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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읽는 이를 위해 마련된 공간이 있다. 방문자 저마다의 목적이 혼재되어 있기보다, 앞에 놓인 책과 작업물에 집중하고 싶은 이들을 환영하는 그곳. 좋아하는 필기구를 기꺼이 놓아두고 싶은 세 장소를 소개한다.
누하동에는 기다란 회색 벽돌집이 있다. 이곳의 이름은 1P( ). 폭이 좁은 계단을 올라가니 테이블이 단 하나뿐이다. 이곳은 혼자만의 시간에 잠겨보는 예약제 공간. 게임의 ‘일인용’에서 이름을 따왔고, 똑같이 일인용이라 발음한다. 주인장은 혼자 있는 시간이 꼭 필요하고 적은 사람과 관계를 쌓아가는 편인데, 자신과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이 좋아할 장소를 만들고 싶었다.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고요한 아지트를 찾는 이들에게 그는 ‘일인용(시간)’이라고 부르는 경험을 제안한다. 일인용(시간)은 다음과 같이 흐른다. 예약자가 시집, 소설 등 추천 도서 여섯 권 중 하나를 고르면, 방문 당일 주인장이 책과 함께 CD 한 장을 내어준다. 그는 독서할 때 머릿속으로 책과 어울리는 음악을 떠올리곤 하는데, 손님들도 이 경험을 누리길 원했단다. 책과 OST 모두 주인장이 다양한 음악가에게 직접 추천과 제작을 의뢰한 것이다. 내가 이곳을 찾은 날 건네받은 책은 안미옥 시인의 《저는 많이 보고 있어요》. 책상 위 플레이어에 CD를 살며시 올려두었다. 서촌이 보이는 넓은 창과 마주 앉아 흐르는 선율과 함께 기록을 읽는 기분. 이곳만이 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다른 방법으로 일인용(시간)을 누려도 좋다. 자신만의 일인용(시간)을 보내다 가는 것이 주인장의 바람이니까. 그는 꼭 노트에 글이나 그림을 남기지 않더라도, 각자의 책에 밑줄을 긋거나 모서리를 접고, 마음에 드는 사진을 책갈피 삼아 끼워두는 모든 기록을 응원한다. 작가 마쓰오카 세이고가 《독서의 신》에서 책을 노트라고 여기며 나만의 표시를 담아보라고 말했던 것처럼, 나의 손길을 불어넣어 한 권의 노트를 완성할 방문자를 기다린다.
서재 가득 꽂힌 책들
선선한 계절과 어울리는
커피와 뱅쇼
책과 함께 내어주는 CD
오늘은 무언가를 기필코 쓰겠다고 굳게 마음먹는 날이 있다. 지금 붙잡아두지 않으면 사라질 것만 같은 글의 재료들을 가득 안은 날들. 그럴 때 카페보다 작업실이라는 이름에 가까운 공간을 찾길 권한다. 건축가의 작업실을 콘셉트로 한 포어플랜은 바로 그런 장소다. 이곳에서는 거대한 벽이 가장 먼저 방문객을 맞는다. 삼차원 건축 모형을 모티브로 제작된 것이다.
공간을 설계하고 운영하는 이들은 건축 디자인 스튜디오 FLPM그룹. 원래 이곳은 사옥으로 지어졌다. 조형물이 있는 큰 홀은 직원들의 사무 공간이자 고객들이 건축 재료를 살펴볼 수 있는 공간으로, 바 카운터는 탕비실 또는 고객과 차나 술을 마시면서 계약을 논의하는 공간으로 기획되었다. 완성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무렵, 구성원들 사이에서 우리만 쓰기 아깝다는 의견이 나오면서 사옥 일부를 손님들과 공유했다. 이후 방문자가 점점 늘면서 직원들은 다른 공간으로 옮겨 가게 되었다고. 지금은 음료도 내어주는 카페가 되었지만 애초에 사무 공간으로 설계된 만큼 작업에 몰입하기 좋은 장소다.
곳곳에는 건축가들이 머물다 간 듯한 흔적을 놓아두었다. 테이블마다 놓인 고무 칼판, 벽을 가득 채운 지류함, 바인더, 건축 관련 책들이 분위기를 완성한다. 그럼에도 억지스럽지 않고 누군가의 작업실에 잠시 머무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FLPM 그룹은 ‘For Less Plan More(심플한 디자인은 철저한 계획에서 시작한다.)’에서 초성을 따왔으며, 포어플랜이라는 이름 역시 이 문구에서 출발했다.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가 남긴 “적을수록 아름답다.”는 말에 영감을 받았다고. 어떤 것 하나 지나치지 않은 이곳에 머물다 보면, 펜과 종이만으로도 충분한 순간을 좋아하게 될 것이다.
자리마다 놓인 고무 칼판
건축 관련 도서와 동그랗게 말린 도면
연남동과 연희동 사이에 자리한 세모기둥 건물, 어라운드에 자리한 작업실이다. 우리는 매거진 《AROUND》처럼, 일상의 장면이 품고 있는 빛을 선명히 드러내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이곳을 나서면 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나를 만나게 되는 공간을. 그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발견이 기거하는 집을 쌓아 올리기 위해, 매거진 《AROUND》를 만드는 이들이 마음을 모았다. 크나큰 결심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오랜 세월 남겨온 발자국은 이미 이곳 ‘발견담’을 닮았으니. 과거 어라운드 구성원들이 책을 만드는 사무 공간으로 활용하던 장소이기도 하다.
발견담은 정기 구독과 온라인 구독을 신청한 독자들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지하 1층에는 개인 좌석 여섯 자리와 공용 테이블을 쓰는 두 자리를 마련해 두었다. 모든 과월호를 읽어볼 수 있으니 책이 품은 문장과 장면을 감상해도 좋다. 좌석마다 콘센트가 있어 작업에 몰입하는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책상 한쪽엔 발견담에서만 만나볼 수 있는 질문 카드를 올려두었다. 매거진 주제에서 파생된 질문을 꼽아 한 손에 들어오는 크기의 종이로 만들었다.
발견담이 건네는 물음표에 답하는 동안 나는 어떤 이야기를 품은 사람인지 쉽게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최대 여섯 명이 머물 수 있는 토크룸도 마련해 두었다. 여러 사람과 대화하거나, 가벼운 미팅을 진행하는 공간으로 쓰기 알맞다. 화이트보드, 모니터가 구비되어 있어 창의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데 부족함이 없다. 발견담에서 어떤 기록을 남겨도 좋다. 볕이 은은하게 머무는 이곳은 당신이 발견할 새로운 조각을 기다린다. 나와 주변을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에게 언제든 문을 활짝 열어두겠다고 약속한다
기록에 몰입할 수 있는 예약제 좌석
회의 공간으로 적합한 토크룸
《AROUND》 모든 호가 비치된 책장
에디터 차의진
포토그래퍼 박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