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 부부의 책갈피

그 방을 귓속말 하고 싶어서

그 방을
귓속말 하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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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또 다른 방문이 나타났다. 다시 그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갑자기 오늘에 와 있었다. 이상하지. 시간은 어느 순간 우리 앞에 이상한 방문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

그의 이야기

버닝 하우스

비가 내리면, 그 방에서는 비가 몸 깊이 파고들어 마치 맨몸으로 비를 맞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양철 슬레이트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는 내 몸의 알 수 없는 열기를 더 끓어오르게 하곤 했다. 옥탑이라는 높은 물리적 공간은 이상하게 마음까지도 늘 어떤 높이에 올라서 있게 만들었다. 나는 그 방에서 토토로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와 1990년대의 마지막 여름을 함께 보냈다. 친구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지방의 소도시에서 서울로 유학을 온 신세였다. 또한 그와 나는 고향집에 가기를 특히 싫어했다. 월곡동의 후미진 골목에 자리하고 있던 그 옥탑방이 우리의 삶을 물적으로 풍요롭게 해줄 리는 만무했지만, 우리는 그곳에서 막무가내로 서울을 버텼다.

소멸되어가던 운동권의 언저리에서 활동하던 친구는 밤늦게까지 학교에서 어떤 모의를 자주 했고, 술에 취해 돌아와 한낮까지 잠이 들었다가 학교에 가지 않는 낮이면 낡은 은빛 카세트에 쟁가 테이프를 걸어두고 한참을 따라 불렀다. 나는 그런 친구 옆에서 만화책을 보거나 시집을 읽거나 소설책을 뒤적거렸다. “오늘은 뭐 없냐?”라고 물으면 친구는 정말 토토로의 웃는 표정과 똑 닮은 모습을 보여주며, “오늘은 그냥 종원이랑 놀까?” 하고 되물어오곤 했다. 나는 그의 표정과 다정한 말이 좋았으면서도 애써 그 마음을 들킬까 속이며 대부분은 “됐어 임마.” 하고 퇴짜를 놓았다. 그렇지만 때로 마음이 맞는 날에는 낡은 동네 골목을 돌며 책 대여점에 들러 읽을거리를 빌리거나 동네 슈퍼에서 먹을거리를 사와 낮술을 마시기도 했다. 둘 중 하나가 과외비를 받은 날은 특별했다. 그날 우리는 평소에 먹지 못하는 음식을 일부러 사 먹었다. 대학에 와서 처음 먹어본 아나고 회를 사 와 집에서 술을 먹거나 동네 구석에 있는 아주 저렴한 삼겹살집을 찾기도 했는데, 한번은 회를 잘못 먹어 장염에 걸린 기억도 있다. 

얼마 전 영화 <버닝>을 보다 그 방을 다시 떠올렸다. 우리는 우리가 특별히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우리의 생활 속에는 우리의 가난이 지닌 열패감이 늘 일정 부분 작용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고향에 내려가는 일은 이상하게 비감해지는 일이기도 했다. 서울이라는 대도시의 하늘 아래 우리의 자리가 녹록하지 않다는 것을 애써 감추며 하릴없는 백수를 흉내 내고 있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들었다. 욕망을 태울 수 없는 돈을 넉넉하게 가져본 적이 없는 우리는 술로 시간을 태웠고, 노래와 시로 정신을 태웠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제와 타고 남은 재가 뿌연 기억으로 남아 그렇게 스크린을 가로막았다.

너는 대체 무슨 방을 원했느냐고 물을 것이다. 나는 원했다. 아무도 없는 방과 혼자 있는 방과 같이 있는 방을.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너는 물을 것이다. 이 방은 이미 실현됐다고 말할 것이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나 혼자 너와 얘기하고 있으니 심심하고 무료하고 떠들썩하기까지 한 이 방에서 누가 먼저 나갈 것인가. 나는 아니다. 너도 아니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 김언, <방> 중에서

그 옥탑에서 우리가 견디던 시간은 어디로 흘러갔을까. 그 방에서 나와 친구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몰랐지만, 때때로 정말 바보같이 즐겁기만 했다. 아니 어쩌면 그 방에서 친구와 나는 정말 불가능한 무언가를 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가난이 삶을 덜 욕망하는 조건이 되지 않기를 원했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듯한 일상이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님을 증명하려 했다. 그리고 아마도 가장 원했던 일은 불가능한 일을 꿈꾸는 게 어리숙한 일이 아님을 꿈꾸었을지도.

사랑은 탄생하라

사람은 탄생하라 / 사랑은 탄생하라 // 우리의 심장을 풀어 다시 / 우리의 심장 / 모두 다른 박동이 모여 / 하나의 심장 / 모두의 숨으로 만드는 / 단 하나의 심장

– 이원, <사랑은 탄생하라> 중에서

두 아이의 아빠가 된 친구를 지난봄 그의 고향인 춘천에서 만났다. 그날 그의 아내와 두 아이와 함께, 그리고 나의 아내와 아내의 배 속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도 함께 친구가 모는 차를 타고 어둠이 내려앉은 강변도로를 지나는 중이었다. 나는 그때도 잠깐 그 옥탑방을 떠올렸다. 20여 년 전 일이 마치 어제인 것만 같아 혹 차 안에 함께 있는 아내들과 아이들도 이미 그때 그 옥탑에 우리와 함께 있던 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왠지 그런 느낌이 휘어지는 길을 따라 계속 따라붙었고, 차창 밖의 어두운 강물은 그 느낌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흐르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 순간 친구의 아이들이 노래를 합창하고 있었다. 아내는 요즘 아이들이 좋아하는 어떤 애니메이션의 주제가라는 사실을 내게 알려주었다. “언제나 위험할 때 시계를 돌려봐요. 헬로헬로카봇카봇 너무 너무 좋아 너무나 멋있어.”라는 가사는 어떤 주문 같기도 했다. 아빠 한 명과 엄마 한 명, 그리고 예비 아빠 한 명과 예비 엄마 한 명이 아이들 노래에 반응하며 웃기도 하고 박수도 쳐주었다. 나는 일부러 큰 소리로 “대단하다 윤후! 대단하다 윤솔이!” 같은 말을 추임새로 넣었다. 아무래도 그래야만 할 거 같았다. 대단한 것들이 많았다. 합창하는 아이들만 대단한 것이 아니라, 그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과 그 시간에 앞서 흘러간 오랜 시간들, 그 시간들을 통과해온 삶들이 다 대단하다고 여겨졌다. 아이들의 노래와 1999년 여름 옥탑에서 친구가 듣던 노래는 전혀 다른 거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닌 거 같았다. 두 노래 모두 ‘모두의 숨으로 하나의 심장’을 만드는 노래의 기운을 담고 있었다. 여러 의미로 넉넉하지 않은 시간을 통과하면서도 사람이 사람을 탄생하게 하고, 탄생한 새 생명이 노래를 배우는 과정이 경이롭기까지 했다. 마주 오는 차의 환한 불빛이 눈앞을 캄캄하게 했을 때 생각났다. 불가능하던 일들을 조금씩 가능하게 만들어온 시간이 사람들의 삶 속에서 빛을 내며 튀어나오는 순간이 있다는 사실을.

그녀의 이야기

꿈꾸는 방

어릴 때부터 나만의 방을 갖고 싶었지만 식구들이 저마다 방 하나씩을 차지할 만큼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나에겐 세 살 터울 여동생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 바람은 언제나 바람에 그칠 뿐이었다. 동생과 함께 쓰던 ‘우리 방’에서는 방이라는 공간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는 모든 것을 공유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이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킨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덕선이가 언니와 한 방을 쓰면서 겪는 에피소드(언니 옷을 입고 학교에 갔다가 엄마의 호출을 받고 쏜살같이 집으로 뛰어오는 장면이나 싸운 뒤 등을 돌리고 누워서 덮은 이불을 찢어질 듯 서로 잡아당기는 장면 등)는 정말이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왜인지 여동생은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호시탐탐 내 책상 서랍을 노렸다. 절대 열어보지 말라고 당부하던 그 서랍 속에는 내가 아끼는 것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생일날 친구들에게 받은 선물 중에서 너무 아끼는 나머지 쓰지 않은 필통, 연필, 지우개 같은 학용품과 작은 손지갑이나 열쇠고리 같은 것들을 거기에 넣어두었고, 심지어 일기장과 몰래 모아둔 몇 푼의 용돈도 그 서랍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었다. 물론 그곳에 그런 것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동생만 알았을 리는 없지만, 그걸 건드리는 사람은 꼭 동생뿐이었다. 내가 아끼느라 몇 년을 보관만 해둔 연필 한 자루를 동생이 연필깎이에 넣어 곱게 깎은 날에는 거의 전쟁처럼 싸웠는데, 그날의 날씨며 아빠 엄마가 입고 있던 실내복의 무늬와 저녁 반찬의 냄새까지 여전히 생생하다. 결국 둘 다 내복 차림으로 쫓겨났고, 앞집 아주머니의 손에 이끌려 그 집 저녁상에 끼어 앉아 좋아하지도 않던 뭇국을 억지로 먹던 일도. 

이상하지만 나만의 방과 내 공간을 향한 열망은 동생과 매일 격투하던 작은 ‘우리 방’에서 탈출하길 바라는 열망으로 이어졌다. 전교생이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된 이유 중에 적지 않은 비중을 그 열망이 차지했다. 그 선택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는 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처절하게 깨달았지만. 기숙사에서는 네 명이 방 하나를 썼다. 이층 침대 두 채와 작은 옷장 네 채, 책상 네 개, 신발장 하나가 전부인 작은 방. 이 방에서는 구성원의 합의에 따라 세면 바구니 속 물건들, 샴푸나 폼클렌징 등을 공유하기도 했고, 사이즈가 같을 때는 티셔츠나 교복 윗도리를 서로 빌려 입기도 했다. 문제는 합의 없이, 독단적으로 남의 물건에 손을 대거나 때로는 훔치는 일이 종종 있었고, 그런 일이 한 번 일어나면 한동안은 기숙사 내부에 삼삼오오 모여 쉬쉬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는 데 있었다. 기숙사라는 벗어날 수 없는 거대한 방이 산산조각 나는 느낌, 그 날카로운 시선의 파편에 모두가 찔려 괴로워하던 시간들. 물론 친구들과 함께 살며 만들게 된 기숙사 특유의 재미난 추억도 많지만, 그 기억 속의 방은 누구나 소중한 것 하나씩을 잃어버리고 두려움과 배신감에 떨며 눈물을 흘려본 곳으로 남아 있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결국 나만의 방을 가져보지 못했기에 결혼을 준비하며 신혼집을 구하러 다닐 때의 기분 역시 평생 잊지 못할 듯하다. 빛이 잘 드는지, 바닥과 벽의 상태는 좋은지, 수도의 수압은 어떤지를 주로 확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방의 생김생김을 눈여겨보았다. 이 방은 어떤 용도로 쓰면 되겠다, 이 방은 또 어떻게…. 처음으로 내 마음대로 계획할 수 있는 방의 미래를 꿈꾸는 것은 너무나도 설레는 일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살림을 채우고, 방이 아닌 집의 규모 속에서 꾸려나가는 생활에 익숙해지니 여러 개의 방은 방이 아니라는 아이러니한 생각도 하게 되었다. 내가 가진 단 하나의 방이란 남편과 내가 언제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여러 개의 방이 아니라, ‘나만이 여닫을 수 있는 문이 달린 어떤 공간’이지 않을까. 그 옛날 우리 방에 있던 내 책상의 맨 아래 서랍처럼.

그녀들의 방

내 방은 세 평 남짓한 크기이다. 방안에는 세 칸짜리 분홍색 서랍장 하나, 오른쪽 모서리 귀가 닳은 한 칸짜리 금성냉장고 하나, 그리고 생리중에 흘린 피가 까맣게 말라 있는 아이보리색 요 한채와 장미가 무더기로 그려진 이불이 있다. 세 칸짜리 서랍장 중 언제나 한 칸은 양말이나 티셔츠가 기어나와 완전히 닫히지 않은 채 이가 물려 있고, 냉장고 옆의 책장에는 몇 개 안되는 씨디와 책들이 있다. 대개 서태지, 김현철, 이승환, 너바나, 비틀즈 등의 씨디다. 방문 쪽 콘센트에는 항상 휴대폰 충전기가 노란불을 켠 채 충전돼 있고 방바닥엔 군데군데 담배빵 자국이 나 있다. 다른 여자들의 방을 본 적은 없으나, 우리들 방 앞엔 각기 비슷한 크기의 쓰레기봉투가 문패처럼, 혹은 문앞을 지키는 개처럼 웅크린 채 놓여 있다.

– 김애란, <노크하지 않는 집> 중에서

최근까지의 한국 단편 가운데에서 방에 관한 인상적인 소설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들 수 있는 것 중에 하나가 김애란의 <노크하지 않는 집>이다. “반지하와 1.5층, 2.5층”으로 되어 있는 기이한 건물의 1.5층에는 다섯 개의 방이 있고 각 방에 한 명씩 다섯 명의 여자가 이곳에 산다. 현관에서 가장 가까운 방에 산다는 이유로 “주인 아주머니는 나를 1번방 아가씨”라고 부른다. 번호가 매겨진 다섯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소리와 냄새로 짐작하고, 때로는 ‘포스트잇’에 적힌, “밤 열시 넘어서는 세탁기를 돌리지 맙시다” 같은 종류의 경고문으로 서로의 요구와 성격을 확인한다. 어느 날 나는 현관에 벗어둔 신발을 잃어버리고, 그 이후 빨래를 방 안에 널고 신발도 책상 밑에 보관하며 서서히 그 사건을 잊어버린다. 그러던 어느 날 방에 돌아온 나는 잃어버린 구두가 방 한가운데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불안에 사로잡힌다. 이 불안감은(비록 꿈이긴 하지만) 나로 하여금 나머지 네 개의 방문을 열어보게끔 종용한다. 놀랍게도 5번 방의 모습은 나의 방과 완전히 같았고, 모든 방문이 내 방문의 열쇠로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4번 방의 문도 열어본다. 

“그리고 세 번째, 그리고, 끝끝내 마지막 방까지. 나는 기어이 목격하고야 만다. 내 방과 가구에서부터 옷, 장신구, 책, 그리고 방바닥에 난 담배빵 자국까지 하나의 오차도 없이 징그럽게 똑같은 네 여자의 방을.”

– 김애란, <노크하지 않는 집> 중에서 

이렇게 나와 타인을 철저히 구분하고 보호해주는 듯하던 방은 개인의 사생활과 고유함을 전혀 보장하지 못하는, 오히려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생활의 형식과 내용을 만들어내는 공간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이 소설은 절묘하게 보여준다. 이를 단순히 현실과 꿈의 배치로 인한 것이라고 하기에는 실제로 우리의 삶이 그렇다. 현대의 생활에서는 저마다 취향을 사수하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그럴수록 비슷한 삶의 양태에 맹목적으로 적응하는 일이 되어버리기 일쑤다. 작가가 이 소설의 말미에서 그녀들은 모두 ‘나’라고 말하는 이유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볼 수 있지 않을까.

모든 방은 그 방의 주인을 닮아 있다. 하지만 주인이 여럿이라면, 혹은 주인이 다른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닮아가고자 한다면 그 방은 과연 무엇을 닮게 될까. 더 이상 소중한 기억과 저만의 비밀이 간직된 서랍 같은 곳이 아니라면 그곳을 우리는 방이 아닌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책상에 엎드려 꾹꾹 눌러쓴 일기장이 없고, 이불 속에서 볼륨을 높였다 줄였다 하며 라디오를 들어본 기억이 없는 곳을 나만의 방이라고 부르는 게 어색하다면 그런 나는 여전히 현실감이 부족한 채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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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나영, 송종원

사진 이자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