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먼 쇼

굿 모닝. 굿 애프터눈. 굿 이브닝. 굿 나잇.

트루먼 쇼

굿 모닝.
굿 에프터눈.
굿 이브닝.
굿 나잇.

소란스럽던 자동차 안이 언젠가부터 조용해졌다. 마치 남의 인생을 사는 것처럼 낙천적이던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소란스럽던 자동차 안이 언젠가부터 조용해졌다. 마치 남의 인생을 사는 것처럼 낙천적이던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하늘과 바다는 모두 푸른색이었다. 어딜 봐도 들뜬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새 풍경은 매우 건조한 색으로 변해 있었다. 문짝이 떨어진 채로 길가에 버려진 이동식 화장실 이후로 흥미로운 것을 보지 못한 지 오래였다. 그보다 한참 전부터, 우리는 길에서 사람을 보지 못했다. 철조망이 가로막은 해변과 필요 이상으로 잘 닦인 도로, 그리고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지만 군사 시설인 것만은 확실해 보이는 무거운 덩어리들이 주변에 보이는 전부였다. 바닷가 주제에 이토록 무미건조한 모양을 하고 있다니! 우리 같은 여행자들에게 큰 실례가 되는 정도의 풍경이라고 생각했다.

멀리 표지판이 나타났다. “검문소 1km.” 검문소를 넘어서면 민간인 통제 구역이다. 내 인생이 이렇게 뜬금없이 분단의 현실을 마주할 줄은 몰랐다. 아주 잠깐 적막이 흘렀고, 일행 중 한 명이 이제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 그만 돌아가자고 말했다. 모두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텅 빈 도로 한가운데에 차를 멈추고 서둘러 방향을 틀었다.

지난해 여름, 우리는 야생을 찾아 먼 여행을 떠났다. 우리에게 야생이란, 티브이에 나오는 것처럼 물속 깊은 곳에 들어가 작살로 물고기를 잡는, 그런 어마어마한 탐험을 의미하는 건 결코 아니었다. 좋은 자리에 돗자리를 펼 수 있는 곳, 맥주 광고가 새겨진 파라솔이 보이지 않는 곳. 즉 임자가 없는 자연스러운 바다를 찾고 싶었다. 우린 야생을 찾아 저 먼 곳에서부터 장소를 물색해나가기 시작했다. 포항에서 시작해 삼척, 동해, 강릉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지도를 켜고 남들이 잘 모를 것 같은 해변만 찾아다녔다. 자기네 해변이 얼마나 예쁜지도 모르고 시큰둥하게 내버려둔 바다가 어딘가 있을 것만 같았다. 바다 좀 돌아다녀봤다는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차라리 서울에서 임자 없는 땅을 찾아보라고. 우리는 보란 듯이 임자 없는 바다를 몇 군데 찾긴 했는데,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예를 들면 공장 앞에 썩어가는 뻘밭 같은 곳들.

“그러지 말고, 차라리, 고성에 가볼까?”
여행을 이렇게 끝내고 싶지 않은 누군가가 다음 장소를 제안했다.
“고성?”
“응. 만약 어딘가 임자 없는 바다가 있다면 그건 마지막 쪽에 있을 것 같은데?”

고성은 우리나라의 가장 북쪽인 강원도, 그중에서도 가장 북쪽에 위치한 도시다. 이 어리숙한 이론은 ‘극장에서 나의 팔걸이는 어느 쪽인가?’ 하는 담론과 비슷했다. 극장에 앉은 모든 사람이 오른팔을 팔걸이에 올린다면 맨 왼쪽 팔걸이는 임자 없는 팔걸이가 된다. 저 아래쪽에서부터 모든 바다엔 다 임자가 있으니, 바다를 따라 북으로 올라가다 보면 결국 임자 없는 마지막 바다가 하나쯤 나오지 않을까 추측해보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한 사람도 대단하지만, 이 이야기에 설득된 나머지도 정말 대단하다. 

우리는 임자 없는 마지막 바다를 보기 위해 북쪽을 향해 차를 달렸다. 그렇게 정신없이 시작된 여정이 검문소를 만나면서 모두 끝나버렸지만 말이다. 계단인 줄 알고 허공에 발을 디딘 것처럼 우리는 휘청거렸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갈까?’ 우리는 테니스공을 빼앗긴 강아지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민간인 신분으로 마주한 분단은 조금 더 차분하고 냉정한 느낌이었다. 군 시절에 겪은 분단은 오히려 더 장난스러웠고 거짓말 같았다. 조국의 분단은 나에게 쓸고 닦고 땅을 파는 일이었다. 그저 우리를 고생시키기 위해 분단을 유지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어릴 적 나는 줄지어 지나가는 개미들을 발견하면 단순히 그 개미들을 고생시키려고 지나는 길을 모두 파헤쳐 놓았다. 영화 <트루먼 쇼>에서는 멀쩡한 사람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고 즐기기 위해 사람을 세트장 안에 가둬 놓았다. 고생시키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즐기려는 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여긴 왜 막아놓은 걸까?

내가 괴롭히던 개미는 어떤 상황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만 나아갔다. 큰 돌덩이를 옮겨와 개미가 가는 길을 막아보았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개미는 머뭇거리지 않고 돌덩이의 주변을 돌아서 앞으로 나아갔다. 혹시 물에 젖은 휴지나 나뭇가지가 개미를 멈추게 할 수 있을지도 몰라 개미가 다니는 길에 이것저것 떨어뜨려 보았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개미는 태엽 달린 장난감처럼 앞으로 나아가기만 할 뿐이었다. 

검문소를 앞두고 되돌아오는 길에 개미를 떠올리게 된 건, 개미보다 용기가 없는 나 자신을 질책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우린 이미 몇 개의 강을 건너고 높은 산을 넘어 이곳에 온 사람들이다. 십여 개의 톨게이트를 하이패스도 아닌 현금으로 결제하고 여기까지 온 사람들이다. 그런 우리를 도로 한가운데서 멈추게 한 그 힘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것이 궁금한 것이었다. 그것은 역사의 힘이었을까? 아님 정치의 힘이었을까? 이념의 힘은 아직도 살아 있을까? 그 힘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마어마하게 거대하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너무 커다란 것은 절대 보이지 않는 법이니까. 개미가 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던 것처럼 말이다.

영화 <트루먼 쇼>에서 트루먼은 세상의 끝에 다다라 문을 두드렸다. 하얀 벽이 열리고 트루먼은 자신의 세상을 향해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굿 모닝. 굿 애프터 눈. 굿 이브닝. 굿 나잇.”
세상의 끝을 보는 것조차 두려워한 우리의 이야기는 이렇게 결말을 맺는다.

우리는 도망치듯 내려가다가 남한의 최북단 해수욕장이라는 곳에 차를 세웠다. 철문에는 백사장 개방 시간이 적혀 있었고, 목함지뢰를 조심하라는 경고 문구도 붙어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짐을 풀었다. 파라솔을 만원에 빌리고, 아이스박스를 들고 다니는 아저씨에게 오천원을 주고 맥주를 샀다. 이곳에도 임자는 있었다. 다행히 파라솔에는 맥주 광고가 새겨져 있지 않았다는 점. 우리에게는 그것이 작은 위안이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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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한승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