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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페도라와 검은 선글라스
빨간 페도라와 검은 선글라스
평론가 부부의 책갈피
우리가 꾸던 꿈의 빛깔과 우리가 잃어버린 마음의 색깔에 대해 이야기하며, 우리는 웃었다 그리고 울어버렸다.
그녀의 이야기
네 세계의 빛깔
갓난아기는 색깔을 분별할 수 없고,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는 모든 사물을 명암으로만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과학적 이론에 무지한 나는 이 사실이 더없이 이상하게 여겨졌다. 아무리 시력이 약해도 빛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모든 색을 공평하게 모르거나 알아야 하는 게 아닐까. 처음에는 빛과 어둠 같은 흑백만을 알고, 그 다음에는 붉은색과 초록빛을 알게 된다고 하는데, 아이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속도뿐만 아니라 그 방식은 알면 알수록 정말이지 기묘한 데가 있다. 그것은 한 사람이 태어나서 이 세상을 확인하고 파악하는 방식이기도 하지 않은가. 아이에게 이 세상은 환하거나 어두운 구석이 있는 곳이었다가,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는 서서히 붉은빛이 따듯하게 감돌고, 녹색의 청량한 느낌이 퍼져 나오는 그런 곳이려나. 아기가 자라나면서 알아가는 빛깔의 순서를 공부하다 보니 우리 집에 있는 아기가 왜 거실 벽에 붙여둔 그림을 골똘히 보며, 최근에는 혼자 슬며시 미소 짓다 못해 깔깔대며 웃는지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게 됐다.
내가 좋아하는 일러스트가 그린 그 그림은 거의 대부분 명암을 달리한 초록색으로 채워져 있다. 사람의 열 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나무들이 우거진 공원의 벤치에 한 여자가 앉아 있는 풍경이다. 하늘은 흰색이고 길은 분홍빛이 감도는 회색이고 벤치는 그보다 좀더 밝은 노란빛이다. 그 외에 모든 것이 풀밭과 나무의 서로 다른 초록으로 가득한 이 그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기는 누워서도 고개를 돌리고 눈을 치켜뜨기까지 하면서 그 그림을 빤히 본다. 아기는 저 울창한 녹색 속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있을까.
아기는 생후 8개월에서 1년 정도가 되면 성인 수준으로 색을 알고 구별할 수 있게 되고, 열 살 즈음이 되면 서로 다른 색깔에서 고유한 느낌 같은 것을 얻고 자기가 선호하는 색깔을 갖게 된다고 한다. 나 역시 분명 이런 과정을 지나왔을 텐데 아쉽게도 그 순차적인 변화의 계기와 세세한 변화들이 나에게 주었을 일종의 충격, 그로 인한 환희 같은 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밝고 어두운 것들만이 아른거리던 시야에 처음 붉은빛과 초록색이 등장했을 땐 얼마나 놀라웠을까. 말 그대로 ‘새로운 세계의 발견’이었을 그 느낌은 또한 어떤 빛깔로 표현될 만한 것이었을까. 내 눈앞의 세상이 점점 다양한 빛깔로 채워질 때 나는 어떤 꿈을 꾸게 되었을까. 아기를 보면서 속으로 그런 질문을 하다 보면 이 세계는 별다른 게 아니라 그저 무수히 다른 색깔로 채워진 공간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색깔은 단순히 시각에 의해 구별된 빛의 파장이 아니라, 어떤 예기치 못한 순간이 있고 그 순간이 발생시키는 고유한 느낌과 감정이 있으며 다름 아닌 그런 순간과 느낌이 우리의 세계를 속속들이 이룬다는 사실에 대한 증명이기도 하다. 노란색을 좋아하는 누군가는 노란빛이 자기 자신에게 주는 느낌을 좋아하며 그 좋아함의 역사에는 노란빛과 관련한 좋은 기억, 좋은 관계가 많을 것이다. 노란 사람과 노란 추억과 노란 이야기들이 그 사람의 세계 가운데 많은 부분을 이루며, 때로 그 사람이 힘들고 지치고 살아가는 일이 싫게 느껴지더라도 또 다른 노랑이 다시 그의 세계를 긍정할 수 있게 하는 빛이 되어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색깔에는 치유의 힘이 있는 게 분명하다. 누군가는 알록달록한 아이의 장난감이나 동화책의 삽화에서, 또 누군가는 산과 들과 바다와 바위 같은 데에서, 또 누군가는 때 묻지 않은 흰 종이와 그 위를 지나가는 펜의 검은 잉크 자국에서 알 수 없는 위안을 얻는다. 어릴 때는 미처 몰랐는데 나이를 먹으니 화려한 꽃과 원색의 화사한 무늬들이 좋아지더라는 이야기를 종종 들어왔는데, 이제 생각해보니 그건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에게 위안받을 일이 다양해진다는 말이 아닐까. 흑백의 단조로움 가운데에서도 스스로 빛날 수 있던 한 시기를 거쳐 제 자신이 어슴푸레한 그림자처럼 여겨지는 때가 오면 누구라도 다시 그 시절의 붉고 푸른빛이 그리워지지 않을까. 그 빛들만으로도 가슴에 기쁨이 충만해지는 듯 온몸으로 웃을 수 있던, 눈보다는 마음이 더 밝던 그 시절의 자신이 말이다.
다른 세계가 있다는 약속
‘세계’에 관한 한 최근 한국 소설에서 단연 돋보이는 상상을 발휘하는 작가로 손보미를 꼽을 수 있다. 손보미 소설의 세계는 단선적인 시간이 흐르는 단 하나의 공간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그의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누구에게나 동일한 의미나 역사를 갖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삼는다. 그의 소설이 갖는 묘미 중 하나는 독자로 하여금 서로 다른 세계들이 어떻게 겹쳐지고 만나는지 발견하게 하고, 또한 그 접점이 어떤 의미로써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는지를 상상하게 하는 데 있다. 시간은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살며 느끼고 나아가 어떻게 살아가기를 기대하고 결심하는지에 따라서 완연히 다른 차원으로 펼쳐진다. 게다가 지금 이 순간에, 그러니까 ‘동시에’ 내가 존재하는 여기가 아닌 곳에서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는 존재가 있다. 그것은 나는 서울에 있고 또 다른 존재는 평양이나 파리에 있다는 인식이 아니라,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감정을 가진 존재가 다른 차원의 시공간에 살아 있다는 상상이다. 내가 웬만한 일에는 상처받지 않을뿐더러 우는 일이 거의 없는 사람인 건 다른 세계의 누군가가 나 대신 사사건건 수시로 눈물을 흘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상상은 어쩐지 소중하다. 함께 살아가는 존재에 대한 공감이나 배려가 부족한 세계에서, 그 차갑고 팍팍한 경계 속에서 한번쯤 깊이 마음의 상처를 입어본 자라면 굳이 길게 말하지 않아도 ‘공존하는 것’에 대한 상상력이 지금 여기에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에 절실히 공감하게 될 것이다. 문을 열자 거기엔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치장하고 활기 넘치는 표정을 한 키 큰 남자가 서 있더군.
그는 줄무늬가 들어간 남색 베스트를 입고 그 안에는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착용하고 있었어. 커프스단추까지 하고 있었다니깐. 그리고 그의 머리에 얹힌 빨간 페도라가 정말 일품이었어. 정말 잘 어울리더라고. 이상하지. 전혀 어울리지 않을 조합이었는데, 정말 잘 어울리더라고. 거기서 하나라도 빠진다면 그 남자 존재 자체가 와르르 무너져버릴 거 같은 그런 느낌이었어.
– 손보미, <상자 사나이> 중에서
문을 여니, 거기에는 빨간 페도라를 쓰고, 하얀 와이셔츠와 줄무늬가 들어간 남색 베스트를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넥타이까지 하고 말이다.
– 손보미, <고양이의 보은> 중에서
손보미 소설이 그처럼 ‘다른 세계’에 대한 특유의 관점 내지는 상상을 보여주는 일로써 특별한 의미를 만들어낸다면 위의 두 단편은 그 상상의 과정에 선명한 색깔이 더해진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상자 사나이>와 <고양이의 보은>에서 사건은 어느 날 아침 문득 집으로 찾아온 ‘우편배달부’에 의해서 시작되는데, 이 배달부의 옷차림은 동일하다. 두 소설을 구성하는 인물과 사건과 배경은 전혀 다르지만 그 가운데 중요한 매개로 작동하는, 즉 초점화자를 ‘새로운 세계’로 초대하거나 인도하는 배달부가 “빨간 페도라를 쓰고, 하얀 와이셔츠와 줄무늬가 들어간 남색 베스트를 입”은 흔치 않은 차림이라는 점은 똑같다. 마치 이 배달부가 이 소설의 세계와 저 소설의 세계에 똑같이 방문함으로써 그 자체가 전혀 다른 두 개의 이야기를 연결할 수 있는 비밀스러운 통로라도 되듯이 말이다. 독자가 이를 발견할 때 소설에는 이야기가 갖는 의미 외에도 이 이야기 바깥으로 다른 세계에 대한 상상이 무궁무진하게 발휘될 여백이 펼쳐진다. 소설이라는 하나의 세계를 통해 독자들이 저마다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그 속에서 잠시나마 살아가며 나름의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소설의 한 효용을 손보미의 소설은 다른 세계로 주인공을 인도하는 배달부의 빛깔 선명한 옷차림을 통해 인상 깊게 새긴다. 빨간 페도라를 쓴 누군가를 만나면 그를 따라가진 못해도 왠지 오래 안도하게 될 것만 같다.
그의 이야기
그녀의 검은 눈동자
아는 친구 한 명은 외출을 할 때면 웬만해서는 선글라스를 벗지 않는다. 멋쟁이인 그 친구가 추구하는 스타일일 거라 추측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남들보다 유달리 큰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고, 커다란 검은 눈동자가 빛을 너무 많이 빨아들이기 때문에 선글라스를 쓰지 않으면 시력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진단을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녀는 남들은 잘 모르는 불편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였지만, 엉뚱하게도 그 이야기를 처음 듣는 순간 나는 그녀가 겪는 증상이 그녀가 쓰는 특별한 시와 어딘가 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식판을 들고 앉을 자리를 찾는 아이였다 / 식은 밥과 국을 들고 서 있다가 / 점심시간이 끝났다 / 문득 오리너구리는 어쩌다 오리너구리가 된 걸까 / 오리도 너구리도 아닌데 / 이런 생각을 하며 / 긴 복도를 걸었다 / 교실 문을 열자 / 아무도 없고 / 햇볕만 가득한 삼월
– 강성은, <Ghost> 중에서
식판이란 말이 어딘가 차갑다. 저 어휘의 어감이 어쩔 수 없이 먹어야만 하는, 먹는 일을 강요당하는 느낌이 든다면 과장일까. 하지만 말에 예민한 사람이라면 단어에서 색감과 온기를 감지하는 게 당연할 터. 아마도 시인은 일부러 식판이라는 말을 골라 써서 시 속의 아이가 겪고 있는 곤란함을 증폭시켰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던 걸까. 아이는 그 차가운 식판을 들고 자리를 찾지 못한 채 서 있다. 세상에는 자신의 자리를 영리하게 빨리 알아채는 사람도 있지만 한편에는 자신의 자리를 어디로 해야 할지 몰라 더딘 사람들도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있을 곳을 모른다기보다 내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자리를 선별하기 위해 숙고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사람도 있다. 저 아이가 겪었을 곤란 또한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을까. ‘내가 저기에 앉아도 될까’, ‘내가 거기에 앉아버리면 그 자리에 앉고 싶던 다른 친구가 곤란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종류의 속 깊은 고민에 휩싸인 상황 같은 것. 그렇게 시간을 끌다 보니 아이는 자기 혼자 외톨이처럼 남았을 것이다. 세상은 그러한 속 깊음에 쉽사리 응답해주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런 속 깊음은 요령 있게 잊고 빨리 성장하길(?) 바랄지도 모른다. 그게 바로 냉정한 현실이라는 듯이, 냉정을 과장하여 말하면서.
외톨이처럼 남은 아이가 자문한다. ‘오리너구리 어쩌다 오리너구리가 된 걸까’. 저 질문은 ‘나는 왜 나일까.’를 질문하는 성숙한 아이의 물음을 감추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왜 대개의 사람들처럼 누군가의 옆자리에 쉽게 앉지 못하는 ‘나’일까라는 물음이 어린이의 시선을 거쳐 변형되어 탄생한 질문. 아이는 어쩌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재빨리 엉뚱한 질문의 형태로 그것을 바꾸었는지도 모른다. 오리도 너구리도 아닌데 오리너구리가 된 이름처럼, 오리무중인 자신의 무능(?)의 기원에 대한 질문, 실제로는 짧은 복도였을지라도 그런 질문을 하는 과정에 그곳은 하염없이 길어만 졌겠고, 작은 머리가 경험했을 길고 긴 고뇌의 연속, 그리고 교실 문을 열었을 때 인적이 없는 교실에서 그녀를 환하게 맞아준 햇볕!
시인은 어려서부터 커다란 검은 눈동자를 지녔었을까. 엉뚱한 생각이 든다. 혹 저 텅 빈 교실에 내리쬐던 삼월의 햇볕을 강렬하게 느낀 그 순간 커다랗게 확장된 그녀의 눈동자가 영원히 커다란 검은 눈동자가 된 것은 아닐지. 그때부터 시인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계속 보아야만 하는 운명에 휩싸인 것은 아닐까. 이를테면 타인의 고통이나 슬픔 같은 것, 또는 사람의 속 깊은 곳에서 검게 타들어간 마음의 흔적 같은 것.
좋은 사람들이 몰려왔다가 / 자꾸 나를 먼 곳에 옮겨 놓고 가버린다 // 나는 바지에 묻은 흙을 툭툭 털고 일어나 / 좋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온다 // 쌀을 씻고 두부를 썰다 /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들고 / 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워 // 생각한다 / 생각한다 // 생각한다
– 강성은, <죄와 벌> 중에서
아이에서 어른이 되었지만, 시인은 여전히 세상에서 자신이 차지해야 하는 자리를 재빨리 선점하지 못한다. 게다가 어른들의 세계에는 아이들의 세계와는 달리 그런 약점(?)을 쉽게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그녀를 자꾸 세상의 먼 곳으로 옮겨 놓는다. 아마도 자신의 이익과 관련한 자리를 하나 더 늘리려는 계략이 거기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의 상처와 고통에 눈이 밝은 그녀의 검은 눈동자는 그들을 섣불리 나쁜 사람이라 여기지 않는다. 대신에 좋은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한다. 예전 학교의 복도보다 한참은 더 길 그 길을 오랫동안 생각하고 생각하며 돌아와 다시 또 생각한다. 마치 그 긴 생각의 색깔처럼 그녀가 먹는 밥과 반찬 또한 하얗고 하얗다.
남의 자리를 빼앗는 결과를 만들지 않기 위해 애쓰던 아이는 남의 자리를 함부로 논하는 사람이 아닌 어른으로 자랐다. 아이부터 어른의 시간 동안 수많은 손톱들이 그녀의 삶을 할퀴고 지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와 같은 삶은 우리 주위에 하나씩은 꼭 있기 마련이다. 나는 그것이 세상의 섭리요 또 잔인함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축복이면서 저주 같은 것이라고도. 선글라스 저편에서 보이지 않는 눈물을 오랫동안 홀로 흘리고 있을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 대해 상상하면 그런 생각을 피할 수 없다.
글 김나영, 송종원
사진 이자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