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바라본 두 사람

본디 사람은 젊고 힘이 넘칠 땐 자신에게서 비롯된 모든 기억을 짊어지지만, 하루해가 넘어가듯 세월의 흐름이 몸에 쌓이면 그 기억을 하나둘 내려둔다. 일러스트레이터 엄유진의 어머니인 소설가 우애령도 2017년부터 기억의 조각을 조금씩 잊는 중이다. 한때는 온전히 자신의 것이었던 걸 덜어내는 일이 불안하기도 하련만, 우애령과 그의 곁을 지키는 철학자 엄정식의 일상에는 유머가 샘솟는다. 두 사람의 평연한 하루를 지켜보던 딸은 엄마와 아빠를 각각 ‘순간을 달리는 할머니’, ‘행복한 철학자’라 일컬으며 자신의 만화 속에 옮겨두었다. 일상의 단편에서 한 가족의 애틋함을 엿본다.

가족의 조각을 모아

2018년 여름부터 ‘펀자이씨툰’을 연재한 작가 엄유진의 어머니인 소설가 우애령은 “좋아하는 책과 냉수 한 잔만 있으면 어디에서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할 정도로 독서를 사랑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추리 소설을 좋아했다고. 그의 남편인 철학자 엄정식은 “아무래도 나는 무소유보다 유소유 정신이 좋아!”라고 농담처럼 말하며 작은 골동품을 수집하는데 푹 빠져 있다. 탁구공을 주고받듯 유연하고 유쾌하게 이어지는 그들의 대화를 듣던 딸은 자신의 만화에 곧잘 두 사람을 초대했다. 어머니가 기억을 잃어 가는 병을 진단받은 것도 그즈음. 

한없이 무거운 병이라 생각한 것도 아주 잠시, 생각과 태도가 당당한 어머니는 스스로 ‘순간을 달리는 할머니’라 칭하며 딸의 만화에 기꺼이 당신의 조각을 꺼내 두었다. 자신이 등장한 에피소드를 감상할 땐 큰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이래서 자나 깨나 딸 조심”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를 덧붙인다고. 덩달아 ‘행복한 철학자’라 불리게 된 아버지는 어머니의 진단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이런 말을 했다. “무언가 해줄 수 있다는 게 남은 삶의 이유가 될 거야. 어찌 보면 다행이다.” 기억 상실과 끝없는 반복 행동은 여느 영화에서처럼 낭만적으로만 바라볼 수 없다. 무심하게도, 가까운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지칠 때가 자주 찾아오기도 한다. 그러나 한결처럼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대하는 아버지를 보며, 딸은 아버지를 넘어 한 사람으로서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한다고. 두 사람이 평생 쌓아온 깊은 우정을 딸은 가만히 톺아본다.

순간을 달리는 이와의 데이트

만화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며 한 컷씩 순서대로 보고, 다음줄로 내려가 반복하며 읽는다.

세월의 무심함에도 담담하게

우애령은 자신의 병을 유난스레 바라보지 않는다. 기억은 붙잡으려고 하면 답답한 것이지만, 그냥 흘려보내는 느낌은 아주 시원하다고. “인간이라는 존재는 애초에 자신이 겪은 일의 백 분의 일도 기억하지 못하는 존재이니, 네가 지금 기억하는 것이 전부인 양 잘난 척하지 마.” 가족들 마음에 머무는 걱정이 날카로워 행여 마음의 주인을 찌를까, 유쾌함으로 부드럽게 모서리를 가다듬어 본다. 우애령은 기억을 잃는 것에 대한 불안을 껴안고 싶어 하지 않는다. 바쁘게 굴러가던 아이들 양육이나 직업 전선에서도 물러난 상태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 가져오는 불안에 정성껏 물을 주며 열매를 주렁주렁 키우고 싶지 않은 것이다. 때로는 그런 어머니를 보며 딸의 마음이 무르진 않을까 싶은데, 단단한 심지는 어머니와 딸이 꼭 닮았나 보다. 

엄유진은 말한다. “약한 부분이 늘어가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제 마음은 오히려 강해지고 있어요. 아이를 키우고 가족들 생계를 끌어나가야 하기 때문에 매번 넘어져서 좌절하거나 슬퍼할 시간도 없고요. 탄생과 성장, 노화와 죽음도 모두 삶의 과정 중 일부이지 않을까요?” 마음이 아플 때가 있지만, 아프다고 해서 반드시 약해지는 건 아니라는 걸 서로를 단단히 지탱하는 이 가족을 통해 배운다. “언젠가 가족의 빈자리를 보며 그리움과 슬픔을 떠올릴 텐데, 지금 이 시간은 미래가 저를 가고 싶었던 곳으로 되돌려 보내준 기회는 아닐까 상상해 봐요.” 사람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에 쉬이 무너지기 보다 무엇이든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한 사람의 모습에서, 용기와 지혜를 물려준 두 사람의 얼굴이 비친다.

도리어 자유로운 사람

둘도 없는 우리들 사이

일과 육아, 간병, 가족과의 시간까지 전부 챙기려다 보면 나의 일상이 휘청일 때도 있다. 한때 건강에 이상 신호가 켜져 며칠 간 꼼짝없이 누워 있던 엄유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무력함을 느꼈다. 그 무거운 마음을 알아챈 듯 부모님과 형제들, 남편과 아이까지 온 정성을 모아 그를 보살폈다고. 그때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우리보다는 너 자신의 건강을 더 챙겨야 한다.”라는 말은 마음속에 깊이 남았다. 나를 위한 시간이 사치스럽게 느껴지곤 했는데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가족이기에 서로에게 무조건적인 희생과 배려를 바라기 보다, 가족이기에 서로가 스스로를 먼저 챙기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이 중요한 존재임을 깨닫는 시간이 한편으로는 기분 좋았다는 엄유진은 거뜬해진 몸과 마음으로 지난 시간을 떠올린다. 이제는 아버지가 사랑으로 들려주신 말을 똑같이 안겨드리고 싶다는 바람도 함께다. 언젠가 딸은 어머니에게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를 할 때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물은 적 있다. 어머니의 답은 “마주 보는 사람의 마음에 대한 존중”. 물꼬를 터 이야기가 오가는 상황에 귀를 잘 기울이면, 그 사람의 마음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보인단다. 존중이라는 바탕 위에 위트 있는 ‘티키타카’를 더하는 한 가족의 대화에 귀 기울여 보다가, 뭉근한 애정이 서로를 향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아버지가 종종 어머니께 던지는 “당신, 나한테 시집 와서 웃기는 실컷 웃었지?”라는 농담과 부드럽게 퍼지는 웃음도 함께.

군고구마와 딸

AROUND 온라인 구독

어라운드의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으로 읽어보세요.

구독 시작하기

에디터 이명주

그림 엄유진(펀자이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