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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조 라이트의 영화 <어톤먼트>와 이수진의 영화 <한공주>를 보고 나면 아무 잘못도 없이 막다른 골목에 몰린 채 살아남기를 간절히 원하는 주인공들의 눈빛을 영원히 잊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고 생각한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타인의 고통 앞에서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까?
나는 원래 공감능력이 상당히 떨어지는 인간이다. 의도한 게 아니라(그런 걸 누가 의도할까?) 타고나길 그렇다. 그간 내가 보였을 친절함 역시, 사회적인 제스처이거나 내 입장에서 베푼 동정, 또는 연민이었을 수도 있다. 정작 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마 그간 수도 없이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입혔을 것이다. 내 이름만 들어도 이를 가는 사람이 곳곳에 존재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겠지.
그런 내 상태가 조금 호전된 것은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소설을 읽는 것은 대개 쉬운 일이 아니다. 보통 소설은 두껍고, 요즘처럼 즐길 거리가 많은 시대에는 책을 끝까지 잡고 있는 것만도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한 일이다. 심지어 러시아 소설 같은 경우는 이름과 성을 붙였을 때 20음절 이상인 것은 예사라, 200페이지를 넘게 읽어도 주인공이 누구인지 아직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가 허다하다. 사실 21세기에는 소설보다 드라마나 웹툰이 훨씬 재미있고 또 유익하기까지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설에는 타인의 삶을 천천히, 그리고 아주 세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는 빼어난 장점이 있다. 드라마나 영화였다면 시간 및 비용 관계상 몇 컷 정도로 마무리되었을 인물의 성격이나 심리 묘사가 소설에서는 수십 페이지씩 이어지는 일도 허다하다(물론 읽다가 혼수상태에 빠지는 일도 허다하다). 무엇보다 소설에는 이야기가 있다. 소설은 우리와는 관계없는 삶을 살았을 가상 인물들의 삶과 그들의 생각, 감정을 흥미로운 이야기 속에 잘 버무려낸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떨어뜨린 폭탄 하나가 마을을 초토화했다’는 단조롭고 무미건조하고 종종 비슷하게 반복되는 신문기사의 한 단락을 통해 대체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이 기사에서 그 마을에 살았던 한 전도유망한 젊은이의 삶이 박살 난 것과 어떤 아버지와 어머니가 무릎에 앉힌 채 귀여워하던 딸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것과 한순간에 삶의 터전을 잃은 채 차가운 길바닥에서 공포에 떨어야 하는 사람들의 삶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남의 고통을 내 고통처럼 느끼기가 힘든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누군가의 입장을 그의 시선으로, 최소한 근거리에서라도 들여다볼 수 있다. 그리하여 바람을 피운 여자가 바람을 피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해하고,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살인할 수밖에 없었던 동기를 이해한다. 역지사지하라는 윤리 교과서의 한 구절보다는, 역지사지하지 못해 일어나는 파국을 그린 이야기가 마음에 더 와 닿는다.
영화 <어톤먼트>는 잘못 전달된 한 통의 편지, 그리고 한 소녀의 오해로 인해 운명이 비극적으로 꼬여버리는 두 연인의 ‘이야기’다. 부잣집 딸 세실리아와 그 집 하녀의 아들 로비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랐다. 로비가 케임브리지 의대 입학을 위해 떠나겠다고 한 후에야 두 사람은 서로에게 끌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운명의 그 날, 내내 뭔가에 화가 난 것 같은 세실리아는 깨진 화병 조각을 줍기 위해 로비가 보는 앞에서 옷을 벗어 던지고 속옷 차림으로 분수 안으로 뛰어들고, 이 사건을 통해 두 남녀의 관계는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그런데 이 사건을 목격한 제3의 인물이 있다. 세실리아의 어린 여동생 브리오니다. 갑갑한 시골생활, 끈적끈적한 더위, 몽상에 자주 빠지는 성향, 저택의 늦둥이 막내딸이라는 정서적 위치, 언니에 대한 소유욕, 로비에 대한 호감, 이해하지 못할 어른들의 세계를 향한 두려움과 호기심, 강한 자의식은 소녀가 이 사건의 의미를 완전히 다르게 보게 한다.
집으로 돌아가 세실리아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는 편지를 쓰던 로비는 장난삼아 성적 몽상을 고스란히 담은 편지를 한 통 더 쓰고는 접어둔다. 그리고 세실리아의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초대받아 가는 길에 혼자 놀고 있던 브리오니를 만나서는 언니에게 전해주라며 편지를 맡긴다. 잠시 후 그가 깨달은 것은 그 편지가 진짜 편지가 아니라 성적 몽상을 담은 편지였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길 기다리고 있던 소녀 브리오니는 편지를 모두 읽고 충격을 받은 후에 세실리아에게 건네주고, 로비와 세실리아는 서재에서 편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사랑을 고백한다. 그런데 이들의 정사 장면을 브리오니가 목격하고는(또!) 이를 로비의 일방적인 폭력으로 받아들인다.
그날 밤, 브리오니의 사촌 롤라가 정체불명의 남자로부터 성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 사건까지 목격한 브리오니는(제목을 ‘목격자’로 바꿔도 좋을 정도다) 범인으로 로비를 지목한다. 이제 로비의 인생은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진다.
<어톤먼트>의 원작 소설을 쓴 작가 이언 매큐언은 이렇게 말했다. 9·11 테러를 저지른 테러범들이 단 한 순간이라도 비행기에 탄 승객들의 처지에서 생각할 수 있었다면, 그들이 그 비행기를 몰고 빌딩으로 돌진할 수 있었을까?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래서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긴 하다.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최소한 노력은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의 수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노력하는 일은 중요하다. 브리오니가 죽음을 앞두고 세상에 내보인 소설은 결국 타인의 삶을 이해하고자 하는 발버둥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보았던, 그리고 보지 못했던 세실리아와 로비의 삶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세세하게 들여다보는 것이 자신의 죄를 씻을 길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죄를 씻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그것밖에는 없다. 그래서 그녀가 그 소설을 완성해서 세상에 내보이기까지 수십 년의 세월이 걸렸을 것이다. 두 연인은 이미 죽고 세상에 없지만, 브리오니의 평생에 걸친 발버둥이야말로 바로 그들의 운명에 대한 ‘속죄’였을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사람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20대 초반을 함께 보낸 친구의 아이가 어이없는 사고로 너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그 친구에게 무엇을 해주어야 했을까. 이런저런 이유로 단 하루였던 그 아이의 장례식에 가지 못했을 때, 나는 그게 핑계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사실 내가 그 장례식에 가지 않았던 진짜 이유는 그 친구에게 어떤 표정을 지어 보여야 좋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타인의 고통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아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타인의 고통을 바라볼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내가 비겁해서 그랬던 거다.
영화 <한공주> 속의 소녀 한공주는 집단성폭행 사건의 피해자다. 하지만 누구도 이 소녀를 보호해주지 않는다. 그녀를 둘러싼 어른들은 이 골칫덩어리를 어떻게든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밀어 넣으려고 한다. 그들조차 이해할 수 없는 끔찍한 사건을 그저 덮어버리려고만 하는 것이다. 소녀는 혼자 몸으로 세상을 피해 다녀야 한다. 함께 성폭행을 당한 친구는 임신한 채로 강물에 몸을 던졌다. 그래서 공주는 새로 전학한 학교에서 수영을 배운다. 물에 빠지면 죽을 테니까. 죽고 싶지 않으니까. 다시 시작해보고 싶을지도 모르니까. 이제부터 공주에게 산다는 건 수영을 배우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더 멀리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물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공주는 필사적으로 자맥질하고 발장구를 쳐야 한다.
그런데 공주의 아버지는 합의금을 챙기기 위해 가해자들에게 합의서를 써주고, 가해자의 부모들은 학교로 찾아와 난동을 부리고, 겨우 마음을 열어 보인 친구들까지 공주의 비밀을 알게 된다. 씩씩하게 살아가려던 공주는 이제 세상 끝까지 내몰린 신세다. 그래서 공주는 떠밀리다시피 마지막 선택을 해야만 한다.
만약 우리가 한공주라는 아이의 삶을 가까이서 들여다보지 않았더라면, 이 사건의 자초지종을 공주의 입장에서 바라보지 않았더라면, 공주의 실제 모델이 된 소녀에게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실제 사건의 가해자와 그 가족들, 친구들처럼 소녀를 비난했을까? 아니면 역겨운 사건이라 외면했을까? 이게 나나 내 주변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까? 끔찍하고 화도 나지만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을까?
그건 공주의 끔찍한 동영상을 본 후, 공주가 건 전화를 받지 않는 친구 은희의 심정과 비슷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언제나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마음을 허락하니까. 친구가 어려움을 호소해도 들어는 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친구가 우리 집에서 당분간 신세를 지겠다고 말한다면? 자신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좀 달라고 말한다면? 저절로 몸을 뒤로 빼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어쩌면 《타인의 고통》이라는 책을 쓴 수전 손탁이 말한 연민과 공감의 차이일 것이다.
고통을 겪는 타인을 불쌍하다, 안 됐다고만 생각할 때 우리는 연민의 함정에 빠진다. 우리가 연민하는 타인은 계속해서 약자여야 한다. 보호해주고 도와줘야 할 약자. 그런 그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면? 방 안에 웅크려 우는 대신 거리로 나와서 악을 쓴다면?
수학여행길에 어이없이 목숨을 잃은 수많은 아이의 부모가 거리로 나왔을 때, 그들의 싸움이 계속될 때, “이제 좀 그만하지”라고 많은 사람이 말했다. 그들이 다 몰인정하고 무정해서는 아닐 것이다. 그들 역시 처음에는 울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은 여전히 연민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 만약 그 부모들의 고통에 공감했다면, 같은 부모로서, 같은 나라의 국민으로서, 같은 인간으로서 그 고통이 언제든 자신에게도 찾아올 수 있다고 여겼다면, 그들은 그 부모들과 함께 싸웠을 것이다. 자식 잃은 부모들에게 기꺼이 한쪽 어깨를 빌려주었을 것이다. 최소한 거리에서 싸우고 있는 그들을 보았을 때 말 없는 응원의 시선이라도 보냈을 것이다. 그것이 연민과 공감의 차이일 것이다.
작가 윌리엄 스타이런은 한때 극심한 우울증에 빠져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섰던 적이 있다. 그는 이 경험을 《보이는 어둠》이라는 책에 썼는데, 결국 자신이 삶을 택한 중요한 이유로 조증을 앓고 있던 친구와의 매일 같이 이어지던 전화 통화를 꼽았다. 친구는 매번 자살은 안 된다고 이야기했는데, 그 말에 스타이런은 물론 친구 자신 역시 포기하지 않을 힘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안전한 해변에 서 있는 사람들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에게 “용기를 내라!”고 요구하는 것은 엄청난 모독이다. 그러나 모독이 될지라도 반복해서 그런 격려를 보여주면, 그리고 그런 격려가 충분히 끈질기고 헌신적이고 열정적이라면 위험에 빠진 사람은 거의 언제나 구출된다.
– 윌리엄 스타이런, <보이는 어둠> 중에서
<한공주>의 마지막 장면에서 물에 빠진 공주는 허우적대다가 이내 가라앉는다. 그런데 어느 순간 물 밑에서 공주의 실루엣이 보인다. 공주는 친구들의 응원 소리에 맞춰 강물 밑을 유유히 헤엄쳐 나간다. 감독이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도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공주에게는 끈질기고,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응원과 격려가 필요하다.
어톤먼트 Atonement
조 라이트 감독 | 드라마 | 영국 | 122분
이언 매큐언의 소설 《속죄》를 바탕으로 한 영화로 순간이 낳은 긴 세월을 조명한다. 소설가를 꿈꾸던 소녀의 말 한마디로 소녀의 언니와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의 인생이 뒤바뀌고 소녀는 평생을 속죄하며 살아간다.
한공주
이수진 감독 | 드라마 | 한국 | 112분
<한공주>는 예기치 못한 일을 겪은 공주의 ‘사건 이후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지만 도망 다녀야 했던 공주와 멀지 않은 곳에서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던 우리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돌아보게 된다.
에디터 이현아
글 한수희 일러스트 윤지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