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작은 피서 ‘피클’

8월 13일, 내가 다시 좋아지는 순간

 

별다른 이유 없이 내가 못 견디게 미워질 때가 있다. 회사 업무의 일환으로 녹화 버튼이 눌러진 카메라 앞에 설 일이 있었는데, 그 영상들을 보다가 10초를 못 견디고 꺼버렸다. 말투, 목소리, 표정, 어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다. 성가시게 자꾸 머리카락을 만지는 이상한 버릇도 너무 거슬린다. 그간 나는 나를 그럭저럭 아끼고 존중하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나를 볼 수 없다니 속상한 감정이 든다.

잔뜩 엉망이 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피클을 만든다. 피클은 칼질이 전부인 음식이다. 손바닥 끝에 힘을 주어 단단한 재료들을 계속해서 조각내야 한다. 도마에 울리는 탁탁 칼질 소리에 마음이 조금 경쾌해진다.

내가 주로 만드는 피클은 무와 오이가 주재료다. 무와 오이는 최대한 정성을 들이지 않고 반듯하지 않게끔 자르는 것이 포인트다. ‘뎅강뎅강’ 혹은 ‘숭덩숭덩’ 잘라야 한다. 오이는 백오이보다는 청오이가 좋고, 껍질은 필러를 이용해 줄무늬를 남기는 방식으로 ‘듬성듬성’ 벗겨낸다. 그래야 물러지지 않고 단단함을 유지해 아삭한 식감을 살릴 수 있다. 여기에 양배추나 파프리카, 셀러리, 당근, 양파 등을 취향껏 더해도 물론 무방하다.

냉장고에 비트가 있다면 비트까지. 사실 비트는 내가 직접 돈 주고는 사본 적 없는 식재료인데, 은퇴 후 작은 텃밭을 가꾸시는 짝꿍의 아버지께서 한 번씩 수확해 보내주시는 덕에 종종 우리 집 냉장고에 들어 있다. 비트는 무와 거의 비슷한 식감과 맛을 내지만 그 존재감은 확연히 다르다. 그 어떤 물감으로도 흉내 내기 어려운 천연의 영롱한 붉은빛이 진하게 물들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마지막으로 도마에 올릴 것을 권한다. 식칼과 도마에 흥건한 비트의 붉디붉은 혈흔을 가족들이 발견하고 놀라기 전에 잘 정리해두자. 빨리 씻어내지 않으면 도마는 물론 부엌 여기저기에 붉은빛이 물들어 곤란해질 수도 있다.

재료가 다 준비되었으면, 절임액을 만들 차례. ‘설탕 1 : 식초 1 : 물 1’의 비율이 알려진 정석이라고 하지만 조금 덜 달게 하고 싶으면 설탕은 내키는 대로 줄이면 된다(단것을 비교적 좋아하는 내 입맛에도 위의 비율은 당도의 최대치이니 더 달게 먹고 싶다고 해서 설탕을 더 넣었다가 후회하지 않기를 부탁한다). 나는 집에 있는 식초가 마침 사과식초라서 설탕은 과감히 절반으로 줄이기로 했다. 그렇게 줄여도 넣다 보면 들어가는 설탕의 양이 어마어마하다. 고등학교 구내매점의 떡볶이 아저씨가 옆구리에 설탕 포대를 끼고 콸콸 쏟아붓던 장면을 내가 재연하게 된다.

식초 또한 마찬가지라서 평소에 잘 쓰지 않는 식초를 물과 동량으로 넣다 보면 흔히 가정용으로 상비해두고 쓰던 작은 식초 한 통을 금세 비운다. 식초는 평소에 워낙 조금씩 쓰는 재료이다 보니 용기의 입구도 작아서 그야말로 ‘쫄쫄쫄’ 나오는데, 한 통을 넣으려면 거의 짜내듯이 힘을 주어 몇 번을 눌러야 한다. 가능하다면 입구의 마개를 따고 통째로 들이붓는 편이 좋겠다.

이제 불 위에 올려 끓어오르기를 기다려야 한다. 설탕이 잘 녹아들 수 있도록 저어주면서. 서서히 난데없이 탕수육 소스 냄새가 풍길 것이다. 잘되고 있다는 신호다.

이제 열탕 소독해서 잘 말려놓은 큰 병에 앞서 잘라둔 야채들을 차곡차곡 담는다. 사이사이 통후추 조금과 월계수 잎 몇 장을 넣으면 깔끔하고 청량한 맛이 증폭된다. 피클링 스파이스라고 해서 낯선 이국의 여러 재료를 모아둔 시제품도 있지만, 이 두 가지면 충분하다. 조금 더 개운한 맛을 원한다면 페퍼론치노 몇 개를 넣으면 된다. 다 되었다면, 끓인 절임액을 뜨거운 상태 그대로 야채들이 푹 잠기도록 붓고 실온에서 충분히 식힌다.

 

 

저마다의 더 정성스러운 방법이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내 방식은 이렇다. 그야말로 초간단이다. 냉장고에 넣고 반나절 정도만 지나면 바로 먹을 수 있지만, 더 맛있게 먹기 위해선 사흘 정도는 기다리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처음엔 절임액 위쪽에 동동 떠 있던 무, 오이, 당근, 비트 들이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아래로 내려앉는다. 그렇게 냉장고 안에서 차갑게 숙성된 피클을 꺼내 한입 베어 물면, 식초와 설탕에 적절히 절여진 아삭함이 폭죽처럼 팡팡 터진다.

직접 만든 피클을 먹다 보면, 내가 다시 좀 괜찮은 사람이 된 것도 같다. 이렇게 맛있는 피클을 만들 수 있는 사람 정도는 된다는 위안이 나쁘지 않다. 사실은 내가 했다기보다 물, 식초, 설탕이 다 한 것이지만. “말투?” 괜찮아, 나는 아나운서가 아닌걸. “목소리?” 괜찮아, 원래 녹음된 내 목소리는 어색하기만 하지. “표정?” 괜찮아, 카메라 앞에서 자연스러운 얼굴이 되는 사람이 어디 많나. “머리카락을 만지는 습관?” 괜찮아. 그게 뭐 어때서! 맛있게 익어가는 무와 오이와 비트 앞에서, 모든 것은 다 괜찮은 일이 된다. 다시 나는 내가 좋아진다.

매일 먹는 김치가 조금 지겨울 때가 있다. 이렇게 한번 만든 피클은 냉장고에 보관하면 한두 달은 거뜬해서 여름 한 철 든든하다. 새콤한 식초 향이 무더위에 사라진 입맛을 다시 불러내고, 한동안 멀리했던 불 앞에 서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싶게 만든다. 안타깝게도 피클은 그 자체보다도 어떤 음식 옆에서 더욱 빛이 나는 조연이기에.

그래도 다행인 것은, 피클은 어떤 음식과도 대체로 잘 어울린다는 점이다. 흔히 생각하는 느끼한 음식뿐 아니라 매운 음식 뒤에도 새콤달콤한 피클을 입에 넣어 씹으면 이내 곧 시원해진다. 카레를 한솥 뭉근히 끓인 날 곁들여 내기에 이만한 것이 없고, 국수를 끓여 호로록 면발과 함께 입에 넣고 씹으면 부드러움과 아삭함이 한데 섞인 복잡한 식감도 일품이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온 가족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든든한 반찬이 된다. 무더운 여름날, 우리들 입으로 찾아오는 축제이자 작은 피서다.

 

 

피클 만드는 법

1. 무, 오이, 비트, 당근, 양배추 등을 깨끗이 씻어 준비한다.
2. 물 1 : 식초 1 : 설탕 1의 비율로 잘 섞고 센 불에 끓인다.
3. 준비한 채소를 듬성듬성 한입 크기로 자른다.
4. 2번의 절임액을 잘 저어 설탕 알갱이가 모두 녹았으면 불을 끈다.
5. 열탕 소독한 병에 3번의 채소들을 넣고, 끓인 절임액을 붓는다.
6. 취향에 맞게 통후추나 월계수 잎을 함께 넣고 실온에서 식힌다.
7. 완전히 식으면 냉장고에 넣고 반나절에서 사흘 정도 지난 후에 맛있게 먹는다.

 

 

We Around Project

내가 오늘 분명히 먹은 것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점심 먹고 나오는 길에 저녁 메뉴를 고민하고, 저녁 식탁을 치우면서 내일 점심을 고민합니다. 바쁜 일상 중에도 마음에 선명히 남는 한끼의 식사가 있습니다. 음식을 앞에 두고 떠오르는 생각과 마음의 대화를 적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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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김지향 크리에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