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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할 일이 없을 때 이렇게 시간을 보낸다
한결같은 버릇
딱히 할 일이 없을 때 이렇게 시간을 보낸다
“소장님! 벽돌 그냥 붙이면 안 돼요?”, “네?”, ”벽돌 말이요! 그냥 쌓지 말고 붙입시다! 어차피 똑같아요!”
이른 아침부터 건설 현장에서 전화가 왔다. 벽돌을 쌓아서 무거운 벽을 만들어야 하는데 얇은 벽돌을 타일처럼 붙이면 어떻겠냐고 묻는 것이다. 사실 이 건물에서 벽돌이 중요한 구실을 하는 건 아니었다. 무거운 벽돌을 쌓는 대신 가벼운 벽돌 타일을 붙이면 시공에 더 용이하고, 안전하고, 빠르게 지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단점이라고 하면, 그냥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마음 정도….
아주 오래전에 건물을 지을 땐 하나하나 돌을 쌓아야만 했다. 그것은 느리고 위험하고 무거운 방법이었다. 후에 철근과 콘크리트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건축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건물은 더 튼튼해졌고, 자유로운 형태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철근과 콘크리트가 건물의 뼈대가 되면서 돌과 벽돌, 나무 등 과거 건물을 지탱하던 재료는 모두 장식이 되어버렸다. 요즘 지어진 벽돌 건물에서 벽돌이 하는 일에 대해 설명하자면 무척 겸연쩍어질 수밖에 없다. 거짓말처럼 들리겠지만, 벽돌이 하는 일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겨우 벽돌 건물로 보이게 하는 것 정도밖에. 그러니 현장에서 벽돌을 쌓는 데 의문을 가지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어차피 나중에 보면 비슷할 것이고, 벽돌 타일을 붙여서 더 싸고 빠르게 지을 수 있다면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굳이 벽돌을 쌓아야 한다고 말했다. 현장 소장은 아주 답답해하는 말투로 몇 번이고 다시 설명했다. 벽돌을 쌓으면 시간도 늘어지고, 공간도 좁아지고, 시공도 까다롭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이 너무 고생스러워진다고 했다. 내가 보기엔 돌을 쌓는 것이 붙이는 것과는 좀 다른데 그것을 논리적으로 설득할 수 없었다. “보기엔 똑같아 보여도 엄연히 좀 달라요….” 전화기 너머에선 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연히…. 고생스러운 점이 좀 다르겠죠.”
맨땅에서 딱히 할 일이 없을 때 사람은 흙을 파거나 돌을 쌓으면서 시간을 보낸다. 군대에서 넘쳐나는 시간 동안 땅을 파고 돌을 쌓으며 깨달은 단 하나의 사실이다. 지루한 정치인들이 매일같이 땅을 파헤치고 무언가를 쌓아 올리는 것을 보면서, 학생들이 지루하게 앉아 있던 운동장이 온통 파헤쳐 있는 것을 보면서, 나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버릇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끊임없이 중력과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때운다. 그것이 사람의 한결같은 버릇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돌무지무덤’, ‘돌무지덧널무덤’ 같은 단어가 교과서의 꽤 앞부분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 버릇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됐는지 짐작할 수 있다. 성경에서도 꽤 앞부분에 돌 쌓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신의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높은 탑을 쌓으려고 하다가 신의 분노를 사게 된 이야기다. 신은 그 높은 탑을 허물어버리고 사람들의 언어를 모두 바꾸어버렸다. 성경에선 사람들이 그때부터 서로 다른 언어를 쓰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다른 언어를 사용하면서부터 사람들은 서로 다르게 살기 시작했다. 국경이 나누어지고, 사상이 나누어지고, 서로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다른 규칙 속에 살게 되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바뀌어도 사람들의 한결같은 버릇은 변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돌을 쌓고, 그릇을 쌓고, 동전을 쌓으며 시간을 때웠다. 그리고 그 속의 어떤 규칙 하나도 여전히 변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중력은 태초부터 조금도 변질되지 않은, 공룡처럼 오래된 규칙이다. 그리고 온 지구를 걸쳐 모두에게 통용되는 단일한 규칙이기도 하다. 건축물은 문화와 시대에 따라 모두 다르게 나타난다. 양식과 법규에 따라 이런저런 규칙이 시대를 흘러 지나가면, 그런 변화에 맞춰 건물 모양도 계속 바뀐다. 하지만 중력이라는 규칙은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 언어도, 화폐도, 사상도 모두 바뀌고, 심지어 신도 죽었다고 말하는 세상에 이토록 한결같은 것이 또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보면 무턱대고 쌓는 그 한결같은 버릇까지 무척 위대해 보인다. 세탁기 위의 빨래 더미가 바벨탑의 무거운 바위와 뉴턴의 사과나무와 똑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황홀한 일이다.
산의 초입엔 푸르른 나무가 있고 조금 걷다 보면 얕은 개울이 나온다. 그런 흔한 산에서 또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조약돌을 쌓아 만든 작은 돌탑이다. 그것 역시 사람의 한결같은 버릇인지, 사람들은 돌탑을 쌓으면서 소원을 빌곤 한다. 조금 더 걸어 올라가다 보면 작은 사찰이 나온다. 이것은 어느 특정한 산이 아닌 대부분의 산에서 볼 수 있는 여정이다. 사람들은 탑을 바라보고, 탑 주위를 빙빙 돌기도 하며 소원을 빈다. 중력이라는 힘의 유일성과 영속성은 우리가 기대하는 신의 속성과 꽤나 비슷하다. 나 역시 무언가를 위해 기원을 남겨야 할 일이 있다면 날아가는 바람, 혹은 아이디어 같은 데 기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소망을 맡겨 놓을 만한 영속적이고 절대적인 무언가를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의지해 무언가를 쌓아 올릴 것이다. 작은 돌을 쌓거나 높은 탑을 쌓으며, 사람들은 그렇게 중력과 대화를 나눈다.
그러므로 쌓는 것은 붙이는 것과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탑이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탑의 조형이 전부가 아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힘의 영속성과 중력에 맞선 긴 고집 같은 것이다. 탑은 본드나 부속 철물 같은 요즘의 언어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라틴어보다 히브리어보다 더 오래된 중력이라는 언어를 구사한다. 탑을 쉽게 만들려고 했다면 충분히 다른 방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돌을 위로 쌓는 대신 옆으로 길게 늘어놨을 것이다. 무거운 돌을 옮겨 높게 쌓는 대신, 높은 바위에 가벼운 돌을 붙였을 것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돌을 쌓는 행위는 쓸데없는 고집일지도, 일종의 부르주아적 페티시인지도 모르겠다. 현장 소장은 그런 걸 순화해서 고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고생을 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고생을 강요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 나는 죄송스럽게 말했다.
“죄송해요. 고생 좀 해주세요.” 힘들게 거절하는 목소리에 현장 소장은 한숨으로 순응한다. 그런데 난 거기에 그치지 않고 굳이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같아 보여도 좀 다르거든요.”
글·그림 한승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