튼튼한 습관을 모아

아침에 눈을 뜨면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고 오래된 영상을 켠다. “국민체조, 시작!” 익숙한 구령에 맞추어 몸을 움직이고 나면 찌뿌드드한 기운이 사라지고 머리가 좀 맑아진다. 점심밥을 먹고 나면 사람이 없는 곳에서 씩씩하게 국민체조를 하고, 잠들기 전엔 소리를 조금 죽여 조용히 국민체조를 한다. 그렇게 하루 세 번 국민체조를 한 지 1년 반이 지났다. 하루라도 건너뛰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안 한 듯 불편하고, 세 번을 깔끔하게 마치면 잘살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아주 작은 행동이 하루의 일부로 반복되는 나날. 나는 그 시간이 쌓여 건강한 내일을 만든다고 믿는다. 혹시, 당신도 나와 같은 마음일까?

작가 김혼비와 자전거

페달을 밟을 테니까

2020년, 내 삶에서 축구가 이렇게 허무하게 빠져나갈 줄은 몰랐다. 하긴 그것만 몰랐나. 비누와 마스크 같은 손바닥만 한 물건들에 나라의 명운이 걸리고(‘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는 성공해야 한다!)‘언택트’의 기치 아래 일상의 질서들이 대대적으로 재편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런 때에 어디서 무엇을 하다가 왔을지 모를 스물두 명이 모여 살 부딪히고 땀 섞이는 축구는 도저히 할 자신이 없었다. 6년간 해오던 운동이 남긴 빈자리는 블랙홀처럼 의욕과 생기를 모두 삼켜버렸고 그렇게 무기력하게 지내던 4월의 어느 날 문득 자전거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 자전거! 야외에서 할 수 있고, ‘자전거 몸체 길이+자전거 간 유지하는 안전거리’만큼의 사회적 거리 두기도 가능한 운동. 자전거를 마지막으로 탄 게 언제였더라. 아마도 거의 10년 만에, 내 자전거도 따로 없어서 서울시에서 대여해 주는 무인 공공자전거 ‘따릉이’를 끌고 시험 삼아 해본 라이딩에서 나는 깜짝 놀랐다. 이거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잖아?! 군데군데 저녁노을이 물든 한강을 따라 단숨에 20킬로미터를 달렸다. 그날 이후 중고로 미니 스프린터를 구입해서 매일 자전거를 탔다. 강도를 조금씩 올릴 때마다 허벅지가 터질 것처럼 뜨거워지며 욱신대는 기분이 너무 좋아서 27킬로미터, 41킬로미터, 69킬로미터 주행거리도 점점 늘었고, 90킬로미터 종주를 목표로 삼고 나니 목표치에 빨리 도달하고 싶다는 강력한 동기가 생겨서 그전에는 하루 이틀 하다가 이내 그만두곤 하던 ‘홈트’도 꾸준히 하게 됐다. 매일 5분씩 하는 스쿼트와 플랭크는 내 몸의 코어뿐만 아니라 일상의 코어도 다지는 시간이다. 하고 나면 온몸이 새로운 활기로 차오르며 다른 일들을 즐겁게 할 수 있다. 이렇게 은사시나무처럼 부들부들 떨며 만든 근력으로 ‘잘 살아가고 싶다’는 의욕이 샘솟는다(어떻게 만든 근력인데!). 요즘은 사회적 거리두기가 2단계로 올라가면서 자전거 타러 나가는 것도 자제해야 할 것 같아 쉬고 있지만 홈트만큼은 꼬박꼬박 한다. 언젠가 다시 페달을 밟을 테고 난 90킬로미터를 달릴 거니까. 언택트의 물결 속에서 운동과는 절대 언택트 되지 않기. 코로나 시대를 통과하는 나의 목표다.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를 썼지만 축구를 못 하고 《아무튼, 술》을 썼지만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지 못하는 날들을 보내고 있다. 모두의 무사를 빈다.

뮤지션 몬구와 달리기

습관성 달리기

오래달리기는 습관이 되어도 여전히 힘들다. 숨이 차고, 다리가 아프다. 생각만큼 몸이 따라주지 않을 때도 있다. 하지만 힘들 뿐, 오래 달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졌다. 그러고 보면 사는 것도 그런 것 같다. 하루하루 안 힘든 날이 없다. 그래도 계속 내딛다 보면 어딘가에 도착하게 된다. 그런 반환점과 도착점을 습관처럼 지나다 보면 사는 두려움이 비워지는 게 아닐까. 글을 쓰다 보니 올봄, 살겠다고 외치는 초록 잎사귀들의 아우성과 공기에 진하게 섞이는 풀 냄새에 놀라 달리기를 멈추던 순간이 떠오른다. 그날은 가만히 서서 그 공간과 시간이 내 오감에 선사하는 초록빛을 마음에 품었더랬다. 가을로 접어든 지금, 눈을 감고 그날의 초록빛과 달리기를 떠올려본다.

소개하고픈 재밌는 러닝 문화가 있다. 마라톤 대회에 다녀왔거나 러닝 동호회를 본 사람들은 알텐데, 맞은편에서 달리는 사람(모르는 사람이어도)에게 박수를 두세 번 친다든지 “파이팅” 하며 격려하는 문화다(러너의 동지애 같은 것이려나). 요즘도 러닝 코스에서 만나는 러너들에게는 파이팅 인사를 건넨다. 폼이 괜찮고 경험이 많은 러너일수록 화답을 잘해준다. 작년 가을, 아파트 단지 외곽을 자전거 타는 소년 두 명과 같은 코스로 달린 적 있다. 나는 그들에게 파이팅을 외쳤고, 그들은 적잖이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더니 웃었다. 그러더니 열정적으로 페달을 밟아 내 뒤를 따라오며 “파이팅, 파이팅!” 하고 외쳤다. 두 소년의 눈빛은 잃어버린 재미를 찾은 것처럼 반짝였다.

그래, 저 친구들도 언젠가는 달리겠구나….

러닝을 시작한 후로 체중이 줄었지만 그보다 불평이 많이 줄었다. 보통 일주일에 1-2회, 10-15킬로미터, 50-90분을 뛰는데, 그렇게 달리다 보면 불편하고 기분 상할 것투성이다. 내 근육과 의지를 지치게 하는 맞바람, 골목에서 담배를 태우는 사람, 페어링이 풀리는 블루투스 이어폰, 물이 고인 웅덩이, 자기 옆을 지난다는 이유로 갑자기 짖는 개, 차가운 바람에 반응하는 유약한 내 소화기관…. 정말이지 끝없다. 하지만 내 몸은 안다. 불평이 오래 달리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걸. 중요한 건 그저 다음 스텝을 내딛는 것뿐이다. 아무도 내게 뛰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달리는 데 어떤 큰 의미도 없다. 그저 멈출 이유가 없다면 다음 스텝을 준비하면 된다. 그렇게 글 쓰고, 노래하고, 춤추며 살고 싶다. 그리고 그걸 가장 잘 연습하고 유지할 수 있는 습관이 러닝 아닐까 생각한다.

2003년부터 지금까지 음악이 흘러야 하는 곳에서 춤추듯 글 쓰며 노래하고 있다.

소설 편집자 황예인과 산책

마음속 개를 데리고 산책

일어나면 창문을 열어 날씨부터 살핀다. 날씨 애플리케이션이 알려주는 정보는 하루의 대강을 짐작하게는 하지만 감각을 일깨우지는 못한다. 불어오는 바람이 피부에 닿아오고, 햇빛만큼 선명한 그림자가 눈에 들어오면 일몰의 산책이 아침부터 기대된다. 마음속 개가 빙빙 돌며 어서 나가자고 흥분하는 게 느껴질 만큼.

그전까지는 회사에서의 시간, 나는 이걸 내가 8시간 동안 타야 할 열차라 상상한다. 중간에 내릴 수 없고, 멍하니 있을 수만도 없는. 차창 밖 풍경은 내면의 반영이어서 재촉하는 문자나 쌓여가는 메일만을 보게 될 테니까. 또박또박한 오전과 달리 오후에는 달궈진 몸으로 일 위를 질주한다. 한때는 이 상태를 몰입과 능률로 이해했는데 이제는 자동화된 반응이라는 걸 안다. 그렇기에 투두 리스트가 어느 정도 지워진 퇴근 무렵에도 이를 계속 유지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하지만 오늘의 나는 주저 없이 열차에서 내린다.

내내 기다리던 마음속 개와의 산책이 시작된다. 상점 간판과 사람을 구경하며 걸을 때도 있지만, 대개는 한강을 끼고 다리를 건넌다. 초가을 저녁 6시 반 무렵이면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면서 강 아래로 해가 조금씩 사라져간다. 수면의 금빛 윤슬에서 겨우 시선을 떼 동쪽 하늘을 바라보면 하늘색이 점잖게 가라앉고 있다. 한동안 하늘은 부드러운 연보라색이었다가 다리의 반대편으로 넘어오면 전체가 깨끗한 군청색으로 바뀌어 있다.

더없이 아름다웠다가 순식간에 고요해지는 일몰 속에서 나는 낮의 열차가 장난감 기차 같은 거였다고 상상한다. 엇박자로 끼어드는 우연한 장면들-횡단보도를 건너던 고양이, 탭댄스 스텝을 밟던 여자, 눈 앞으로 날아들던 흰 갈매기-이야말로 오늘 진짜 내가 원하던 것이라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오면 마음속 개는 적당히 지쳐 온순해져 있다. 그러면 오늘 하루가 어땠건 아주 만족스럽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1인 출판사 스위밍꿀을 운영 중이다.

작가 안대근과 필사

동경하는 사람에게

책을 읽을 때면 공감 가는 부분보다는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에 밑줄을 긋는 편이다. ‘이건 정말 내 얘기네.’ 하고 낄낄거리며 읽은 책이 깨끗한 반면, 중간에 멈추느라 느리게 읽은 책들이 지저분한 이유는 아마 그 때문일 거다. 그래서인지 오랜 시간 간직해 온 필사 노트를 펼치면, 되고 싶었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다. 내가 닮고 싶었던 문장들 사이로 떠오르는 흐려진 얼굴들이.

어릴 때는 이모와 삼촌과 함께 자랐다. 엄마가 육 남매의 첫째고, 막내 이모와 삼촌은 모두 늦둥이라서 나와 열 살도 채 차이 나지 않았다. 내 성향의 대부분은 아마 두 사람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도 심은하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람인 줄 알았고, 삼촌 방에 붙어 있던 영화 포스터들을 보며 왕가위 감독을 무작정 좋아했다. 누가 나에게 좋아하는 것들을 물으면 이모 방과 삼촌 방에서 곁눈질로 훔쳐본 것들의 이름을 대고는 했다.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나를 늘 어린애 취급하는 그들을 자주 미워하면서도 속으로는 그보다 더 자주 동경하던 어린 시절이었다.

필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나도 끼고 싶지만 끼워주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되고 싶지만 나는 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을 읽어 내려가며. 닮고 싶지만 닮기엔 너무 먼 거리에 있는 모습을 질투 반, 동경 반 섞인 마음으로 따라가며. 이를테면 그런 기분일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것 중 하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느껴지는 기분 좋음 같은. 그래도 우리 사이에는 같은 문장이 있다는 확신. 당신이 쓴 문장과 내가 베낀 문장.

필사의 시작에 대해 여기까지 말했을 때 상대는 어쩌면 이유도 그렇게 궁상맞냐고 웃었는데, 가끔씩 네가 해준 얘기를 내 일기장에 또박또박 적어본다는 건 끝까지 모르겠지. 이제 곧 30대 중반인데 누군가를 동경하는 일은 그만두어야 하지 않을까 묻는 사람에게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동경할 때면 자라나는 기분이 든다. 학창 시절, 그들의 방에서 꺼내 온 책 속의 문장과 영화 대사들을 베낄 때 나는 얼마나 자랐던가. 아마도 한 뼘, 그래 한 뼘은 훌쩍 넘게.

글을 통해 순한 사람이 순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은 소망이 있다. 에세이 《웃음이 예쁘고 마음이 근사한 사람》, 《보고 싶은 사람들 모두 보고 살았으면》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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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주연

글 김혼비, 몬구, 황예인, 안대근 일러스트 임기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