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만 먹는다면

재료의 산책

평생 한 가지 음식만 먹을 수 있다면, 무얼 고를래요?

버터 커리

평생 한 가지 음식만 먹는다면 무엇이 좋겠냐는 질문을 앞두고 ‘내가 여태껏 가장 많이 만든 한 가지 음식이 무엇일까?’를 되돌아보았다. 그동안 어딘가의 주방에서 수많은 음식을 만들어왔지만, 모든 것을 제치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바로 ‘버터 커리’였다. 20대 중반 처음 발을 디딘 홍대의 ‘카페 수카라’. 제철 채소와 과일, 발효 음식을 연구하고 판매하던 공간과 사람에게 매료되어 그곳이 없어질 때까지 4년에 가까운 시간을 주방에서 근무했다. 즉, 4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매일같이 버터 커리를 끓였다. 카페 수카라의 메인 메뉴였던 버터 커리도 세월을 거치며 많은 변화를 겪었다. 초창기에는 밥과 커리 위에 구운 닭다리와 삶은 렌틸콩, 브로콜리 등을 얹어 내었으나 몇 년 후부터는 구운 제철 채소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게다가 원래는 시판 버터로 끓이던 것을 최종적으로는 매장에서 직접 비건 버터를 발효해 끓이게 된다. 커리 하나에 무얼 그리 공들이는가 싶을 수도 있지만, 아마도 우리는 커리에 꽤나 미쳐 있었던 것 같다. 현재는 카페 수카라의 후속편인 궁정동의 ‘큔’에서 커리를 이어 끓이고 있다.

녹진한 맛과 농도의 커리를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해서 출근부터 퇴근까지 정말로 하루 종일 끓이곤 했다. 보통 커다란 육수 통에 한가득 끓이는데 토마토소스가 바닥에 눌어붙지 않도록 긴 나무 주걱으로 계속해서 저어주어야 했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끼리 근무를 바통 터치할 때면 서로의 안부보다 ‘현재 커리의 진행 상황’을 공유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식사 때에는 다 함께 맛있는 걸 만들어 먹기도 했지만, 가끔 너무 바쁜 날이나 식욕이 없는 날에는 간단하게 밥에 커리를 말아 먹는 일이 다반사였다. 따뜻한 밥에 커리 한 국자, 채소 구이나 달걀 프라이, 샐러드 한 줌을 더하면 충분한 한 끼가 된다. 한국인은 김치만 있으면 밥을 먹을 수 있다는 말처럼 우리는 커리만 있으면 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다섯 가지 정도의 향신료를 블렌딩해서 끓이는 커리가 뿜어내는 냄새가 머리와 옷에 짙게 배고는 했는데, 그래서인지 지금도 어디선가 쿰쿰한 이국의 냄새가 나면 이상하게 마음이 포근해진다. 긴 시간 동안 버터 커리를 휘휘 끓여가며 다양한 인연들을 만나고,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버터 커리에는 평생 매일같이 꺼내보아도 바닥이 마르지 않을 만큼 소중한 추억이 빼곡히 담겨 있다.

요나

제철 재료를 공부하고 기록하며 이야기한다. 식당을 열기도, 영상을 찍기도, 책을 쓰기도 한다. 《재료의 산책: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일기》에 이어 《재료의 산책, 두 번째 이야기》 출간을 준비 중이다.

연어 초밥

하루하루 질곡의 세월을 살아내는 인생의 한 중턱에서 “남은 일생, 단 한 가지 음식만 먹어야 한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처럼 중차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많은 날, 많은 음식들. 좋은 날 좋은 사람들과 함께 나눈 음식만큼 맛 좋고 값어치 있는 것도 없겠으나, 그런 상황에서는 어떤 음식이든 맛이 안 좋기도 어렵다. 그러니 좋지 않은 어떤 날 혼자서 외로움을 채운 음식에서 주마등을 멈춰 세웠다. 연어 초밥이었다. 정확히는 은행골 연어 초밥.

회사원이던 시절, 공사가 무지막지하게 다망했던 하루 일정을 마치고 녹초가 되어 퇴근해 보려던 무렵 “정말 죄송한데…”로 시작하는 불길한 메신저를 받았다. 그냥 해주고 말 수도 있는 일이지만, 워낙 바쁜 하루를 보낸 이후라 마음이 뾰족했다.

‘죄송할 짓은 서로 하지 맙시다.’, ‘제가 지난주에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제 말은 말 같지 않으신가 봅니다–?’라고 마음의 소리를 메신저 창에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다가는 퇴근해 버렸다. 이후 모바일 메신저로 이렇게 말했다. “죄송한데 제가 퇴근해서요…. 내일 오전에 처리해 드려도 될까요?” 가시 돋친 무례한 마음의 소리를 가까스로 참아내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죄송에는 죄송으로 답하는 것으로 모난 마음을 갈아냈다.

그 길에 모난 턱도 다듬기로 했다? 비밀도 아니지만 굳이 이야기하지도 않는 챠밍 시크릿인데 나는 때가 되면 주기적으로 턱에 보톡스를 맞는다. 마침 시기가 도래한 느낌이었다. 턱 보톡스를 맞은 날엔 최대한 턱을 쓰지 않고 부드러운 음식을 먹어야 한다. 은행골 연어 초밥이 아주 제격이었다. 성글게 쥐어 흩어지는 밥알을 가까스로 붙들고 있는 연어 위를 간장을 적신 생강으로 훑듯이 간을 입혀 아슬아슬 조심조심히 입에 넣으면 곧 어디로 갔는지 초밥은 사라지고 내가 초밥을 입에 넣었다는 기억만 가까스로 남는 그런 부드러움. 그래서 턱 보톡스를 맞은 날은 꼭 은행골 연어 초밥을 먹었다.

알게 모르게 사람들의 일상 곳곳에는 보톡스가 끼어 있지 않을까. 주름진 것을 팽팽하게 혹은 모난 것을 둥글게 둥글게 윤색하는 저마다의 수단과 방법이 있을 터. 그렇게 자신을 갈고 가다듬고는 다시금 내면을 보드랍게 채우는 각자만의 의례도 있지 않을까? 내 의례 마무리에는 은행골 연어 초밥이 있다.

에리카팕

요리와 게더링을 기반으로 한 여러 모임을 기획하고 운영하며, 카피라이팅, 콘텐츠 에디팅 등 텍스트를 요리하는 일도 한다.

수제비

여생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지만, 기력이 다할 때까지 수제비를 만들어 먹을 것 같다. 수제비는 아주 심플하고 화려하면서 만들기도 쉽다. 잘 우린 멸치 육수와 밀가루, 소금, 이 세 가지 재료로만 만들 수 있지만, 버섯이나 값비싼 해산물 등 들어가는 재료에 따라 맛과 화려함이 무한대로 확장한다. 난 기본에 바지락 넣는 걸 가장 좋아한다. 파와 청양고추, 소금만으로 간을 하고 멸치 육수 본연의 맛을 즐기는 걸 좋아한다. 반죽은 최대한 많이 치대고 얇게 펴서 뜯어 넣고.

비 오는 아침이나 피곤하고 지친 퇴근 후에도 수제비를 만들어 먹는 걸 좋아한다. 멸치 분말로 육수를 천천히 우려내는 동안 밀가루 두 줌에 소금을 조금 뿌리고 반죽을 시작한다. 끈적거리고 달라붙던 반죽은 점점 매끄러워지면서 손에 쥐고 뜯기 좋은 찰기를 가진 반죽이 된다. 반죽의 끝부분을 양손에 쥐고 재빨리 펼친다. 넓게, 얇게. 난 수제비의 반죽이 육수를 잔뜩 머금은 걸 좋아하기 때문에 최대한 얇게 뜬다. 반죽을 다 뜯어 넣으면 한소끔 끓인 뒤 잘라둔 파와 청양고추를 올리면 끝. 식탁에 앉아 마치 사골 육수처럼 뽀얀 수제비의 국물을 제일 먼저 한 술. 멸치 육수의 깔끔하고 깊은 맛 끝에 청양고추의 매운맛이 코끝을 친다. 그래, 이 맛이지. 그리고 수제비를 한 숟갈 먹는다.

아주 오래전, 자기 확신 없이 깊은 자괴와 우울함에 빠져 침대에서 곰팡이처럼 썩어가다 겨우 현실로 기어 나와 제일 처음 먹은 음식이 아파트 지하상가 식당의 수제비였다. 저렴한 맛기름이 들어간 양념장과 김 부스러기가 올라간. 고소한 맛기름의 향과 함께 뜨거운 멸치 육수와 매끄러운 밀가루 반죽이 목구멍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때의 그 느낌과 맛은 절대 잊을 수가 없다. 수제비를 다 먹고 온몸을 따뜻하게 데운 나는 다 벗겨진 입천장과 함께 일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수제비는 가장 심플하고 격렬하게 움직여 만들어내는 요리 중 하나. 내가 아직 쓸 만한 사람임을 느끼게 해준다. 그래서 난 수제비를 정말 좋아한다.

오토나쿨

도쿄에서 13년째 살고 있는 디자이너이자 작가. 요리와 부엌, 일상에 대한 글을 쓴다. 《도쿄 일인 생활 – 부엌과 나》, 《도쿄 일인 생활 – 맥주와 나》, 《재생의 부엌》을 썼다.

마제소바

필진에게 주제를 건넨 사람은 난데 정작 쓰려니 어렵다. 엉뚱한 주제를 던진 걸까, 필진들은 쉽게 떠올리려나…. 고민하는 동안 여러 음식이 머릿속에 스쳤다. 속 재료를 바꿀 수 있는 김밥? 어떤 날은 햄만, 어떤 날은 당근만 넣는 거다. 그렇게 먹는다면 평생도 괜찮겠어. 하지만 도통 김밥에는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 평소에 그렇게 좋아하는 음식도 아니잖아!

이런저런 고민을 안고 퇴근 후 자주 가는 맛집 ‘거북이의 꿈’을 찾았다. 식탁이 조리 공간을 빙 두르고 마츠바라 미키의 ‘Stay with Me’ 같은 노래가 흐르는, 전형적인 일식집이다. (구석에 있는 마릴린 먼로 그림만 빼고. 사장님이 이 그림을 왜 두었는지는 갈 때마다 의문.) 조금 기다리면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카라이 미소 마제소바가 반짝이는 노른자를 품고 등장한다. 잘 섞어 한 입 먹으니, 온몸이 녹아내리는 기분. 옳다구나! 이런 마제소바라면 평생 먹어도 좋겠어. (좋아, 글 소재를 정했다.)

잠깐, 왜 평생 먹을 음식으로 자극적인 마제소바를 골랐냐고? 마제소바는 변주를 주기에 아주 좋다. 본연 그대로의 맛을 즐기다가, 음식을 3분의 2 정도 먹은 후 유자 소스를 넣으면 색다른 풍미를 느낄 수 있다. 면을 다 먹고 나면 밥을 비벼 먹거나 녹차를 부어 오차즈케로 먹을 수 있는데, 난 꼭 후자로 먹는다. 마제소바를 먹는 이유가 오차즈케를 먹기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천재지변으로 갑자기 모든 식당이 사라지고 거북이의 꿈만 남는다면 하루는 처음부터 유자 소스를 넣어서, 하루는 오차즈케로 마제소바를 먹을 수 있을 테다. 어떤 날은 원래대로 3단계를 거쳐도 된다. 그럼 아무리 자극적이라도 질리지 않고 먹을 수 있지.

그래도 어떻게 마제소바를 매일 먹을 수 있겠냐고? 마제소바의 중독성을 무시하지 마시라. 다음 날은 이상하게 또 먹고 싶어진다. 그래도 연달아 거북이의 꿈에 간 적은 없다. 사장님이 아마 나를 ‘혼자 와서 늘 오차즈케 먹는 여자’로 기억할 텐데, 여기에 ‘다음 날 꼭 또 오는 여자’라는 수식어까지 붙을 수는 없지. 가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가 다시 맛보면 고단한 하루를 보상받는 기분이다.

차의진

《AROUND》 에디터. 남자 형제 둘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다 보니 천천히 오래, 많이 먹는 습관이 생겼다. 형제들이 치킨 다 먹어갈 때 고작 한 조각 먹던 날 위해, 늘 미리 몇 개 빼 두셨던 우리 엄마 고마워요.

그래, 이곳이라면!

평생 먹어도 좋을 메뉴가 있는 추천 맛집

1.
요나 : 큔
비건 버터 발효 커리

직접 발효하여 만드는 비건 버터와 향신료로 뭉근하게 끓여내는 커리. 갖가지 제철 채소를 구워 토핑으로 올려준다. 그 계절의 채소가 무엇인지 구경하며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커리 옆에 곁들여 나오는 작은 채소 절임까지 정성이 느껴지는 한 접시.

A.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26길 17-2 1층
O. 목-일요일 11:00-16:00, 월-화요일 휴무

2.
오토나쿨 : 삼청동 수제비
수제비

내가 지향하는 수제비의 정점 같은 곳이다. 반죽의 두께와 쫄깃함과 국물 맛의 깊이. 그리고 절묘한 청양고추 절임까지.

A. 서울 종로구 삼청로 101-1
O. 매일 11:00-20:00

3.
에리카팕 : 은행골 신사점
연어 초밥

이제는 체인점이 워낙 많아졌지만 신사동 본점에서 처음 먹었던 기억이 강렬하다. 젓가락으로 집어 드는 것이 아니라 붓이나 생강에 간장을 찍어 초밥 위를 적시고 성글게 뭉친 밥을 조심스럽게 입에 넣어 먹던 그 질감, 그 맛의 시작은 은행골이 아니었나!

A. 서울 강남구 강남대로 152길 42 2층
O. 월-토요일 11:00-22:30, 일요일 휴무

4.
차의진 : 거북이의 꿈
카라이 미소 마제소바


기다란 복도를 따라가 문을 열면 친절한 사장님이 손님들을 반긴다. 맛 좋은 메인 메뉴와 함께 산마 튀김, 모찌리도후 등 다양한 사이드도 있다. 식사하다 보면 사장님의 요리 인생이 궁금해지는 따뜻한 맛집.

A. 서울 마포구 성미산로 190-31 지1층
O. 화-일요일 11:30-21:00, 월요일 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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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차의진

글 에리카팕, 오토나쿨, 요나, 차의진 일러스트 렐리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