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절을 영원이라 부르며

정멜멜 — 사진가

정멜멜의 사진에는 언제나 빛과 그림자가 공존한다. 그 빛이 밝은 곳만 비추는 법은, 그림자가 어둠만 말하는 법은 없이 둥근 어깨를 마주 대고 공존한다. 한 사람의 시선을 따라가면 그가 사랑하는 것들이 보이기 마련. 그는 사이드 프로젝트 ‘올루 올루Olu Olu’를 통해 사람과 동물의 반려를 응시한다. 만남과 이별도, 삶과 죽음도, 평범한 일상의 나날과 가끔은 아옹다옹하다 토라지는 날들까지 경계 없는 빛과 그림자 아래 사랑으로 쓰인다. 한 시절의 찬란함을 영원으로 기록하는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시작에 앞서, 이 이야기는 나와 함께 세상을 사는 존재들에 대한 긴 사랑 고백임을 밝혀둔다.

살아 있는 존재의 생애 주기에 관해 생각해 본다면 모든 기록은
그 시절에만 남길 수 있는 거예요. 어렴풋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때를 남겨두지 않으면 추억할 수 없어요. 

얼떨결에 사랑한 이름들에 대해

스튜디오 ‘텍스처 온 텍스처Texture On Texture’의 마스코트 ‘택수’가 있으리라 예상했는데 고요하네요. 사이드 프로젝트 ‘올루 올루’ 홈페이지에서 택수 소개를 미리 읽고 왔거든요!

정말요? 아쉽지만 오늘 작업실에는 저 혼자예요. 택수는 스튜디오 동료인 신해수 씨가 2016년부터 키우는 시바견이자 가족인데요. 사람이 먼저 손 뻗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택수가 있는 날엔 스튜디오에 오는 분들께 미리 안내하고 있어요. 

 

저기 밥그릇이 보이는데 택수가 작업실에 자주 오나요? 

해수 씨와 함께 출근하는 날이 대부분이라 작업실 곳곳에 머무는 자리가 있어요. 특히 여기 긴 소파에 앉아 있는 걸 가장 좋아하고, 해수 씨가 자리를 비우면 저와 또 다른 동료인 수호 씨가 산책을 하거나 돌봐주죠. 일종의 공동육아처럼요. 택수라는 이름을 궁금해하시던데, 우리 스튜디오와 ‘해수’라는 이름에서 한 글자씩 모아 지은 거예요. 반려동물 이름을 사람처럼 친근하게, 조금은 구수하게 지으면 오래 산다고들 하잖아요. 텍스처 온 텍스처 제4의 멤버이자, 아무것도 하지 않는 동료예요. 

 

(웃음) 올루 올루 인터뷰를 보니 ‘택수 사용 설명서’도 있다고 하던데요. 

택수는 사람 손을 싫어하니까 만지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비슷하게는 박수나 가위바위보도 그렇고요. 기분이 좋은가 싶다가도 그릇에 밥이 남아 있을 땐 경계가 심해요. 시바견이 친화력이 뛰어난 편은 아니라서 싫어하는 건 최대한 이해하며 함께 지내려고 해요. 남에게 피해를 끼친다면 바로잡아야 하지만, 기질 자체는 존중하자는 게 해수 씨의 양육 방식이거든요. 저와 수호 씨는 그걸 따르는 거고요. 

 

그렇군요. 택수와의 만남은 다음을 기약하고 늦지 않게 멜멜 씨 소개를 들어보고 싶어요. 보통 자기소개를 부탁하면 뭐라고 답하세요? 

서울을 기반으로 동료들과 사진을 찍고 다양한 프로젝트에 스스로를 던져보려 노력한다고 짧게 설명해요. 그 한 문장에 제 모든 것이 들어 있거든요. 서울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쭉 살고 있는 도시고, 함께 작업하는 동료들과 사진이란 매개체는 저한테 굉장히 중요한 존재예요. 빈티지 숍을 운영해 보기도 했고, 최근엔 반려인과 반려동물을 기록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고요. 

 

하는 일을 제외한다면 어떤 사람인가요? ‘멜멜 사용 설명서’가 있을 수도 있잖아요. 

아, 제 설명서요(웃음)? 저한테는 워낙 일이 큰 의미라 빼놓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매일매일 뭔가를 남기고 싶어 하는 사람 같아요. 그리고 대체로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편인데, 사진은 본래 취미로 시작했던 거라서 혼자 여기저기 찍으러 다녔거든요. 그래서 일로 삼았을 때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을 대면하는 일이라곤 예상하지 못했어요. 사진 작업을 매개로 다른 사람들과 만나게 되고 그렇게 쌓는 경험이 즐겁다는 걸 알게 되었죠. 개인적으로 가깝지 않은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건 어렵지만, 많은 동료를 만나고 또 격려하면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작업은 사랑하는 사람이라 말하고 싶어요. 한편으론 양면적일 수 있겠네요.

양면적인 모습을 가진 본인을 어떻게 다루려고 해요? 

제 에너지의 총량을 알고 조절해요. 사람을 많이 만났다면 혼자 쉬는 시간도 꼭 필요하죠. 친구들을 만나더라도 일에 쏟아야 할 에너지까지 끌어다 쓰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이런 건 이전에는 잘 몰랐는데, 삼십 대 중반이 넘어가니까 느껴지더라고요. 내가 조절을 하지 않으면 친구들에게도 실례가 되고, 일할 때도 불편이 될 수 있겠다는 걸요. 

 

이름에 대해서도 묻고 싶었어요. 본명과 달리 활동명은 불리고 싶은 대로 직접 짓는 거잖아요.

본명이 정유진인데 어릴 때부터 흔하고 동명이인도 많았어요. 일을 시작한 뒤 새로 이름을 짓고 싶은데 거창하거나 느끼한 이름은 싫어서 계속 고민했죠. 성별이나 국적을 가늠하기 어려운, 기억이 잘되면서도 이상한 이름을 찾았거든요. 꽤 오랫동안 제가 ‘멜팅프레임’이라는 아이디를 써서 친구들이 편하게 “멜멜아!” 이렇게 부르곤 했는데요. 어느 날은 그게 딱 원하던 이름이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절 모르는 사람들은 듣자마자 ‘뭐지?’ 싶잖아요. 크레디트에 정유진이 열 번 나오는 것보다 정멜멜이 한 번 나오는 게 임팩트가 더 강할 것 같고요. 그때부터 멜멜이라 불러달라고 했어요. 

 

가끔 ‘점멜멜’로 불린다는 인스타그램 기록을 봤어요. 명리학을 공부하는 거예요?

동양 철학의 이론이 흥미로워서 사주나 명리학을 취미로 공부해요. 나를 알고 싶은 마음, 나아가 타인과 현실 세계 너머의 것에 대해 알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명리학은 절기를 기준으로 삼는 계절학이라 사람 역시 자연과 계절의 일부라고 보죠. 어떤 시기에는 감내해야 할 것만 많다가도 다른 시기가 오면 쓰임이 많아지고 그 또한 영원하지 않으며 순환한다고 여겨요. 그에 따라 체념과 희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전제가 저에겐 재미있어요. 가끔 친구들에게 사주 해석을 해줬더니 저런 별명으로 부르더라고요.

 

친구들은 그냥 부르는 법이 없잖아요(웃음). 텍스처 온 텍스처의 작업실이 있는 곳은 홍은동이에요. 근처에 홍제천이 흐르고 작은 사랑방 같은 카페들이 많은 곳인데요. 이사 온 지는 얼마나 됐어요? 

4개월 정도 됐어요. 스튜디오를 시작한 지 10년이 되었는데 그동안 종로에만 있었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의 상황이 바뀌고 원하는 공간의 조건도 바뀌더라고요. 예를 들면 어리던 고양이가 노묘가 되어서 간병을 해야 하고, 나이가 들어 장비가 무겁게 느껴지니까 계단을 오르내리고 싶진 않았어요. 촬영 작업 방향도 바뀌다 보니 교통이 편리한 곳만 찾지 않아도 되었고요. 홍은동은 지금처럼 낙엽이 떨어지던 이맘때에 처음 와봤는데, 길 양쪽으로 노란 은행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무척 강렬하게 느껴졌어요. 천이 흐르니 어딜 가지 않아도 계절 변화가 자연스레 보일 테고, 주변엔 반려동물을 환영하는 공간도 많아서 기꺼이 오게 됐죠.

 

앞서 잠시 이름이 불린, 공간을 함께 쓰는 동료들이 있죠. 

텍스처 온 텍스처에는 저를 포함해 세 명이 함께하는데요. 먼저 해수 씨는 저와 스튜디오를 함께 만든 사람이자 건축 전공 이후 건축물 사진을 위주로 찍는 작가예요. 제가 서촌에서 직장에 다닐 때 해수 씨가 운영하는 펍의 단골손님이었어요. 겹치는 지인도 있고 시각적인 걸 다루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졌죠. 해수 씨는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편이라면 저는 변화를 좋아하지만 시도하기까지 추진력이 부족한 편이라 함께 일한다면 서로의 장단점을 채워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이윽고 저는 퇴사를, 해수 씨는 자영업을 그만두기로 마음먹은 후에 얼떨결에 시작한 사진 스튜디오가 자리를 잡으면서 멤버가 필요했고, 그때 떠오른 게 제 동생 정수호였어요. 수호 씨는 시각 디자인을 전공했고 자체 프로젝트의 메인으로 기획과 매니징을 담당하는데요. 셋 중에 나이는 가장 어린데 해수 씨와 저 사이에서 중립 지점을 잘 찾아내는 동료라 무슨 일이든 의견을 묻고 의지해요. 가끔은 가족인데 서운할 정도로 제 편을 안 들어줘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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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명주

포토그래퍼 최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