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을 위한 작은 책

문고판

한 손에 들어오는 책을 쥐는 일. 무게를 가늠해 보는 일. 그 책을 옷 주머니에 쓱 넣는 일. 어디서든 쉽게 펼쳐보고 덮는 일. 가볍게 하는 일, 가벼워지는 일. 문고판은 작고 가벼운 것의 아름다움을 알려주는 책이다.

외출할 때 준비물이
많이 필요한 사람에게

어딜 가나 외출할 때 준비물이 많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 나도 그런 사람 중에 한 명이다. 가방은 무조건 넉넉하고 품이 큰 것이 좋고, 안에는 이어폰, 지갑, 카메라를 제외하고도 ‘당장 읽고 쓰진 않겠지만 그래도 넣어두는’ 책과 노트까지 있어야 마음이 편안해진다. 사실 그 가방 속에 있는 물건을 바깥으로 빼지 않고 다시 돌아오는 날이 더 많았지만 말이다. 내가 가방을 무겁게 하는 이유는 모두 기다리는 순간을 위해서였다. 친구를 기다리고, 지하철이나 버스를 기다리고, 또는 낯선 도시를 기다리며 기차나 비행기에 몸을 싣는 순간. 그 속으로 함께 들어갈 책과 물건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무게나 부피 때문에 나는 선뜻 가방을 들어 책을 꺼내지 못 했다. 

그러다 우연히 손바닥 크기의 작은 책을 발견했다. 표지는 주홍빛이었고 제목과 저자만 간결하게 쓰여있었다. 책은 가벼웠고, 작았다. 웬만한 옷 주머니에는 다 들어갔다. 어디서든 폈고, 쉽게 덮었다. 내게 토막 시간이 생겨난 것은 그때부터였다.

한가하고 무겁지 않은
독서를 위해

1934년 영국, 기차역 가판대를 훑으며 기차 안에서 읽을 책을 찾던 남자가 있다. 기차 안에서 가볍게 읽을 책을 찾지만 커다란 신문과 책밖에 찾지 못한다. 그가 만든 책이 바로 문고판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펭귄북스다. 문고판은 어쩌면 그러한 ‘작은 틈’을 위해 생겨난 책이다. 문고판의 가장 큰 특징은 작은 판형이다. 사전적으로는 세로 14.8센티미터, 가로 10.5센티미터로 A6 크기를 뜻하지만 꼭 이 판형을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펭귄북스의 오리지널 판형은 세로 18.1센티미터, 가로 11.1센티미터이며 세로 19.8센티미터, 가로 12.9센티미터 판형도 오래 쓰였다. 국내에서는 범우문고(148x210mm), 책세상, 살림지식총서, 시공디스커버리총서(128x188mm) 등의 판형이 쓰인다. 국내 문고판은 시리즈로 기획되는 경우가 많아 종이의 누수를 줄일 수 있는 크기를 찾는 일도 중요하다. 크기에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모두 휴대하기 쉽다. 크기가 아니라 제본에 따라 문고판을 분류하기도 한다. 하드커버를 소프트 커버로 교체하고, 프론트 페이지를 생략한 후 본문으로 이어지게 하는 페이퍼백의 한 종류로 보는 것이다. 겉과 속 모두 간결함을 추구하는 방식이다. 

지하철을 기다릴 때, 스크린도어에 붙은 시 읽기를 좋아한다. 시를 선정하는 기준에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긴 하지만, 짧은 시간 동안 눈과 마음을 붙일 글이 있다는 건 소중한 일이다. 문고판은 준비하지 않았지만 우연히 마주치는 지하철 스크린도어의 시들처럼 가볍게, 자주 읽기를 권한다. 늘 가져 다니며 쉽게 구부리고 펼치고 덮으며 낡을수록 좋다. 소장보다는 생활에 가까운 책이기 때문이다.

아침, 카페,
두 시간, 한 권

어찌어찌 가방 무게는 줄였지만, 여행 짐을 싸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여행지의 역사가 담긴 책, 여행지가 배경인 책, 여행지에서 읽고 싶은 책. 그렇게 고르다 보면 출발할 때부터 무게가 초과될까 늘 노심초사다. 걱정하던 중 서점을 기웃거리다 문고판으로 나온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를 발견했다. 다른 책을 모두 빼고 문고판 여섯 권으로 나온 《1Q84》를 챙겼다. 그리고는 익숙하지 않은 어느 도시의 카페에서 아침마다 하루에 한 권씩, 두 시간 동안 책을 읽었다. 어쩌면 그 책은 무겁지 않아서, 오래 남았다. 짧은 시간에 여행에서의 두 시간을 생활로 가져올 또 다른 문고판을 소개한다.

01
깨끗하고 밝은 곳 | 어니스트 헤밍웨이 | 민음사
144쪽 | 146g | 113x188mm

‘쏜살’은 민음사에서 펴낸 작은 총서다. 가벼운 몸집에 묵직한 사상과 감정을 담아. 새로이 읽혀야 하는 고전과 에세이를 소개한다. 북디자이너 이기준이 디자인한 시리즈 표지는 그 자체로 소장 가치가 있다. 《깨끗하고 밝은 곳》은 헤밍웨의 단편집으로, 직접 경험한 사건과 한평생 추구했던 주제 의식, 문학적 스타일이 드러난다.

02
아름다운 배경 | 정목일 | 범우사
170쪽 | 139g | 110x174mm

수필은 언제 어디서나 읽기 좋은 형태의 글이다. 짧은 분량과 일상생활에 대한 사색을 바탕으로 한 글은 짧지만 충분한 환기가 되어준다. 《아름다운 배경》은 40여 년에 걸쳐 쓰여진 정목일 수필 중에서 30편을 모은 책이다. ‘범우문고’ 하면 주황색 표지가 먼저 떠오르지만 푸른 테두리로 둘러싸인 표지도 담담한 필치로 쓰인 에세이와 잘 어울린다.

03
자기만의 방 | 버지니아 울프 | 펭귄클래식
208쪽 | 133x203mm

버지니아 울프 탄생 133주년을 맞아 출간한 특별판은 펭귄북스 초기 문고판 디자인을 그대로 살렸다. ‘여성과 글쓰기’라는 주제를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잔디밭에도, 도서관에도 들어갈 수 없고, 열세 명의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단 30분도 자신의 시간을 갖지 못했던 100년 전 여성의 삶을 읽고 있으면 ‘여성이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던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04
쪽클래식 | 황인찬, 김소월, 이태준, 유메지 등 | 쪽프레스
2쪽~10쪽(접지 형태) | 92x133mm

쪽클래식, 쪽모던(일명 한쪽책)은 대부분 10쪽을 넘지 않으며 아코디언 형태로 접혀 한쪽 독서가 가능하다. 단지 짧다는 이유로 출판되지 못하는 초경량의 명문과 미문을 위해 기획된 것으로 아름다운 문학의 감동을 가볍고 부담 없는 그릇에 담아 전달한다. 이효석, 김유정, 김소월과 더불어 시인 황인찬, 소설가 정세랑, 일러스트레이터 최진영, 만화가 이윤희 등이 참여했다.

05
서양미술사 문고판 | 에른스트 H. 곰브리치 | 예경
1046쪽 | 112x188mm

1950년 영국에서 초판이 간행된 서양미술사는 수많은 독자와 함께 오랜 세월을 견뎌온 책이다. 국내에서는 출간된 지 만 40년이 넘었다. 그 명성과 세월로만 봐도 짐짓 무거워 보이는 이 책이 문고판으로 출간됐다. 한 손에 잡힐 수 있는 판형을 쓰고 얇고 가벼운 종이를 사용해 미술입문서다운 특징을 살렸다.

06
마티스: 원색의 마술사 | 그자비에 지라르 | 시공사
176쪽 | 128x188mm

시공디스커버리 총서는 철학, 미술, 문학, 역사, 사회, 과학 분야를 폭넓게 다루는 책이다. 접근하기 어려운 분야의 내용을 간결하지만 단단하게 담아낸 시리즈다. 단순한 선과 순수한 색채, 그 속에서 마티스는 그만의 빛을 찾아낸 화가다. 작품을 그대로 담아낸 직관적인 표지는 세워두기만 해도 작품처럼 감상할 수 있다.

07
약간의 거리를 둔다 | 소노 아야코 | 책읽는고양이
160쪽 | 166g | 113x183mm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오르며 데뷔한 일본 소설 소노 아야코의 에세이다. 그녀는 세상이 원하는 행복, 타인이 바라는 나와 거리를 두는 일에 대해 말한다. 160페이지의 책에는 ‘불행은 사유재산이다, ‘인생은 좋았고, 때로 나빴을 뿐이다’, ‘사소한 불운을 즐길 줄 아는 자’, ‘자녀는 타인 중에 특별히 친한 타인이다’ 등 제목만으로도 궁금한 에세이가 가득하다.

08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 이민경 | 봄알람
192쪽 | 202g | 105x170mm

책으로 무언가를 배운다고 해도, 현실로 나오기 위해서는 결국은 ‘연습’과 ‘실전’이 필요하다. 이 책은 여성들이 성차별에 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만들어졌다. 무지하고 무례한 말에 기꺼이 대답할 수 있도록, 여성의 경험을 들어 이야기한다. 핸드북 크기로 만들어져 여성의 언어가 필요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기꺼이 들고 다닐 수 있다.

09
레이첼 카슨과 침묵의 봄 | 김재호 | 살림출판사
96쪽 | 138g | 128x188mm

살림지식총서는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담는 작은 책이다. 500권이 넘는 시리즈로 발간되었으며 교양서라는 인문 분야뿐만 아니라 자연과학, 취미실용까지 다룬다. 《침묵의 봄》은 20세기 환경 운동에 영향을 준 레이첼 카슨의 책이다. 이 책은 그녀가 살았던 진정성 있는 삶을 따라가며 과학, 인문학, 환경에 걸친 가치관을 동시에 보여주는 안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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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포토그래퍼 이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