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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법을 몰랐다
춤추는 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쉬는 법을 몰랐다
어느 날 ‘훌쩍’ 여행을 떠났다. 나는 일에 찌든 도시인이라서, 도시인이라면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내버려두고 훌쩍 떠나버렸다.
촌스럽지만, 내가 생각하는 ‘훌쩍 떠난다’는 건 델마와 루이스 같은 일이었다. 조금 자세히 말하자면 아무 거리낌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늘어질 대로 늘어져 있기도 하고, 어쩔 땐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와아~!” 소리를 지르는, 그런 일이었다. 델마와 루이스 정도는 아니지만 나도 그런대로 괜찮은 여행을 했다. 시끌벅적한 관광지는 피해 다니고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놀라운 순간엔 “와 씨….” 하고 소심하게 소리를 내보기도 했다. 그런데도 피곤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여행에 대해선 한 번도 나 자신에게 솔직해져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정말 휴식을 가져본 적이 있었을까? 모든 걸 내려놓고 정처 없이 어디론가 떠나는 게, 정말 휴식일까? 아니면 새로운 시작일까? 난 여행을 떠날 때마다 여행을 가기 싫은 또 다른 마음을 대면한다. 도착해서는 애써 자연스러운 척, 원래 익숙한 사람인 척 용을 써보기도 한다. 하지만 새로운 숙소의 천장 패턴과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이 아주 오래도록 첫날밤의 기억으로 남는 것을 보면, 첫날밤 잠들지 못해 뻐끔거린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를 알 수 있다. 낮이 되면 관광객이 되지 않도록 다짐한다. 너무 많은 곳을 보려 하지 않고, 한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기로 한다. 그래서 카페나 호텔 로비 어디든 앉아 되도록 많은 시간을 보내본다. 하지만 그것이 지루함인지 휴식인지는 나 자신에게도 고백하지 못할 여행의 후기다.
어느 날 가족 여행에서 나와 같은 여행을 즐기는 친구를 본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운전을 하시고, 어머니는 앞 좌석에 앉아 계셨다. 강아지는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길고 긴 시간 동안 어머니 무릎에 앉아 있었다. 다른 강아지들처럼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헥헥거리며 경치를 좀 즐겼으면 좋겠는데, 서울에서 출발해 여수에 도착할 때까지 강아지는 고개를 돌려 뒤에 앉은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심히 부담스러운 경험이었다.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세상에 내 방을 제외하고 내게 편안한 곳이 있을까? 여행지 숙소 어귀 어느 귀여운 카페에 앉아 가벼운 책을 읽다 말고 생각했다. 이런 내 모습을 보며 강아지 기분을 알 것 같았다. 확신컨대, 친구는 앞에 앉고 싶기도 하고, 뒤에 앉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떠난다는 건 어쨌든 결국은 성공한다. 하지만 그것이 휴식인지는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또 다른 게임을 즐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긴장되기도 하고 부자연스럽기도 한 어쨌든 일상적이지 않은 일이다. 휴식을 위해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이야기일까? 쉬고 싶을 때 수학 문제를 푼다는 어떤 가정주부의 라디오 사연처럼 내겐 조금 말이 안 되는 이야기처럼 여겨진다.
춤추는 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나는 쉬는 법을 모르는 것 같다. 쉴 곳을 찾아 어딘가로 떠나는 나와 그걸 지켜보는 강아지. 우린 아마도 비슷한 수준의 몸치들이다. 하지만 누구나 자신만의 춤이 있다고 난 굳게 믿는다. 아직 발견되지 않았을 뿐.
어느 날 뜻하지 않은 계기로 나만의 휴식을 발견하게 되었다. 포도 수확이 한창인 어느 가을날이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한가할 것 같은 농가 주택에 머물며 쏟아지는 여유를 만끽할 예정이었다. 그것은 또 한 번 나만의 휴식을 찾아보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그곳엔 위로 곧게 자란 나무와 새하얗게 빛나는 멋진 들판, 그리고 쏟아지는 별들이 있었다. 하지만 가장 깊게 각인된 풍경은 들판 여기저기에 널린 여러 종류의 의자였다. 유명 관광지를 피해 간 곳이지만, 그곳은 사실 미국 노인들에게 유명한 휴양지였던 모양이다.
노인들은 매일 밖에 나와 따뜻한 햇볕을 쬐며 이쪽저쪽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이 의자는 모두 노인들의 놀이기구인 셈이었다. 무질서하게 놓인 다양한 의자들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앉아봤을 수많은 사람들의 지루한 시간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젊은 사람이 감당하기엔 시간이 너무나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하루에 하는 일이 아침 먹기, 점심 먹기, 저녁 먹기, 세 가지뿐이었다. 나는 마치 사우나에 들락날락하는 어린아이처럼 이 의자 저 의자 돌아가면서 눕기도 하고 앉기도 하고 잠이 들기도 했다. 책을 읽어볼까 하다가 잠이 들고, 그림을 그려볼까 하다가 금세 내려놓았다. 하지만 지루하다는 생각은 애써 하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 무렵, 내가 누워본 약 스물두 번째 쯤 되는 어느 허름한 의자에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완벽한 평온함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곳에 누우면 보이는 하늘과 들판의 비율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몸은 나른한데 잠은 오지 않았다. 책을 읽어도 고개가 아프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의자의 각도였다. 난 여행이 끝날 때까지 그 의자에 누워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책을 읽으려고 누운 게 아니라 의자에 누우려고 책을 읽었다. 마찬가지로 의자에 눕기 위해 커피를 마시고, 와인을 마셨다. 낮에 눈이 부시면 선글라스를 쓰고, 날이 더우면 셔츠를 벗어버렸다. 나는 점점 풍경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느 끈기 있는 미국 노인들도 의자에서 나보다 오래 버티진 못했다. 노인들이라고 지루함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여태까지는 달력에 있는 빨간 글씨가 휴일인 줄로만 알고 지냈다. 빨간 날엔 반드시 떠나거나, 아니면 늦잠이라도 자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도 쉬는 것 같지 않더라니… 나의 휴일은 달력 안에서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자신만의 휴일을 갖는다는 건, 마치 자신만의 댄스를 가지게 되는 것처럼 든든한 일이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누군가의 휴일은 음표로 떠다니고 있고, 누군가의 휴일은 침 속에 단맛으로 숨어있다고 한다. 나의 휴일은 15도 각도로 기울어져 쉬고 있는 중이다.
글·그림 한승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