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블 위로 흐르는 장면


식탁에서 시작되고 마무리되는 이야기.
일상이 몰고 오는 고민의 무게는 먹는 일로 덜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아주 조금이라도.

이야기 한 모금

김종관
〈더 테이블〉(2016)

Ⓒ〈더 테이블〉

“좋은 거 보면
사진이라도 하나
보내줄 줄 알았어요.”

오후 2시 반, 점심을 먹은 후 졸음이 올 때쯤 군것질이 궁금해지는 시간. 여자와 남자, 경진과 민호는 연갈색 캉파뉴를 닮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다. 마른 천으로 물기를 닦은 머그잔과 케이크도 놓여 있지만, 둘은 군것질이 궁금한 게 아닌가 보다. 함께 하룻밤을 보낸 후 홀로 여행을 떠난 민호의 연락을 기다리던 경진. 그녀의 얼굴에서는 약간의 어색함과 그보다 많은 반가움, 그보다 더 많은 야속함이 보인다. 민호는 여행길에서 경진을 떠올리며 사 온 것들을 꺼내며 서툴지만 진심을 전한다. 전보다 까맣게 탄 민호를 보며 웃음이 터지는 경진.

바닥을 확인하며 내딛는 걸음처럼 슬그머니 다가가던 둘은 이내 서로가 같은 마음임을 알게 된다. 음식 잡지 기자가 된 경진에게 민호는 케이크를 표현해 달라고 부탁한다. “둥그런 초코 케이크 위에 생크림을 쌓아 올렸다. 초콜릿 파우더는 바람에 흘러 눈 위에 앉았다. 카라멜 아몬드는 그 눈 안에 숨어든 보석이다.” 고요한 카페에 경진의 나긋한 목소리가 흐른다. 민호는 경진에게 자신의 요리도 먹어보고 표현해 달라고 한다.

자리를 뜬 둘의 테이블에는 반쯤 남긴 커피와 한 입도 먹지 않은 초콜릿 케이크가 남아 있다. 성실한 주인장은 두 사람이 이곳에서 남기거나 안고 간 이야기가 무엇인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저 빈자리에 다가와 그릇을 치우고 마른 행주로 훔쳐낼 뿐. 잠시 뒤, 카페의 문이 열리고 연갈색 캉파뉴를 닮은 그 자리에 또 다른 사람들이 앉는다. 어떤 장면이 흐르든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만 입에 넣고 음미하며 감각으로 기록해 둘 수 있다. 먹는 시간 동안 벌어진 일은 온전하게 먹는 이들의 몫이니까.

함께 먹는 사이

마츠모토 소우시
〈아오바의 식탁〉(2021)

Ⓒ〈아오바의 식탁〉

“그래도 지금에 이르렀잖아.
이런 모습이 쌓이고 쌓여
지금 우리가 된 거니까.”

도쿄의 저녁, 아오바 가족의 식탁에는 갓 완성된 따끈한 요리가 오른다. 고기와 쪽파를 잘게 썬 소가 든 만둣국, 큼지막한 토마토를 넣은 달걀 볶음, 봉긋하게 담은 밥과 어른들을 위한 맥주까지, 모두가 힘을 모아 분주하게 만들어낸 식사는 한껏 구미를 당긴다. 오늘은 식탁에 특별한 손님이 한 명 있다. 아오바의 오랜 친구이자, ‘하짱 라이스’라는 메뉴가 유명한 음식점을 운영하는 토모요의 딸 유코가 여름 방학 특강을 듣기 위해 잠시 신세를 지기 때문. 조심스레 식탁에 앉던 유코는 끼니를 함께 챙기는 사이가 된 아오바와 가까워진다.

무엇이든 잘해서 부럽고 얄미운 토모요, 그런 엄마의 그늘에서 벗어나 나만이 잘하는 것을 찾고 싶은 답답함을 털어놓은 유코에게 아오바는 말한다. “너무 애쓰지 마. 이 길이 아닌 것 같다면 다시 찾으면 그만이야. 딱 하나만 잘 찾으면 돼.” 그러고는 결심한 눈으로 덧붙인다. “유코, 나 토모요를 만나고 올게.” 알고 보니 둘은 이미 20년 전에 절교한 사이였다. 볶음밥 위에 넓게 부친 계란을 올리고, 고추기름 섞은 양념장을 올려 먹는 하짱 라이스는 사실 아오바의 아이디어다. 둘은 함께 음식점을 오픈하려고 했지만, 아오바는 유코와 같은 고민을 하다 포기했다.

끊어진 사이의 어색함을 채우는 건 시간이 아니라 음식인 걸까? 늦은 밤, 간단히 만든 오차즈케를 앞에 둔 채 토모요와 아오바는 서운함과 미안함, 그 시절 나누었던 추억에 대해 성급하지 않게 풀어둔다. 정적이 흐르면 ‘맛있다’든가, ‘음’이라든가 감탄사로 채우고 묵은 감정을 비우듯 그릇을 비운다. 다시 함께 먹는 사이가 된 이들의 뒷모습은 이전보다 더 둥글고 다정해 보인다. 함께 먹고 웃던, 지금은 그럴 수 없는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지만 나에겐 하짱 라이스도, 오차즈케도 없다는 핑계를 대어본다.

모두 다른 모양

샤오 야 췐
〈타이베이 카페 스토리〉(2010)

Ⓒ〈타이베이 카페 스토리〉

“이건 에클레어.
두얼이 제일 잘 만드는 디저트예요.
각각의 길이가 다 다르죠.
음식도 사람들처럼 제각기 다르기 때문이죠.”

커피 머신이 작게 웅얼거리며 잔으로 커피를 쏟아낸다. 그 옆에서 카페 주인인 두얼은 디저트를 만드느라 바쁘다. 치즈케이크, 티라미수, 에클레어, 시폰케이크…. 매일 새로 굽는 디저트가 단 냄새를 풍기지만 정작 찾는 이가 없다. 설상가상 친구들이 전해준 개업 기념 선물 때문에 가게가 여태 시장통이다. 동생 창얼은 ‘물물교환’으로 이 쓸모없는 것들을 한꺼번에 치우리라 계획한다. 카페에서 돈으로 살 수 있는 건 커피와 베이커리뿐, 물건이 갖고 싶다면 다른 물건으로 교환하거나 재능을 기부해야 한다. 하다못해 ‘이야기’라도 좋다. 고민하고 흥정하는 사이, 사람들은 자연스레 커피와 디저트가 필요할 테니까.

하루는 카페에 온 남자 손님이 두얼에게 비누 서른다섯 개를 주며 각각이 가진 이야기를 들려준다. 잊을 만할 때쯤 오는 남자한테서 듣는 환상적이고 엉뚱한 이야기는 두얼을 카페가 아닌 낯선 바깥세상 어딘가로 데려간다. 두얼은 창얼에게 말한다. “언젠가 내 이야기도 들려줄 날이 왔으면 좋겠네.” 특별한 물물교환으로 유명해진 카페는 한 여행사의 인수 제안을 받는다. 두얼은 흔쾌히 응하며 자신의 지분을 서른다섯 개국으로 떠날 수 있는 비행기 티켓으로 교환한다.

기억을 짚어 보니, 수요일마다 만드는 두얼의 에클레어는 길이가 전부 달랐다. 어떤 날은 반죽을 조금 적게 만들었을 수도, 늦게 출근한 바람에 마음이 급해져 실수했을 수도, 아니면 일부러 제멋대로 완성한 날도 있겠지. 요리 하나를 오차 없이 똑같이 복제할 수 없듯 삶의 모양도 마찬가지다. 매 순간 선택과 행동을 거듭하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쌓아가는 사람은 어떤 모양과 향을 지니든, 언제 완성되든 모두 고유하게 존재한다. 서로 다른 에클레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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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명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