해방구의 1층을 자연스럽게 오가게 되었다.

“보통 집은 프라이빗한 공간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집의 모든 영역이 꼭 프라이빗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건축적으로 조금 다른 장치를 마련하면, 사람들이 집에 훨씬 쉽게 접근할 수 있죠. 해방촌 해방구를 계기로 개인의 집과 동네가 전혀 다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사용자의 필요에 따라 사적 영역과 공적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중간적인 성질의 공간. 임태병 소장은 이러한 개념이 적용된 건축을 ‘중간주거’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신발을 벗지 않는 현관의 확장은 중간주거를 구현하는 핵심 장치가 되었다. 그는 풍년빌라를 비롯한 여러 프로젝트에서 중간주거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김동규

신발을 신고 입장하는 1층 다이닝룸

©김동규

해방촌 해방구 전경

©김동규

풍년빌라 1층 카페에서 바라 본 마당. 대문 밖의 동네와 연결된다.

함께 살 집을 꿈꾼 이유

다시 풍년빌라로 돌아가 보자. 어떻게 세 가구가 함께 살기로 마음을 모으고, 건축적 장치를 매개로 느슨한 교제를 이어올 수 있었을까. 임태병 소장은 그 시작이 과거 홍대에서 직접 운영했던 카페 ‘비하인드’였다고 말한다. 임태병 소장 부부는 당시 홍대 재학 중이던 카페 아르바이트생들의 열악한 주거 환경을 알게 된 후, 그들에게 자신의 집을 내어주기 시작했다. 함께 살아온 시간이 어느덧 10년을 훌쩍 넘겼고, 이들은 가족 그 이상의 관계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미래의 집 역시 함께 그리게 되었다고.

“비하인드로 맺은 네트워크와 생활을 공유하면서 살다 보니까, 혈연이 아니어도 충분히 가족이나 식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음이 맞는 사람들이라면 언젠가 같이 살아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싹텄죠. 저는 건축하는 사람이니까 우리를 위한 집을 마련하는 게 저한테 일종의 숙제가 된 것 같아요.”

SAAI 건축에 머물던 당시 그는 2012 한일현대건축교류전에 참여하며 일본의 ‘나루세 이노쿠마 아키텍츠’가 설계한 셰어하우스를 접했다. 셰어하우스라는 개념이 아직 대중화되지 않았을 무렵이라, 여러 가구가 함께 사는 라이프스타일을 건축적으로 풀어낸 시도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단다. 비슷한 집을 우리만의 방식으로 건축하고 싶었지만, 현실적인 어려움도 컸다. 재산의 대부분이 집에 묶여 있어 새 보금자리를 위해 자본을 즉각 투입하기는 어려웠던 것. 대신 그는 주거가 아닌 상업 공간에서 먼저 고민을 구체화해 보기로 했다. 어쩌다가게@동교를 설계해 아홉 가게가 한 건물에 입점하고, 공유 공간을 함께 사용하는 구조를 실험한 것이다.

이후 주택 협동조합을 구성해 건축 자금을 마련하는 방안도 검토했지만, 국가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주거와 연계된 장기적 수익 모델을 제시해야 했다. 이는 실거주자를 고려하지 않은 채 이미 완성된 집에,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한순간에 이웃이 되는 구조를 전제한다. ‘우리가 살 집’을 꿈꾸던 임태병 소장의 공동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방식이었다.

풍년빌라 방송작가 부부가 사용하는 4층 옥상

건축주를 찾아라

임태병 소장은 공동체의 집을 짓기 위한 새로운 방안을 고안했다. 바로 건축주를 찾는 것. 일반적으로 건축주가 건물을 세운 뒤 세입자를 모집하지만, 그는 순서를 뒤집었다.

임대용 건축을 신축하고 운영하기 위해 건축주가 감당해야 할 과정은 매우 복잡하다. 토지 매입부터 설계와 시공, 세입자 모집은 물론, 이후의 유지·보수까지 책임져야 한다. 여기에 임대 기간을 10년으로 가정할 경우, 통상 2년가량의 공실을 감안해 8년 안에 투자금을 회수해야 하는 부담도 따른다. 그래서 임태병 소장은 건축주는 토지와 건물에 대한 투자만 담당하고 나머지 모든 과정은 세입자가 맡는 방식을 제안했다.

그리고 어느 날, 이 구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건축주가 나타났다. 드라마 〈시그널〉(2016), 〈킹덤〉(2019)을 쓴 김은희 작가다. 임태병 소장과 알고 지내던 김은희 작가는 형편이 어려운 방송작가들이 비교적 저렴한 임대료로 머물 수 있는 주택을 마련하는 일을 오랫동안 꿈꿨다.

필요가 맞닿은 두 사람은 방송작가들의 집을 짓는 걸 장기 목표로 삼고, 임태병 소장 공동체의 집인 풍년빌라를 시험 무대로 삼았다. 공동체는 건물과 관련된 전 과정을 직접 책임지고, 투자금에 대한 이자를 건축주에게 지급하는 조건으로 임대료 인상 없이 10년간 풍년빌라를 점유하게 되었다. 김은희 작가 역시 복잡한 운영 부담을 덜고, 지가 상승에 따른 시세 차익을 기대할 수 있는 구조였다. 그렇게 완성된 풍년빌라에서 공동체는 크게 만족하며 6년간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여인숙 전경

● 여인숙

5층 방송작가 A 주거 공간
4층 방송작가 B 주거 공간
3층 영화 메이크업 감독 주거 및 작업공간
2층 문도호제 건축사사무소 & 스테이 여정
1층 담대하게 커피워크

여인숙: 작가를 위한 집

풍년빌라가 완공되어 가던 무렵, 방송작가들을 위한 집 프로젝트도 서서히 시작되었다. 그렇게 완성된 공간의 이름은 ‘여인숙’. 이 공간의 2층 역시 해방촌 해방구와 풍년빌라처럼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경계를 넘나드는 구역이 존재한다. 외부인이 숙박할 수 있는 스테이 ‘여정’이다. 여정은 ‘남의 집’이라는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 스테이라는 공적 공간으로 전환되는 구조다. 동시에 숙박 예약자가 신발을 벗고 공간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이곳은 다시 개인의 사적 영역으로 바뀐다.

풍년빌라와의 차이점도 있다. 여인숙의 임차인들은 오랜 지인 관계가 아니고, 각자 일하는 시간 또한 제각각이다. 그래서 거주자 간 교류를 위한 공유 공간은 마련되지 않았다. 이렇듯 임태병 소장은 거주자의 관계와 건물의 성격에 따라 ‘중간주거’의 개념을 달리 적용하며 다양한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있다.

여인숙 2층에 위치한 스테이 여정

임태병

문도호제 소장

사회적 식구의 가능성
풍년빌라 식구들과는 자주 함께 밥을 먹거나 거의 매일 얼굴을 봐요. 자연스럽게 친밀감이 쌓일 수밖에 없죠. 제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 가장 먼저 달려와 준 사람들도 풍년빌라 식구들이었고요. 그래서 저는 혈연이 아닌 관계에서도 충분히 깊은 친밀감이 형성될 수 있고, 사회적으로 묶인 가족 역시 충분히 가족으로 기능한다고 생각해요. 부부와 자녀로 구성된 형태만 가족이 아니라, 앞으로 가족의 개념도 더 다양해질 거라고 봐요.

고립된 다양성
일본의 한 건축가가 다양한 구성원이 사는 집합주거용 공동주택을 설계했는데, 내 집으로 가는 동선이 수십 가지예요.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이웃을 피하도록 한 거죠. 재밌는 방식이지만 그건 ‘고립된 다양성’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말하고 싶은 건 모두 다 함께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고독한 다양성과 함께하는 다양성이 공존해야 건강한 사회겠죠. 여러 사람과 함께 사는 게 맞지 않다면 독립적인 공간에 살면 돼요. 다만 독립이 꼭 고립일 필요는 없겠죠. 사람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으니까요. 서로의 생활에 깊게 개입하진 않아도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해서 도와줄 수 있는 느슨한 관계는 당연히 구축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중간중거의 미래
중간주거를 대중적 경험으로 확장하는 건 제 몫은 아닌 것 같고, 더 잘할 수 있는 분들이 있을 거예요. 그래도 개인적으로 해보고 싶은 건, 이 모델을 적용해 제가 수업하는 디자인 학교 ‘파주타이포그라피배곳’의 기숙사를 만드는 일이에요. 또 하나는 노년형 주거 공간이에요. 지금 풍년빌라는 4층이라 제가 더 나이가 들면 계단 오르내리기가 힘들어질 것 같거든요(웃음). 노년형 주거 공간 저층부에 공용 주방과 지금 풍년빌라 식구들의 공간을 두고, 상층부에는 젊은 친구들이 살게 하면 어떨까 해요. 잘 지내고 있는지 서로 안부를 묻는 그 정도의 관계로요.

©김동규

여인숙 4-5층 내부 모습

©김동규

임태병 소장이 사용하는 여인숙 2층 문도호제 사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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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차의진

자료제공 임태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