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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머물렀던 그 자리
타인의 혼자
친구가 머물렀던 그 자리
누구에게나 온전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문득 친구들의 비밀 장소가 궁금해졌다. 당신은 묶인 마음을 풀기 위해 어디에 머물고 있나요?
모두가 열심히 조용해지는 일
도서관
“나, 도서관 가는 거 좋아해. 책도 책이지만 거기에 있는 사람들 모두 열심히 사는 것처럼 보이거든. 모두가 조용히 해야 하는 곳이잖아. 그게 좋아.”
도서관 열람실에 가면 꼭 영어사전을 집어 오는 후배가 있었다. 이유를 묻자 그는 “불면증이 있어서.”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 책을 펼쳤다. 잠시 자리를 비웠다 돌아오면 여지없이 두꺼운 책을 베고 잠든 후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책을 읽으려고 도서관에 오는 걸까, 잠을 자려고 오는 걸까. 때로는 빈 시간을 채우기 위해 도서관이 존재한다는 생각도 든다. 카페보다 차분하고 서점보다는 느긋한 그 어딘가의 시간. 내게 도서관을 추천해준 한 친구는 모두가 조용해지는 그 장소를 ‘부지런한 사람들의 공간’으로 표현했다. 어쩌면 도서관에서 불면증을 달래던 후배 역시 아주 작은 숨을 내쉬며, 자신만의 ‘성실’을 실천했던 건 아니었을까.
TIP
도서관 이용 방법과 장서의 대출 유무를 알기 위해서 도서관 온라인 사이트를 이용했다. 특히 국가도서관통계시스템 사이트(libsta.go.kr)는 전국 도서관 홈페이지 링크와 각종 통계 자료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두어 편리하다.
멀리 유구한 것을 내려다보는 일
한강 다리
“해 질 녘에 한강 다리를 걷곤 해요. 집 바로 앞에 양화대교가 있거든요. 일부러 자이언티 노래를 찾아 들으면서 걸어요.”
친구는 퇴근 후 7612번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간다. 5년째 집세를 올리지 않았다는 원룸에서 간단히 세수를 하고 칙칙했던 얼굴에 비비크림을 바른다. 그러고는 한강 다리를 걷기 위해 약속 시간 보다 한 시간 정도 일찍 집을 나온다. 마침 귀에는 하얀색 이어폰이 꼽혀있는데, 진부하게도 ‘양화대교’라는 제목의 노래가 몇 번째 반복해 흘러나오고 있다. 다리를 건너는 삼십 분 동안 친구가 마주치는 사람은 두세 명, 이제 막 전조등을 켠 자동차들이 속력을 낸다. 친구는 발 밑의 미세한 흔들림이 무섭다. 하지만 어쩌면 그 덕에 조금 더 설레는 마음을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친구의 왼쪽 뺨이 주황빛 하늘로 물들고, 강물은 멈춘 듯 천천히 서쪽으로 흐른다. 매일 다른 강과 매일 다른 하늘이지만 친구는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듯한 이 유구한 풍경이 좋다.
TIP
혼자 다리를 걷는 친구를 상상하기 위해 양화대교가 잘 보이는 선유교를 걸었다. 선유교에는 바닥에 나무 데크가 깔려있어 걷기에 부담이 없고, 다리 건너 선유도공원이 이어져 혼자 시간을 보내기에도 괜찮다.
작은 공간을 넓게 쓰는 일
영화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 광화문 씨네큐브에 가요. 다른 극장에서는 상영하지 않는 괜찮은 영화도 많고, 친구를 기다리기에도 적당하거든요.”
혼자 영화 보는 걸 좋아한다. 아니, 혼자 영화관에 가는 걸 좋아한다. 두 시간 남짓 붉은색 의자에 혼자 앉아서 숨죽여 스크린을 보고 있자면, 자막을 따라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 쓸 일이 없어서 좋다. 애인이 있을 때는 어느 타이밍에 손을 잡을까, 어떻게 하면 잡은 손을 다시 자연스럽게 풀 수 있을까 따위를 고민하느라 영화는 안중에도 없었는데, 혼자라면 오롯이 화면에만 집중할 수 있으니 그게 그렇게 좋…. 혼자 영화를 본다면 커다랗고 분주한 멀티플렉스보다는 작은 영화관을 선호하는 편이다. 씨네큐브나 아트하우스 모모, 인디스페이스와 아트나인 역시 독립영화나 예술영화를 상영해주는데, 이런 영화관은 관람객, 특히 커플이 많지 않아 눈치 보지 않고 혼자만의 낭만(고독)을 즐길 수 있다.
TIP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다시 태어나도 우리>를 봤다. 린포체(환생한 고승, 살아있는 부처)의 이름으로 태어난 아이와 그의 곁을 지키는 늙은 승려의 헌신을 담은 이야기다. 나를 포함해 모두 다섯 명의 관람객이 함께 영화를 봤는데, 영화관 불이 켜질 때까지 모두 숨죽여 우느라 아무도 먼저 일어나지 못했다.
이름 모를 과거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
운동장
“교대 운동장에 종종 가요. 앉아 있을 곳도 많고, 사람들 운동하는 거 구경하면서 멍 때리기에도 좋거든요.”
교대 출신이냐는 내 물음에 친구는 “그런 건 아니지만” 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다만 청년들이 무언가 열중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그녀는 덧붙였다. 친구는 어쩌면 그 잠깐의 시간 동안 만화 《H2》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흙투성이 운동복을 입은 까까머리 야구부 학생들이 ‘파이팅’이나 ‘나이스’ 같은 구호로 서로를 독려하며 있는 힘껏 공을 던지고, 치고, 달리는 풍경. 버드나무는 바람에 쓸리고, 깡, 깡, 가끔씩 들려오는 알루미늄 배트 소리가 그 사이를 메울 것이다. 나는 친구의 상상을 떠올리며 어느 볕 좋은 오후에, 오래전 졸업한 대학교 캠퍼스를 찾았다. 상상 속 파이팅 넘치는 풍경은 없지만 여전히 그곳에는 한때 내가 품었던 푸른 열망, 지금 이 순간이 전부인 양 자신만만했던 태도, 치기 어린 표정을 가진 이름 모를 후배들이 각자의 현재를 보내고 있었다.
TIP
캠퍼스에서 혼자 즐길 수 있는 일들이 생각보다 많다. 가령 벤치에서 맥주 마시기, 우레탄이 깔린 트랙 돌기, 운동장이 내려다보이는 계단에서 책 읽기, 멍하니 아무 생각도 안 하기 같은 것들.
둥지에 담겨 바깥을 바라보는 일
샛강길
“당산역에 내려서 여의도 쪽으로 걸어가면 샛강길이라고 있는데, 사람도 없고 조용해요. 나무도 많고요.”
귤, 제주, 기타, 평화, 자전거. 친구는 종이에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을 써 내려 갔다. 그의 단어들을 하나로 모으면 어쩐지 그게 친구의 이름처럼 느껴진다. 나무를 닮은 친구. 바람을 닮은 친구. 친구는 쉬는 날이면 숲을 찾아 걸었다. 특히 자주 갔던 건 여의도 테두리의 샛강길이었다. 정확한 이름은 ‘샛강생태공원’으로 습지와 억새, 이름 모를 철새들이 곳곳에 숨어있고, 길이 평탄해서 걷거나 자전거를 타기에도 적당했다. “까미노에 가기 전에 연습 삼아 매일 걸었어요. 하루에 네 시간 정도? 무릎 다 나갔어요.” 나는 친구의 추천대로 거의 한 시간 정도를 걸었다. 울창한 나무 뒤편으로 높고 단단한 빌딩들이 솟아있는데, 고철과 숲, 서로 다른 온도를 가진 물성들이 하나의 이미지에 놓여 낯선 조화를 이룬다. 움푹 파인 둥지에 담겨 바깥을 바라보는 기분이란, 조금 과장하자면 마치 지금과는 다른 존재가 된 듯한 느낌이 든다.
TIP
막연하게 여의도를 생각하면 빌딩이 가득한 삭막한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생각보다 녹색 식물이 많은 곳이었다. 공원이 섬 테두리를 둘러싸고 있고, 섬을 가로지르는 메인 공원이 있어, 친구의 말처럼 몇 시간이고 자연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가만히 앉아서 오래된 냄새를 맞는 일
명동성당
“내게도 혼자 머물기 위해 일부러 찾는 곳이 있다.”
내겐 종교가 있다.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녀 모태신앙이라고 한다. 하지만 고등학교 이후에는 거의 한 번도 교회에 나가지 않았으니 흔히 말하는 나이롱(?) 신자다. 종교는 다르지만 혼자이고 싶을 땐 명동성당에 간다. 미사가 없는 시간에 예배당 기다란 나무 의자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면, 성당 특유의 오래된 향이 난다. 아마도 이곳을 다녀간 수많은 사람들의 체취일 텐데, 몇 시간이고 마음이 차분해질 때까지 머물곤 한다.
TIP
관광을 위한 장소가 아니므로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방문한다. 무언가 대신 소원을 빌어주고 싶은 사람이 떠오르면 잠시 눈을 감는다.
에디터·포토그래퍼 김건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