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건 우연의 연속이다. ‘나만의 극장 지도’에 저장해둔 극장을 찾지만, 그곳이 정확히 어떤 극장인지 무슨 영화를 상영하는지는 잘 모른다. 어느 날 어떤 극장에 가게 될지조차 계획하지 않는 여행을 하는 사람에겐 지도에 별 표시를 해둔 것만으로도 엄청난 준비니까. 스페인과 포르투갈 여행을 바르셀로나에서 시작한 것은 축구 때문이다. 정해진 일정이라고는 밤 아홉 시에 시작하는 챔피언스리그를 보기 위해 FC바르셀로나의 홈 경기장인 캄프 누(Camp Nou)에 방문하는 것뿐이었다. ‘FC바르셀로나의 경기를 보는 것’과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다양한 극장을 찾는 것’이 여행의 목적이자 이유의 전부였다. 숙소에서 멀지 않은 극장에 가려고 걸었는데 너무 일찍 나선 탓인지 극장들이 닫혀 있어 아쉬움을 안은 채 점심을 먹었다. 유럽에서는 대형 멀티플렉스를 제외한 대다수 극장이 정오 이후부터(때로는 꽤 늦은 오후부터) 관객을 맞이한다. 물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다.
이런 연유로 목적지를 바꿨다. 지도를 보며 골목골목을 걷다 ‘이런 곳에 극장이 있어?’ 싶을 때쯤 필모테카 데 카탈루냐(FilmoTeca de Catalunya)와 마주했다. 꽤 규모가 큰 회색 건물이었고, 1층 유리창에 크게 붙은 극장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점은 주변의 주거지와 상점 건물들 사이에서 튀지 않고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으면서도 존재감을 뽐내는 극장의 모습이었다. 천편일률적으로 지어져 있는 한국의 극장 건물이 생각나 조금 씁쓸해졌다. 물론 대다수가 멀티플렉스라는 특성을 고려해야겠지만 말이다. 쿵쾅거리며 뛰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었고, 입구에서부터 공간에 온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그렇게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들어선 극장에서 그날 그 시간대에 상영하는 영화가 스파이크 존즈의 <그녀>일 가능성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행복한 기분에‘악’소리가 절로 났다.
바로 <그녀>를 보기로 하고 프로그래밍 된 영화 리스트를 훑는데 그 면면이 아주 근사했다. ‘Per amor a les Arts’라는 기획전은 <그녀> 외에도 에이슬링 월시의 <내 사랑>, 에릭 로메르의 <갈루아인 페르스발>, 폴 토마스 앤더슨의 <팬텀 스레드>, 장 자크 아노의 <장미의 이름> 등을 매주 화요일에 상영하는 장기 프로그램이었다. 평일 오후인데도 다양한 연령층의 꽤 많은 관객이 기다리고 있던 극장. 어쩌다 보니 <그녀>를 처음 발권한 관객이 되었는데, ‘특별한 첫 번째 손님’이라며 3유로에 티켓을 발권해준 친절한 매표소 직원도 생각난다(일반 티켓 가격도 4유로로 저렴한 편이다). 매표소 옆에는 영화 서적과 DVD 등으로 채워진 작은 서점과 음료와 간식거리를 판매하는 비스트로가 있어 많은 이들이 티켓 발권 후 기다림의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보내는 듯했다.
초기의 필모테카 데 카탈루냐는 전 세계에 카탈루냐 지방의 영화를 알리는 데 주력했다고 한다. 이후 복원 및 보존 센터(Centre de Restauració i Conservació)를 별도로 건립하고, 필모테카 데 카탈루냐는 상영관, 도서관, 전시실 등으로 구성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고. 앞서 언급했듯 티켓 가격이 저렴한 편인데, 전시의 경우 누구나 무료로 관람할 수 있으며, 도서관은 2유로로 하루이용권을 구매할 수 있다. 인근 거주자나 필모테카 데 카탈루냐의 방문이 잦은 관객을 위해 영화 10회 관람권(20유로), 도서관 연간 멤버십(10유로) 등도 마련되어 있다. 또한 ‘특별한 첫 번째 손님’이 아니라도 장애인 카드 소지자, 65세 이상의 노년층, 30세 이하의 청소년층 등은 할인가로 극장과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다.
아무런 정보 없이 방문했던 터라 도서관이나 전시실을 둘러보지 못한 것이 약간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마음에 꼭 든 공간의 일부를 살피고 머물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시간이었다. 의자에 앉아 <그녀>의 사운드트랙을 들으며 조용히 영화를 복기한다. 사운드트랙만으로도 영화 속 몇몇 장면은 또렷하게 되살아나 머릿속을 부유한다. 선연하게 그려지는 호아킨 피닉스의 표정, 영화 속 갖은 색채, 무엇보다 생생하게 들리는 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 하나하나를 떠올리며 영화의 결을 아로새긴다. 극장의 통유리 너머로 지켜본 바깥 풍경이 왜인지 낯설다. 방금 지나온 길인데도 말이다. 영화 속 프레임에 갇혀 있는 듯한 행복한 이질감과 함께, 그렇게 <그녀>와 다시 만났다.
필모테카 데 카탈루냐
A. FilmoTeca de Catalunya, Plaça Salvador Seguí, 1 – 9, 08001 Barcelona, Spain
H. filmoteca.cat
T. +34 935 671 070
We Around Project
내가 사랑한 유럽의 극장
씨네21의 객원기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작년 이맘때, 칸국제영화제의 <미치광이 피에로> 포스터에 매료되어 무작정 프랑스로 떠난 것이 유럽 극장 여행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유럽의 극장에 찾아가 머무르는 동안 보고 느낀 것을 글로 적어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