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ROUND
CLUB ONLY
SERIES
MEET AROUND
SUBSCRIBE
SHOP
우주의 슬하에서
우주의 슬하에서
평론가 부부의 책갈피
아기는 어느 날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왔다. 아기는 울고 웃고 때로는 우리를 가만히 바라본다. 그 알 수 없는 질서 속에서 나무가 자라고 꽃이 피고 구름이 지나간다.
그의 이야기
한쪽에는 어린 생명이 있고,
또 다른 한쪽에는 나이 든 존재가 있는 풍경
“우리 달콩이는 사우나베이비예요”
“네?”
“사우나베이비요!”
산후조리원에서 달콩이를 씻겨주고 먹여주고 재워주시던 간호사 한 분과 나눈 대화다. 하루에 한 번 있는 목욕 시간, 어떤 아기들은 몸에 물이 닿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경향이 있는데 달콩이는 그렇지 않다는 말로 해주신 표현이었다. 조리원에서 집으로 와 아내와 함께 긴장하며 달콩이를 처음 목욕시키는 순간, 아이의 몸을 어찌 잡아야 할지 몰라 나와 아내는 진정 온몸으로 허둥지둥했다. 그런데 불과 몇 초 후 우리는 둘 다 세상 근심을 모두 놓아버린 사람처럼 환하게 웃었다. 입수를 하자 극히 평온해진 달콩이의 표정 때문이었다. 옷을 벗기자 울먹이던 아이가 물에 들어가자마자 두 볼 가득 공기를 채운 표정으로 변하며 사방의 공기를 침묵 속으로 몰아넣었다. 엄마의 배 속에서 체험한 양수의 기억 때문일까. 물속에 넣었을 때 달콩이의 표정을 떠올리면 하루에도 몇 번씩 목욕을 시키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런데 달콩이 녀석에게도 정말 기억이란 게 있을까. 아이는 가끔씩 놀랄 정도로 너무 환하게 웃는다. 태어난 지 30일도 안 된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길래 저렇게 환한 미소를 짓는지.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를 웃게 한 무언가가 아이의 머릿속에 오랫동안 남아주면 좋겠다고 나는 남몰래 기원하고는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아마도 아이는 성장하면서 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처럼 무구한 웃음을 어른의 표정 속에서 본 적이 없는 듯하다. 달콩이가 태어나자 알았다. 아이와 어른은 연속적인 존재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차원의 존재라는 사실을.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는 게 아니라, 아이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돌변한 어른이 채우는 것이다. 아이는 자연에서 와 문화적 존재로 거듭난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의 어떤 상태는 어른에게는 절대 불가능한 순간이 되는 것은 아닐까.
어머니와 치과에 다녀왔다 / 몸이 자꾸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 어머니 손을 잡았다. / 어머니가 내 손을 꼭 쥐며 나를 올려다본다. / 어머니의 눈에는 깊고도 아득한, / 인류의 그 무엇이 있다. / 살아온 날들이 지나간다. /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
– 김용택, <우주에서> 중에서
아이가 태어나자 가족들이 모이는 날이 많아졌다. 모두가 새로운 가족 구성원을 반길 준비를 하고 아이를 만난다. 그런데 유독 다른 형식으로 아이를 맞이하는 가족이 있다. 아이의 할머니와 외할머니는 아이만 반기는 게 아니라 아이를 키우던 자신의 지난 과거를 다시 맞이하는 듯 보인다. 두 분의 어머니는 두 분의 인생에서 터닝포인트이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 아이 앞에서 말이 많아지고 행동이 민첩해지셨다. 아이와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처럼 말을 걸고 어려움 없이 아이를 안아 드는 모습은 어머니들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무엇이었다.
그런데, 어머니의 자리를 반복해서 경험하는 그녀들의 모습은 또한 예전 같지 않은 데가 있다. 아이를 맞이하며 웃는 그녀들의 표정엔 이제 엄마의 것만이 아니라 할머니의 것이 들어 있다. 깊고도 아득한 시간이 어머니들의 얼굴 위로 스쳐가자, 나는 아이를 만난 반가움과 나이 든 어머니의 얼굴을 만난 안쓰러움을 동시에 느끼기도 했다. 한쪽에는 어린 생명이 있고, 또 다른 한쪽에는 나이 든 존재가 있는 풍경. 나는 그 사이에서 어떤 질서를 느끼고 그것에 자연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본다.
아기님, 아기님이 이해하세요
요즘 내가 가장 즐거울 때는 달콩이의 기운 찬 트림 소리를 들을 때고, 가장 마음이 편할 때는 잠이 든 아이의 쌔근쌔근하는 소리를 들을 때다. 반면 가장 마음이 불편할 때는(이미 눈치 빠른 사람은 알아챘겠지만)달콩이가 울 때다. 나는 이제 막 태어난 아이를 돌보며 그 돌봄의 과정에서 발생한 결과들에 따라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삶을 살게 된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착각이라는 걸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달콩이를 안아 든 장모님께서 구전 민요 같은 재밌는 노래를 부르시는 걸 들은 이후 생각이 달라졌다. 흥부자인 어머니께서 달콩이를 만나러 우리 집에 방문한 날, 아이를 처음 안아 든 어머니는 이런 노래를 부르며 아이를 달랬다.
“아기님, 아기님이 이해하세요. 두 어른이 아무것도 몰라 아기님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어요. 두 어른도 아직 아이랍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내가 돌보고 있다고 여기던 존재가 오히려 나보다 더 높은 곳에서 나를 지켜보는 듯한 내용의 노랫말은 어떤 종류의 진실을 품고 있었다. 내 손에 아이가 커가는 게 아니라 아이의 시선에 내가 커가고 있던 것이다. 아이가 생기며 나는 부모의 자리에 들 수 있었지만, 그 자리에 들었다고 해서 바로 부모라는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아무것도 모르던 부모에서 조금씩 앎을 형성하는 부모로 성장하는 중이었다. 생각해보면 아이의 울음에 예민하게 반응한 이유도 그렇다. 사실은 부모로서의 내 무능이 노출될까 늘 노심초사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엄마는 나한테 가랑잎 같은 잔소리를 해요 / 그래도 나는 엄마에게 쪼그만 가랑잎이 되어요 / 엄마 무릎 아래 / 잠이 올 때까지 가랑잎처럼 뒹굴어요
– 문태준, <동시 세 편 – 가을> 중에서
저 아이는 어디에서 왔을까. 아이가 쌔근쌔근 잠이 드는 시간이면 아내와 나는 서로 바라보며 바보처럼 물었던 질문을 또 하고 또 한다. 신비하기 때문이다. 어느 먼 별에서 왔다는 말은 너무나도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사람들이 왜 그런 표현을 하게 되었는지는 너무나 이해가 간다. 멀리서, 전혀 다른 우주가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되는 것이다. 태어난 아이 덕분에 나도 오랜만에 우주의 슬하에 누워본다. 조그맣고 순한 사람이 되어 잠이 들고 싶다.
그녀의 이야기
내가 만난 세계
“여기 보이는 이것이 아기집이에요.” 이 한마디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인생이라는 말은 꽤 거창하지만, 아기가 생긴 이후로 달라진 것들의 목록과 범주를 설명하기에는 이 말조차 가볍게 느껴졌다.
배가 불러온다든가 가만히 있어도 숨이 찬다든가 평소에 좋아하지 않던 음식을 자다가도 찾게 된다든가 하는, 예상 가능하고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변화들은 정말 별것 아니었다. 예상하지 못한 일들의 연속이 임신 기간 내내 나의 몸과 마음을 집요하게 장악해나갔다. 임신과 출산에 관한 국민 서적이라 할 만한, 옛날 전화번호부 같이 두꺼운 책에 임신에 관한 증상과 대비책들은 주수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으나, 정돈된 정보들의 대부분은 거의 ‘알쓸신잡’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것은 알아두면 좋으나 실제로는 별로 쓸모없는, 내 몸과 마음의 변화를 설명하거나 이해하는 데에는 소용이 없는 텅 빈 말들이었다. 돌이켜보니 임신 기간 내내 나를 괴롭힌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지금 당장 나를 집어삼키는 이 변화의 정체, 가로막거나 사로잡을 수 없는 보이지 않는 힘의 인과를 나 자신이나 다른 누군가에게 설명할 마땅한 말이 없다는 사실 말이다.
말이 없는, 갖고 있던 말마저 잃어버린 시간을 보내며 나는 나의 시간을 상상으로 채워나갔다. 나의 취향과 편의로 채워진 공간을 정리하며 아기와 함께 살아야 할 집 안의 풍경을 상상하고, 허술한 이 세계를 부수고 다시 지으며 아기가 살아나가야 할 다른 세계의 모습을 상상했다. 내 상상의 속도는 아기가 자라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서, 여전히 내 머릿속에서만 완성된 집과 세계 속으로 예기치 못한 어느 날 문득 아기가 찾아오고야 말았지만.
아기의 첫 울음 소리, 티파니 블루 빛깔의 병원 강보에 싸여 있는 아기와의 첫 대면, 흰 속싸개에 돌돌 감겨 있는 아기를 처음 안았을 때의 무게와 온도, 그리고 그 모든 순간에서의 떨림은 감격을 넘어 거의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때 알았다. 내가 가진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있고, 말로는 표현할 수 없어 그저 마음으로 그려볼 수밖에 없는 것이 있지만, 이 둘은 모두 나 자신이 살아오던 완고한 삶의 형식 속에서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그 바깥에, 그 너머에 내가 말할 수도 없고 미처 상상해볼 수도 없는, 무한한 미지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아기와의 만남이 불러온 충격은 그런 세계로의 초대처럼 느껴진다. 아무것도 예상할 수 없기에 너무나도 두렵지만 기꺼이 응답하게 되는 일 말이다.
몸소 겪어보기 전에는, 그러니까 그 속에 내 몸과 마음을 담가보지 않고는 결코 알 수 없을 시간이 있다. 사람들은 흔히 그런 시간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뭉뚱그려 말하기도 한다. 이때의 자연은 지극히 당연하기에 두말할 나위 없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때로는 인간의 이해가 닿지 않는 완벽한 미지의 대상조차 자연이라는 이름으로 넘겨짚고 만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달라지는 아기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오물거리는 입과 앙증맞은 코와 특히 말 그대로 여러 행성을 담고 있는 우주 같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곳에서 나는 자연을 배운다. 자연히 내게 온 것 같은 이 아기는 내가 알 수 없는 시간을 지나 내가 알 수 없을 시간을 내게 보여주겠지. 이제 갓 태어난 이 세계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미리 말하고 상상하고 바라지 못할 것이다.
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아이에게 하는 입맞춤 하나하나는 내가 그토록 절실히 원했지만 받지 못했던 모든 입맞춤이다. 그리고 그 상처를 치유하는 데는 이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는 내가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이제는 내 사랑이 아이가 이해하기에 너무 큰 건 아닐까 걱정한다. 아이는 엄마의 사랑을 알 필요가 있고, 나는 내가 느끼는 이 풍요로운 사랑을 모두 표현할 능력이 없어 무력감을 느낀다. 이제 나는 내 아들이야말로 내가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기다렸던 기다림의 끝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 아이는 불가능한 동시에 불가피했다는 것을 깨닫고, 누군가의 엄마가 될 단 한 번의 기회가 한 번 내게 주어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다, 나는 이 아이의 엄마(이 말을 이제는 할 수 있다)지만 오직 내가 기대했던 엄마 노릇의 관념에서 나 자신을 해방시킨 후에야 엄마 노릇을 할 수 있었다.
– 호프 자런, 《랩걸》 중에서
인용된 부분 바로 다음 문장은 이렇다. “그렇게 묘한 것이 바로 인생인 것 같다.” 그렇다고 이 책이 인생에 관한 누군가의 깨달음이나 지루한 아포리즘으로 채워져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저자는 촉망받는 과학자이며, 이 한 권의 책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너무나도 진솔하고도 친밀하게 들려주는 그 자신의 인생인 동시에 한 훌륭한 과학자가 쌓아 올린 분명한 업적들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인생에 관한 가장 구체적인 경험, 가령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받은 애정과 결핍의 사례들까지 예로 들며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좌절하고 극복했는지를 들려준다. 물론 지질과 식물에 관해 연구하는 학자로서의 정체성 또한 분명하게 드러내면서 이 책 구성의 절반은 땅의 특질과 나무의 생리에 관한 설명으로 채워지지만, 그것조차 한편으로는 인생에 관한 비유로 읽힌다는 것이 이 책의 묘미이기도 하다. 결국 이 책은 사람과 자연이 어떻게 닮아 있는지, 사람이 자연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를 한 인간의 인생을 통해서 보여준다.
사람과 자연이 겹쳐지는 자리의 이름은 역시 사랑이다. 과학자이자 아내이자 엄마의 역할에 모두 충실해야만 하는 여성의 자리에서 그녀는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는 일이 곧 사랑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흔히 아들과 남편에 대한 애정과 존중으로 자신의 일을 포기하는 여성을 두고 사랑을 이야기할 때, 그녀의 삶은 그 무엇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사랑은 기존의 세상을 이루는 수많은 말과 관념들에서 자유로워져 오로지 “단 한 번의 기회”를 믿고 나아가는 마음의 힘으로만 가능하다는 것도. 누군가는 기회가 단 한 번뿐이라는 것에 좌절할 때, 다른 누군가는 단 한 번의 기회가 자신의 삶에 주어진 것에 깊이 감사한다. 그 감사의 마음에서 기회를 허비하지 않으려는 용기가 발휘되고, 그 움트는 용기가 때로는 우리의 말과 상상이 미처 가닿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사랑으로 태어난다.
글 김나영, 송종원
사진 이자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