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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S
부산에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기차를 기다리다 보면 플랫폼에 서 있는 사람들 손목에 걸린 쇼핑백을 유심히 보게 된다. 즐거웠던 여행의 여운을 이어가기 위해 양손 가득 챙겨 든 봉투에는 부산에서 내로라하는 간식이 두둑이 들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눈길을 사로잡는 노란빛 봉투. 정중앙에 곡식을 한아름 안은 여신이 그려진, 고급스럽고도 화사한 종이봉투는 부산의 대표 베이커리 ‘옵스OPS’의 것이다.
부산을 여행하다 보면 곳곳에서 ‘OPS’를 마주치곤 한다. 바닷가로 향하는 길목에서, 출출해서 들른 백화점 지하 식품 코너에서,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시장 입구 근처에서도. 멀리서도 눈에 훤히 들어오는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간판을 마주할 때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믿음직스러운 웃음이 번진다. 혹여나 그냥 지나쳤다고 해도, 근처까지 마중 나온 신선한 버터 향에 기어이 뒤를 돌아보게 된다.
1989년, 김상용 대표가 삼익제과를 인수한 뒤 처음 문을 연 것이 옵스의 시작이다. 이후 본격적으로 브랜드의 정체성을 다지기 위해 재단장을 거쳤다. 고민 끝에 토종 제과 브랜드로서 더욱 많은 이들이 건강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게끔 돕고자 고대 로마에서부터 숭배하던 풍요의 신 이름을 빌렸다. 그렇게 OPS라는 새로운 간판을 걸게 되면서, 뜻 없이 조합된 알파벳 세 글자에 ‘Our Peaceful Smile’이라는 의미를 덧입혔다. 대지 위에 여신의 가호가 깃들듯이, 한 입의 기쁨이 보다 멀리까지 닿기를 소망했다. 그 소망은 어느덧 34년째 이어져 오며 동네를 비추는 간판의 빛처럼 부산 곳곳에 불을 밝히는 중이다.
일찌감치 ‘나만의 기업을 만들겠다’는 열망을 품은 어린 소년은 구미 선산에서 뛰어놀던 시절을 뒤로하고,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고향을 떠났다. 다양한 분야를 경험해 보고자 몇 가지 직업을 거쳤고, 김해에서 자개와 나전칠기 일을 3년 동안 배워 ‘숙련공’ 타이틀까지 달았다. 그러나 나라에 불어닥친 오일 쇼크 때문에 그가 시간을 들여 연마한 기술은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어졌다.
새로운 길을 가자고 마음먹은 김 대표가 부산으로 온 이유는 도시에 스며 있는 가능성을 알아봤기 때문이다. 낙동강 줄기를 따라 시원하게 뻗은 금정산맥과 엄청난 규모의 바다. 진귀한 신문물과 새로운 기회를 찾아온 이주민이 물밀듯 들어오던 항구. 작물도, 사람도, 꿈과 희망도, 무엇이든 심어두면 잘 자랄 만큼 온화하던 부산은 소년에겐 기회의 땅이었다.
밀식 장해는 한정된 토양에 작물을 빽빽하게 심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식물은 서로 빛과 양분, 수분을 얻기 위해 경쟁을 하지만 영양소를 충분히 공급받지 못하여 꽃눈을 피우지 못한다. 식물이 그렇듯 사람 또한 열매를 수확하려면 튼튼한 꽃눈을 틔워야 한다. 부산의 여유로운 환경은 한 사람의 행복이 무리 없이 자라 꽃을 피우도록 북돋아 주는 비옥한 토양과도 같았다. 또한 지형이 가마솥을 연상케 하여 ‘부산’이라 불렸듯, 작은 열망이 불꽃으로 피어오르도록 열기를 더해주었다.
옵스에 방문할 때마다 매장과 쇼윈도를 가득 채우고 있는 빵을 보며 새삼 되묻는다. 세상에 이렇게 다양한 빵이 있었던가? 기본 바게트, 샌드위치를 만들기 좋은 로데브, 굵고 큼지막한 되리브르. 바게트만 해도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여러 종류다. 무엇을 사야 하나 헤매다 한 걸음 물러나 검색창을 켜고 후기를 찾아본다. 빵집마다 브랜드를 대표하는 메뉴가 하나씩 있기 마련일 텐데, 어째 의견이 조금씩 다르다. 누군가는 옵스의 핵심은 ‘슈크림빵’이라고 말하고, 어떤 이는 부산에 들를 때마다 추억이 샘솟는 ‘학원전’을 박스째 사 온다며 인증한다. 또 다른 이는 정수를 맛보기 위해선 정통 프랑스 빵을 골라야 한다고 호소한다.
옵스가 제안하는 미식의 세계는 구체적이고 다채롭다. 그들의 자부심은 ‘이유 있는 고집’에서 나온다. 그 세계 속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하는 세 가지 원칙이 있다. 자연이 낳은 좋은 재료를 쓸 것, 직접 손으로 만들 것, 전통 방식을 따를 것. 이 법칙은 수제 초콜릿을 만드는 과정에도 적용된다.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수제 초콜릿은 기성품 베이스를 녹여 모양을 다듬는 것이 전부다. 옵스는 초콜릿 본연의 맛을 구현해 내기 위해 현지 농장을 방문하여 1등급 카카오빈을 수입하고, 첨가물 없이 정통 방식을 살려 공정을 거친다. 세계적인 대가들을 만나 기술을 배우고 그들이 쓰던 유서 깊은 기계를 구비하기까지 했다.
직접 과일나무를 심는 수고까지 감수하려는 이유란 오로지 ‘자연의 맛’을 위해서다. 옵스가 추구하는 자연스러움은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진 우리에게는 다소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처음 맛보았을 때는 별 감흥이 없다. 오히려 두 번, 세 번 먹고 나서 진가를 발휘한다. 질리지 않는 담담한 맛에 스며든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서도 자연스레 옵스를 찾는다. 그 감동은 3대째 같은 빵집만 찾을 정도로, 시대 그리고 세대를 막론하고 전해진다.
심금을 울리는 맛을 찾고자 지역의 이름난 제과점들을 지도에 저장해 두고,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빵지순례’를 떠나는 이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이런 미래를 예견이라도 한 듯이 옵스는 오랜 시간 동안 어디서도 만나볼 수 없는 맛있고 좋은 빵들을 소개해 왔다. 크리스마스 시즌만 되면 예약 주문을 받는 슈톨렌 또한 20여 년 전부터 단골들의 성탄절 식탁 위를 은은히 밝혔다. 옵스가 처음으로 갓 구운 까늘레를 세상에 내놓았을 때도, 바삭한 식감을 살리기 위해 세심히 캐러멜라이징을 한 겉면을 보고선 “왜 시커멓게 탄 빵을 파냐.”며 지적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군말 없이 조심스럽게 조각내어 달콤한 여운을 오래도록 즐긴다.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 덕분에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는 시대의 분위기를 오랫동안 이어가기 위해 옵스는 오늘도 고집스럽게 빵을 굽는다. 그렇게 행복을 찾아 이곳까지 흘러온 손님에게 묵묵히 여행의 이유를 건넨다. 한 입 베어 물면 이곳이 긴 여행 끝의 목적지이자 종착지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입안 한가득 진한 슈크림 같은 행복이 넘실거린다.
에디터 오은재
포토그래퍼 최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