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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잡다한 신호를 던지며 살아가는 사람들
최신 어금닛소리
온갖 잡다한 신호를 던지며 살아가는 사람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에 들어맞는 행동이 있다. 타인의 시선이 낯뜨거워 엄두가 나지 않는, 그렇다고 혼자 있는 시간을 따로 할애하기엔 시시하기 짝이 없는 어떤 행동. 예를 들어, 허공에 대고 테니스 서브 자세를 연습한다든지, 가사를 외우지 못한 유행가를 더듬더듬 불러본다든지, 마이클 잭슨의 문워크 스텝을 밟아본다든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기에는 짧은 30초, 그렇다고 헛기침만 하고 서 있기도 뭐한 1분. 그때그때 떠오르는 어떤 동작이나 음성을 기습적으로 시험해본다.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만 할 수 있다. 이웃 간 체면을 중시하는 뉴타운 주민에게 선보일 만한 행동은 아니니까.
한번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1990년대 전설의 발라드곡을 공기 소리로 열창하는데, 몰입이 지나쳤는지 엘리베이터 도착 안내음을 미처 듣지 못했다. 덜커덩 문이 열린 그때, 나는 한창 허리를 뒤로 젖히고 노래의 클라이맥스를 소화하는 중이었다. 열린 문틈으로 22층 주민의 시선이 쏟아졌다. 삼성에 재직하는 아저씨와 까칠한 중학생 따님이다. 아, 그 짧은 순간 나는 신께서 그들로 하여금 경멸의 비웃음을 짓게 해주길 간절히 바랐다. 만약 그랬다면 비극은 희극으로 승화했으리라. 하지만 자비는 없었다. 두 사람은 재빨리 시선을 거두고, 황당하고 불쾌하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겠다는 결의를 온몸에 휘감은 채 내 앞을 지나쳤다. 비극은 트라우마로 굳었다. 그들이 사라진 후에도 나는 가상의 마이크를 쥔 손가락을 풀지 못한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아, 제길. 요즘도 가끔 그때 기억이 되살아나면 깜짝깜짝 놀라며 식은땀이 흐른다. 무거운 극세사 이불에 몸을 숨기고 돌이 되어 영원히 사라지고 싶다.
비슷한 일화는 여럿 있다. 지하 주차장에서 인기 농구 선수의 슈팅 자세를 흉내 내는 모습이 경비 아저씨에게 발각된 적도 있고, 재활용품 수집장 뒤편 후미진 골목에서 팝핀 웨이브 연습하는 장면을 통장님께서 목격한 적도 있다. 그 외에도 단지 내 곳곳에서 나의 소소한 연습 행위는 심심찮게 노출되곤 했다. 우리 동네에서는 나를 ‘연예인의 한을 품은 대머리 아저씨’ 따위의 별명으로 부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에게 내 모습을 드러내기를 꺼리는 편은 아니다. 오히려 나 자신은 어느 정도 무대 체질이라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부터 발표나 공연도 곧잘 했다. 나이가 들어서도 마이크를 들고 말하는 자리에서 일종의 쾌감이랄까, 만족이랄까 하는 충실한 느낌을 즐긴다. 상황에 따라 다르긴 해도, 나는 주로 말과 글, 행동을 통해 대상화되는 일에 인색함이 없는 편이다. 그렇지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에 수행하는 막간의 연습을 이웃 주민에게 보이고 싶진 않다. 이런 상반된 태도는 뭘까? 시도 때도 없이 아재 개그로 언어 테러를 하는 것과 동네 후미진 곳에서 게임 캐릭터를 성대모사 하는 것은 뭐가 다른가.
분석해 보자면, 나는 혼자만의 행동을 목격 당한 상황 자체에는 별다른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듯하다. 이에 관한 근거로 엘리베이터에 혼자 탑승한 경우를 들 수 있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때와 마찬가지로 엘리베이터 내부에서도 하고 싶은 행동을 여과 없이 실행에 옮긴다. 그곳은 검은 감시카메라가 위압적으로 내려다보는 공간이다. 나의 칼날 같은 춤사위와 영웅적 액션이 관리사무소 직원에게 실시간으로 전송되고, 심지어 HD 화질로 녹화된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지 않은가. 하지만 나쁘지 않다. 은근히 누가 감시해주길 기대할 정도다.
어쩌다 춤 동작이 유난히 잘 된 날에는 녹화를 극적으로 마무리하고자 감시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하기도 한다. 이 정도 뻔뻔함이라면 내가 무엇을 하든 신경 쓰지 말라는 식으로 막 나갈 수도 있을 텐데.
이웃들 앞에서 느끼는 부끄러움은 어쩌면 목격자가 감당해야 할 불편함에 대한 심리적 반사 작용일 수도 있다. 22층에 사는 부녀는 예상치 못한 시간과 장소에서 괴이한 장면을 목격하고 평안을 잃었다. 이 때문에 자신이 거주하는 아파트 단지에 걸어둔 안정감이 얼마간 손상됐을 수도 있다. 따지고 들면, 일상의 소소한 연습은 굳이 감춰야 할 일이 아니다. 범죄가 아니잖아. 그러나, 누군가 원치 않게 불쾌한 장면을 대면했고, 그 장면을 연출한 주인공이 나라면 그건 신중히 반성해야 마땅하다. 무대 체질이든 연예인병이든, 그게 뭐든 간에 ‘부끄러움은 그들의 몫’이라는 식으로 무책임하게 굴어서는 곤란하다.
우리는 늘 다양한 종류의 신호를 내보내고 받아들인다. 그 신호는 많은 경우 말과 글이라는 형식을 띠고, 이에 따라 표정과 몸짓도 중요한 신호로 작용한다. 헤어스타일과 옷차림, 소지품과 같이 외모를 이루는 요소도 마찬가지다. 요즘에는 사진이나 그림으로 신호를 보내는 이들도 늘어났다. 이 중에는 ‘배고파’라는 말과 같은 단순 명쾌한 신호에서부터, ‘하금테 안경을 블랙 컬러 상의와 매치해서 차분한 이미지를 강조’하는 것과 같은 암시적인 신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말투나 행동은 물론, 외양, 스타일 역시 내가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일상의 신호로 작용함을 알아챈 사람들은 이를 활용해서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보이게 할지를 고민한다. 화장법, 머리 매무새, 옷과 구두, 액세서리를 선택하는 일은 단순히 이성의 호감을 사거나 자신만의 개성을 과시하는 차원을 넘어, 타인이 자신을 어떤 식으로 인식하게 할지를 계획하고 설계하는 수준 높은 사회적 신호 디자인이라 할 수 있다.
몸과 마음을 다해 펼치는 나의 ‘엘리베이터 앞 퍼포먼스’는 어떨까.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아파트 출입구에서 덩치 큰 중년의 아저씨가 과격한 몸짓으로 허공을 향해 뭔가를 치고받고 뛰어오르는 모습은 온건한 중류층 동네 주민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신호, 아니, 그 이상의 충격파로 작용하리라. 이곳에서는 서로를 예의 바르게 외면하는 신호가 자연스럽다. 가능한 한 눈을 마주치지 말고, 몸짓을 최소화하고, 억지 미소를 띤다. 이 정도 주파수 범위를 넘어선 신호는 당혹과 불쾌를 낳는다. 그러므로, 이런 나만의 행동이 누군가에게 신호로 포착당하지 않도록 특히 조심할 일이다.
예전에 어떤 기관에서 직책을 맡게 되어 임명식에 참석할 일이 있었다. 그 기관은 꽤 권위적인 냄새를 풍기는 단체였다. 임명식에 참석하기에 앞서 받은 안내 이메일에는 정장을 입고 와달라는 요청이 적혀 있었다. 나는 그 요청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평소에 자주 입던 무릎이 찢어진 청바지에 밤색 가죽 재킷을 걸치고 식장에 나타났다. 긴 외국 생활을 마치고 막 귀국한 터라 가진 옷 중에 정장이 없다는 편한 핑계가 있었고, 형식적 절차가 마냥 싫은 사춘기 반항 정신 비슷한 심리가 발동한 탓도 있었다. 임명식을 진행하는 직원들은 내 행색에 당황을 감추지 못해 안면이 초록색으로 변했다. 예상을 넘어선 그들의 충격적 반응에 별일 있겠냐 했던 나의 안일함이 무안했다. 직원 한 분이 정장 재킷을 하나 빌려와 나에게 걸쳐줬다. 되도록 눈에 띄지 않게 숨어 있으라는 당부도 덧붙였다. 임명장을 수여하는 사람은 그 기관에서 가장 직책이 높으신 어르신이었다. 요령껏 숨긴 했으나, 단상에 올라간 순간만큼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급기야 최고 권력자께서는 나의 청바지와 티셔츠를 목격하고 말했다. 아뿔싸, 그것은 곧 기관을 향한 모욕, 권위를 향한 도전의 신호로 작용했다.
나는 한동안 이 ‘찢어진 청바지’ 사건을 꼰대적 권위에 도전한 신입의 장렬한 에피소드 정도로 회고하곤 했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 의미를 다르게 보는 중이다. 그 기관과 기관장, 그리고 직원들 성향이 다소 보수적이긴 하나, 그들이 구태의연한 형식과 절차를 강제함으로써 젊고 자유로운 영혼을 억압했다는 식으로 단순하게 해석할 수는 없다. 관계와 정황은 생각보다 복잡하기 마련이다. 그런 식으로 따진다면 장례식장에서 검은색 옷을 입는다든지, 종교 사원에서는 떠들지 않는다든지 하는 모든 의례적 관습을 무시해도 좋다는 결론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실용적 이유가 결여된 어떤 사회적 관습 중에는 소통의 신호로 작용하는 것들이 꽤 있다. 보수적 기관의 복장 규정은 그 기관과 구성원을 향한 존중심을 표현하는 일종의 사회적 신호로 볼 수 있다. 그러한 신호 체계를 숙지하지 못한 나는 의도치 않게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고, 몇몇 사람을 화나게 했다. 이는 엘리베이터에서 죄 없는 22층 부녀에게 당혹감을 안겨준 일과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언어’라는 단어는 원래 말과 글을 뜻하지만, 요즘에는 사회에서 통용되는 모든 종류의 신호와 상징을 포괄한 의미로 쓰기도 한다. 말과 글은 관습적으로 약속된 추상적 기호를 통해 생각을 표현한다. 이 추상성 덕분에 말과 글은 표현 방법이 더없이 단순 명료하지만, 동시에 지시 범위와 뉘앙스가 흐리터분하다는 부작용도 발생한다. 이를 보완하고자 사람들은 표정, 손짓, 그림, 사진, 패션, 사물 등과 같은 이미지 언어를 동원한다. 하지만 투명한 소통은 여전히 까마득하다. 매일같이 SNS에, 블로그에, 카톡에 수없이 많은 단어와 짤방을 올린다 한들, 그걸 읽은 수천 명 중에 내 마음속 풍경을 똑같이 떠올릴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아주 조금이라도 성취하고자 지금껏 인류는 죽을 힘을 다해 문학, 예술 작품을 만들지 않았던가. 결국, 인간이란 자기 자신이라는 두텁고 견고한 표피 안쪽에 고립된 채로, 다른 이에게 나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온갖 잡다한 신호를 던지며 살아가야 하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엘리베이터 앞 퍼포먼스’와 ‘찢어진 청바지’를 사회적 언어로 연결지어 정리한 뒤로 최근에는 또 다른 어떤 신호를 놓고 고민하는 중이다. 이것은 형식 면에서 극도로 단순하지만, 의미 면에서는 다채로운 층위를 내포한 문자 신호다. 요즘 사람들이 SNS나 톡에 올리는 글에는 어김없이 ‘ㅋ’이 찍혀 있다. 단어나 문장의 끝에 더해져서 미묘한 뒤틀림을 더하거나, 때로는 그것만으로 독립적인 문장(?)을 이루기도 한다. 현기증 난다. 무슨 말을 던져도 돌아오는 건 ‘ㅋㅋㅋ’. 문자 메시지에서 ‘ㅋ’이 등장하는 빈도는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웃음소리에서 유래한 이 최신 어금닛소리는 근 십여 년 동안 사이버 세상에서 폭발적 인기를 구가한 결과, 이제 가장 중립적인 일상어로 자리 잡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키패드 왼쪽 구석 키읔을 눌러대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동시에 모든 말을 할 수 있길 바란다. 어차피 어떤 신호를 내던지든 청중은 그것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거나, 아니면, 아예 읽지 않을 것이 뻔하다. 그럴 바엔 구질구질하게 여러 말 늘어놓기보다 ‘ㅋㅋㅋ’든 뭐든 빈껍데기 기호 하나 던져놓고 상대방이 바라는 대로 해석하도록 놔두는 편이 현명하지 않겠는가.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니, 이 글 역시 내 생각 좀 읽어달라고 질척대는 것 같아 기분이 찌뿌둥하다. 전체선택 삭제하고 그저 쿨하게 ‘ㅋ’이라고 한 글자만 써서 보낼까. 그럼 원고료 십원 ㅇㅈ? ㅇㅇㅈ.
글 이지원
일러스트 송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