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 부부의 사생활

책이 나인지 내가 책인지 우리의 서재 이야기
책 가까이의 사람들

책이 나인지 내가 책인지
우리의 서재 이야기

평론가 부부의 사생활

우리는 문학 평론을 쓰는 부부이지만, 지금부터 평론이 아닌 새로운 글을 써보기로 했다. 하나의 주제에 대해 같고도 다르게 펼쳐질 우리의 이야기가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라는 형식적인 구분을 지우며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이길 기대한다. 그 첫 페이지에 우리의 책과 방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다.

그녀의이야기

책과 같이
사는 일

나와 남편은 문학평론가다. 둘 다 책 읽는 걸 좋아하고 글쓰기를 업으로 삼은 것을 행복이라 여긴다. 하지만 우리가 책을 다루는 방식은 너무도 다르다. 나는 모든 책을 새것처럼 관리하려 애쓴다. 책이 너무 활짝 펼쳐져서 책등에 주름이 지거나 페이지가 낱장으로 분리되지 않도록, 바로 눕거나 엎드리는 편한 자세를 오래 유지하지 않고 기어코 불편함을 감수하며 책을 읽는 편이다. 책에 밑줄을 그어야 하는 상황이면 지우개로 지울 수 있는 색연필을 사용하지만 그보다는 표시해두었다가 떼어낼 수 있는 포스트잇이나 책갈피를 선호한다. 종종 무심코 책을 펼쳤을 때 그 안에서 잘게 찢긴 영수증 조각들이 쏟아지기도 하는데, 그것은 주로 동네 카페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내 습관의 한 흔적이다. 커피를 사 먹고 받은 얇은 영수증 한 장을 대여섯 조각으로 찢으면 훌륭한 책갈피가 된다. 한편 남편은 어떤 책이든 쓱쓱 밑줄을 긋고, 페이지의 귀퉁이를 접는다. 밑줄을 그을 때는 바로 손에 잡히는 펜을 쓴다. 다행히(!) 연필일 때도 있지만 대개는 유성펜이고 남편은 그것을 별로 개의치 않는다. 책의 표지를 싸고 있는 띠지를 책갈피처럼 쓰는 나와 달리, 남편은 그것은 안에 든 것을 수월히 확인하기 위해 벗겨내는 게 좋은 포장지와도 같다. 언제라도 우리집에는 남편이 걷어낸 띠지들이 알맹이를 잃어버린 애달픈 형상으로 굴러다니고, 나는 그것을 주워 보고 있는 책 사이에 끼워 넣기 바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나와 남편이 책을 읽는, 혹은 접하는 속도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한 권을 꽤 오랜 시간 동안 붙들고 있는 반면에 남편은 속독과 다독(물론 여기에서는 그 비교 대상이 나뿐이지만)으로 같은 시간 동안 꽤 여러 권의 책을 만난다. 나는 우리의 이런 차이에서 ‘책을 다루는 방식이 그것을 대하는 태도와 같지 않다’는 증거를 발견한다. 책을 귀하게 취급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묻다 보면 누군가는 책에 티가 묻지 않도록 조심해서, 마치 도서관에 비치된 책이 그러해야 하듯 되도록 모든 사람이 일정한 컨디션의 책을 읽을 수 있게 유지하고 보관해야 한다고 답한다. 반면에 같은 물음에 대해 다른 누군가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적 물질적 여유에 한에서 가능하면 많은 책을 접하고 그것들과 대화하고 교감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답한다. 책을 대하는 태도를 이 두 경우에 한정할 수 없지만, 둘 중 어느 쪽이 책을 더 아끼는 사람의 태도라고 결정 내리기는 어렵다는 것은 분명하다. 

함께 살며 많은 부분 삶의 방식이 닮아버린 우리의 경우에도 책에 있어서는 각자 자기의 방식을 고수할 수밖에 없어서, 오래 두고 자주 펼쳐 보아야 하는 책은 꼭 두 권을 소장한다. 비좁은 책장을 눈으로 훑다가 드문드문 나란히 꽂힌 쌍둥이 책들을 마주칠 때면 기분이 이상한데, 마치 그 책들이 독립된 인격을 가진 개체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정말로 한 권의 책에도 수많은 운명이 있어서 그 책이 만나는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어떤 책이 나를 만나 얼룩도 주름도 하나 없이, 하지만 외롭게 제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것과 달리, 같은 이름과 같은 외모를 가진 책이 남편을 만나 제 나름의 산전수전을 겪고 한 인간의 생활에 고스란히 동행하며 제 몸의 부피와 색깔을 만들어가는 것. 나란히 꽂힌 두 권의 책은 각자가 놓인 환경을 개별적으로 호흡하는 두 쌍의 폐, 혹은 제가 겪은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해 보이는 다른 신체 부위의 피부처럼 보인다. 제목이나 그 내용이 품고 있는 형이상학적인 의미와 무관하게, 어쩌면 책은 너무나도 명징한 육체이지 않은가.

거실 겸 서재에서
16.52세제곱미터짜리 책방으로

우리에게는 처음부터, 그러니까 신혼집을 구할 때부터 책을 수납할 공간이 중요했다. 옷이나 신발, 그릇과 가구와 가전제품 등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점에서 비슷했던 우리가 결혼하고 나서 각자의 살림살이를 합칠 때,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가장 부담스러운 부피를 차지하는 것은 책이었다. 동생과 함께 살았던 자취방의 한 구석을 엄연히 차지하고 있었지만 오랜 시간 그 방의 일부분인 듯 무심히 취급했던 책더미는 결혼을 앞두고 처음으로 나의 공간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평생을 함께 살 식구로 인식되었고, 그 생각은 설렘보다는 부담스러움을 일으켰다. 각자가 가진 걸 합치면 어림잡아 몇천 권은 될 것 같았던 책을 어디에 놓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은 우리가 함께 살 첫 집을 보러 다니는 과정에서 최종결정의 보루였다. 책을 수납할 공간이 부족하거나 애매하게 나누어 집안 곳곳에 배치해야 하는 구조일 경우 다른 좋은 조건들을 갖췄어도 과감히 포기하게 됐다. 

그렇게 구한 우리의 첫 집은 지은 지 십 년이 조금 넘은 작은 빌라였다. 그 빌라의 구조는 집 전체 면적보다 거실이 월등하게 넓었는데, 나는 그 집을 보러 처음 들어설 때부터 ‘이 넓은 거실이 우리의 첫 서재구나’ 하고 생각했다. 어쩐지 주방의 타일이 얼마나 낡았는지(이 때문에 우리가 첫 부부싸움을 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그때는 미처 몰랐다), 욕조와 변기가 깨끗한지 아닌지에 무감해진 채로, 늦겨울 오후의 햇빛이 잔잔하게 내리깔리는 널찍한 거실만으로 나는 “좋아” 하고 소리 내어 남편에게 말해버렸다(집을 계약하기 전에는 그렇게 직접 호의를 표하는 것이 좋은 태도는 아니라는 걸 역시 그때는 미처 몰랐다). 이렇게 우리의 첫 집은 우리의 첫 서재를 중심에 두고 생겨나고 꾸며졌다. 디자인이나 재질 같은 것을 따지기보다 가격 대비 더 많은 책이 수납되는 책장을 인터넷으로 주문해서 너른 거실 벽에 둘러 세우고 그 책장을 우리의 책들로 빽빽하게 채웠다. 그러고 나니 나는 비로소 책과 관련한 삶 속에 한 걸음 들어선 기분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오면 중문의 격자 유리 너머로 바로 보이던, 한 치의 틈도 없이 책으로 빼곡히 채워진 책장들. 그 덩치 큰 책장 다섯 채는 이사를 하면서 되팔았는데, 초여름 한낮에 인상도 좋고 서로 사이도 좋아 보이던 부자父子가 일 톤 트럭을 끌고 와 우리집이 있던 3층에서부터 1층까지 손수 짊어져 나르던 일은 왠지 미안하고 슬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지금 여기, 우리의 두 번째 집으로 이사를 오기 전에는 인테리어 공사를 했다. 오래된 건물인 데다가 전에 살던 사람의 관리가 워낙 소홀했던 터라 대대적인 보수가 필요했다. 이 과정에서 역시 우리는 새집의 가장 넓은 공간을 우리의 서재로 삼기로 하는 데 한 치의 고민도 없었다. 신혼집에서 사 년을 살았지만 처음과 달리 늘어난 것은 마치 자가증식하는 것만 같은 책들뿐이었다. 나는 단행본의 평균 두께와 높이를, 서재로 쓰기로 한 방의 벽면의 너비와 높이를 측정했다. 책장이 차지하는 공간 역시 최소화하기 위해서 벽에 찬넬을 설치해서 선반을 끼워 넣고 책을 수납하는 방식을 계획했고, 선반으로 쓸 나무의 두께와 간격을 계산했다. 난데없이 무선노트에 제도용 샤프와 자를 챙겨 다니며 구상도를 그리고, 인테리어 업체를 찾아다니며 끝이 없을 것만 같은 상담을 받았던 그날들의 나를 기억한다. 책이 나인지 내가 책인지 알 수 없었던 그날을 무사히 통과한 다음에 기어코 우리가 가진 책이 하나의 방에 모두 수납이 되는 날을 맞이했을 때의 감격은, 이사 당일 내가 남편에게 던진 한마디 말에 담겨 있다. 나는 엄격한 선생처럼 책방의 문지방을 가리키며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단 한 권도 여길 넘어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좋겠어.”

동몽이상同夢異床

나에게 서재는 책방이다. 서재가 아니라 책방이라고 부를 때, 이곳은 방을 사용하는 사람이 주체가 되어 주체의 행위에 맞는 용도로써 이름 붙일 수 있는 공간이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책이 주인인 곳이다. 책은 베란다를 확장해서 통창이 된 한 면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면의 벽을 장악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석순처럼 방바닥 여기저기 들쑥날쑥 쌓여 솟아나며, 그렇게 작은 육면체로 큰 육면체를 장악해나가는 중이다. 나는 책방에서 몇 권의 책을 사냥해서 그것을 요리할 새로운 공간으로 전전한다. 카페의 테이블, 도서관의 책상, 동네 공원의 벤치……. 반면에 남편은 책방 옆 주방 식탁을 책상으로 쓴다. 오늘도 우리는 같은 책을 서로 다른 책상 위에 펼친다. 확실히 우리 삶의 구심점은 책이며, 이 작은 사물이 우리를 어떻게 밀어내고 다시 당겨오는지를, 책 한 권 읽기 어렵도록 어지럽지만, 결코 지금의 모습을 포기할 수 없는 우리의 책방을 통해 실감한다.

그의이야기

책의 침묵,
책의 상처

고요함 또는 침묵. 서재를 떠올리자 제일 먼저 생각난 단어들이다. 서재라는 단어에는 고요한 시간의 향기가 묻어있다. 왜일까. 서재가 주로 침묵 속에서 책을 읽는 장소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책이 내뿜는 아우라의 영향이 크다. 책은 대부분 수많은 말의 기록이다. 하지만 한 권의 책이 묶이고 나면 거기에는 단단하고도 거대한 침묵이 새겨진다. 침묵과 책, 이상한 조합이 아니다. 생각해보면 꽤 자연스러운 결합이다. 말이 있는 곳에 언제나 침묵이 있다. 말 뒤에 항상 침묵이 온다. 무슨 말인가. 가령 사랑을 고백하고 나서 남는 이상한 찜찜함을 떠올려보자. 내가 진정하려고 했던 말은 이게 아닌데 하는 그 기분 말이다. 우리는 사실 대부분 언어의 가난 속에서 산다. 

책과 침묵에 대해서라면 조금 다른 관점에서도 말할 수 있다. 누군가는 책 속에 길이 있다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딘가 부족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하면 마치 살아가면서 마주친 어떤 문제와 관련한 해결책이 책에 들어있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정말 그럴까. 내가 존경하는 한 선생님은 말했다. 현실의 계기는 무한하고 책은 유한하다고! 대부분의 삶은 책이 제시할 수 있는 해결책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더 많은 문제를 품고 있을 뿐 아니라 수시로 변화하기까지 한다. 그러므로 정직한 책은 문제를 겪는 중인 사람에게 이것이 길이요 해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에 좋은 책은 삶의 어려움을 겪는 동안 우리의 마음에 새겨진 상처와 비슷한 것을 자신도 가지고 있다고 꺼내어 보일 뿐이다. 

때론 이야기 속에, 혹은 우리의 삶과 관련한 어떤 추상화된 개념에 대한 설명 속에도 상처는 자리한다. 물론 직접적인 언급을 넘어선 침묵의 형태로. 별다른 이야기가 아닌데, 또는 잘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인데도 불구하고 책에서 그것들을 읽고 어떤 쓴맛을 곱씹으면서, 인생의 비의를 알아낸 듯 큰 감명을 받거나 힘을 얻는 순간이 있다. 이상하게도 인생이 아름답다고 말해주는 이야기나 삶을 명확하게 정리해주는 개념은 수상할 뿐이다. 대신 고통스러운 이야기나 골치 아픈 개념들이 오히려 삶의 기운을 북돋는다. 변태 같지만 어쩔 수 없다. 얼마 전에는 한 책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우리는 시간의 둑이 무너져 시간의 강물을 조절하고 리듬감을 부여하는 삶 속에서 멀어진 채로 살고 있다. 이 구절을 읽고 그렇게 좋았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서 망가진 부분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 같아서 그랬던 거 같다.

아내의 방

우리집 서재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이야기가 다소 엉뚱한 데로 흘렀다. 앞에 쓴 글을 다시 읽어보니 말투도 약간은 평론투다. 직업병이다. 슬프다고 적으려다 만다. 대신 이제 정말 우리집 서재 이야기를 산문가처럼 써봐야겠다고 손깍지를 끼며 다짐했다. 우리집에서 내 방은 거실과 주방 어디쯤이다. 우리집에는 방이 세 개 있다. 그중 가장 작은 방은 옷방으로 쓴다. 중간 크기의 방 하나가 침실, 그리고 남은 가장 큰 방 하나가 서재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꼭 우리집의 주인이 책인 것도 같다. 어쩌면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이 집으로 이사하고 나서 처음 놀러 온 누군가는 우리집의 가장 매력적인 인테리어가 바로 책이라고 콕 집어 말해주었다. 그런데 어쩌지! 우리집 서재에 대해서라면 나는 조금 침묵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거기는 아내의 방이기 때문이다.

우리집 서재는 나에게 책을 꽂으러 가거나 뽑으러 가는 공간이다. 나는 그 책을 식탁에 앉아 읽거나 거실에 배를 깔고 읽는 편이다. 아내가 그닥 탐탁지 않게 여기는 행동이다. 이사 온 첫날 완성된 서재를 보면서 아내가 나에게 처음 한 말이 있다. 이 집에서는 책이 서재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당부였다. 아내는 깔끔한 성격대로 집의 구획을 명확하게 하고 싶었던 거 같다. 그 당부를 나는 잘 지키지 못하고 살고 있다. 미안해요, 콩자씨!(나중에 밝히려고 했는데 내가 아내를 부르는 별명은 콩자다) 변명하자면 나는 이사 오기 전 집에 살 때 책상처럼 썼던 식탁이 그냥 내 익숙한 책상 같았고 서재에 둘이 들어앉아 글을 쓰게 되면 내가 아내를 거슬리게 할 거 같아 염려되었다. 아내는 정적이고 나는 동적이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그렇지 않은 편인데 아내 앞에만 서면 나는 작아지는 게 아니라 산만해진다. 

나는 가끔 책을 뽑거나 꽂으러 서재에 들어갔다가 아내가 없는 아내의 공간에서 아내의 분위기를 느낀다(이건 정말 변태 같군). 아내의 책상 위에는 마른 꽃이 있고, 핸드크림이 있고, 엽서가 있다. 아내는 집에 들인 꽃을 함부로 버리지 않았다. 꽃이 지더라도 늘 그것이 잘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 또 아내는 종종 나에게 엽서를 쓴다. 거기에는 나에게 서운했던 일들이 빼곡히 적혀 있을 때도 있고 어떤 날에는 사과의 말들이 차분히 정서되어 있기도 했다. 책상 위에는 어느 날 내가 주워다 준 도토리 한 알과 아내가 고요한 밤에 작업할 때 가끔 피우곤 하는 향초도 있다. 이상하게도 아내의 손길을 탄 사물들은 신비롭게도 정성스러운 기운이 묻어난다. 나는 안다. 그녀는 사물이든 사람이든 일회성 관계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하자면 아내는 나에게 삶을 가꾼다는 게 얼마나 그윽하고 멋진 일인지 알려준 사람이다. 시간의 댐이 무너져 모두가 방향 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 허우적대는 삶을 산다고 해도 나의 아내 콩자씨는 스스로 시간을 정리하고 가꾸면서 자신만의 리듬을 갖춘 사람으로 살아갈 것만 같다. 

나는 아침형 인간이고 아내는 올빼미족이다. 그래서 한밤중 침실로 향하는 중에 아내가 서재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장면을 종종 목격한다. 나는 그 장면을 특히 좋아한다. 열린 방문을 통해 그녀가 저편에 있을 뿐인데, 그곳에는 다른 차원의 시간이 경건하게 흘러가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 순간은 서재를 채운 수천 권의 책 중에서 내가 평생 가장 아껴 읽을 책이 무엇인지 분명해지는 때이기도 하다. 당신이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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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김나영 송종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