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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반찬
우리 집 아이들은 첫째, 둘째 모두 지지리도 입이 짧았다. 먹는 양도 적은 데다, 먹는 것만 먹었다. 엄마가 만든 음식이 맛이 없어서 그런가, 요리 솜씨 없는 엄마가 비슷한 메뉴만 내놓아서 그런가, 아이들 편식이 죄다 엄마 잘못인 것 같아서 밥할 시간만 되면 마음이 답답해졌다. 자기가 직접 만들면 잘 먹는다길래 아이들과 꼼지락 꼼지락 쿠키도 굽고 주먹밥도 만들어봤지만 요리가 미술놀이인 줄 아는지 ‘만들기’만 좋아하고 먹으라고 하면 도망가기 일쑤였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가 “순무가 뭐야? 먹어보고 싶다.”라고 하는 게 아닌가? 《커다란 순무》라는 그림책을 읽은 날이었다. 밭에서 커다란 순무를 캐내려고 할아버지, 할머니, 개와 고양이까지 달려들어 영차영차 힘을 모으는 내용이었는데, 아이고! 기껏 먹겠다는 게 왜 하필이면 구하기 힘든 순무란 말인가. 수소문해 간신히 구하긴 했는데, 뭘 해 먹을지 까마득했다. 결국 놀이터 모래밭에 순무를 묻어놓고 인형들을 총동원해 캐내는 척, 엉뚱한 놀이만 몇 번 하고선 순무는 쪼글쪼글해질 때까지 냉장고 안을 굴러다녔다. 그래도 아이가 그림책에 나온 음식에는 관심을 갖는다는 걸 알아내 한동안 쏠쏠했다. 《쥐돌이와 팬케이크》를 읽으면서 팬케이크를 먹고, 《손 큰 할머니의 만두 만들기》를 읽고선 만두를 먹었다. 일부러 음식이 나오는 그림책을 찾아보곤 했다. 행여나 김치를 먹으려나 싶어 김치 담그기에 관한 그림책을 줄줄이 들이댄 적도 있다. 당연히 실패했지만.
아이들은 《구리와 구라의 빵 만들기》를 읽고 나면 꼭 카스텔라를 찾곤 했다. 달콤하고 폭신폭신한 카스텔라야 원래 잘 먹던 메뉴였지만 그래도 간식으로 카스텔라를 우유에 찍어 먹이고 나면 얼마나 든든하던지.파란 모자와 파란 멜빵 바지의 구리, 빨강 모자와 빨강 멜빵 바지의 구라는 하루 종일 놀아도 지치지 않는 들쥐 형제다. 어느 날 구리와 구라는 숲속에서 커다란 알을 발견한다. 이걸로 무얼 하면 좋을까?
‘우리 침대보다 더 두껍고 푹신푹신한 달걀 프라이’와 ‘아침부터 밤까지 먹어도 다 못 먹는 카스텔라’ 둘 중에서 고민하다 카스텔라를 만들기로 한다. 하지만 집까지 알을 가져갈 방법이 마땅치 않아 숲속 그 자리에서 요리하기로 한다. 집에서 프라이팬과 버터와 밀가루, 우유, 설탕 등을 챙겨와 요리를 시작한다. 그러자 맛있는 빵 냄새를 맡은 숲속 동물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한바탕 파티가 벌어진다는 내용이다.빵이 될 때까지 구리와 구라는 노래를 부른다.
“우리들 이름은 구리와 구라세상에서 제일 좋은 건
요리 만들기와 먹는 일 구리 구라, 구리 구라”
음식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지루한 시간에 노래를 한다고? 여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아이들과 함께 ‘컵라면 송’을 만들었다.
입 짧은 아이들은 먹으라는 건 안 먹고, 엄마가 주고 싶지 않은 건 잘 먹는다.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컵라면. 빨리 먹고 싶어 덜 익었는데도 자꾸만 안달하는 아이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구리와 구라처럼 노래를 부르기로 한 것이다. 동요는 너무 짧고, 애국가는 너무 길었다. 우리가 찾아낸 노래는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한 곡 딱 부르고 나면 컵라면이 딱 적당하게 익어 있곤 했다.
《구리와 구라의 빵 만들기》는 구리와 구라가 커다란 달걀 자동차를 만들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데서 끝난다. 아이들은 기억할까? 엄마가 이 달걀 자동차를 만들어 주려고 바퀴 의자 위에 박스를 씌웠다가 실패한 일. 그래서 그냥 바퀴 의자에 태우고 밀어줬더니 아래층 할아버지께서 올라오셨던 일. 하지만 아이들을 태우고 노는 것을 보시고는 야단치지 않고 껄껄 웃으셨던 일.구리와 구라. 책을 읽어주던 애 아빠가 “구리와 구라? 구리다는 건가? 구라를 친다는 건가?” 실없는 농담을 할 만큼 독특한 이름이다. 이름만 들어서는 국적도 성별도 모르겠다.
하지만 《구리와 구라의 빵 만들기》뿐만 아니라 《구리와 구라의 헤엄치기》, 《구리와 구라의 손님》 등 구리와 구라 시리즈는 우리 집 아이들뿐만 아니라 우리 집에 놀러 온 어떤 아이 손님에 게 읽어줘도 실패한 적이 없는 책들이다. 특히 《구리와 구라와 꽃님이》는 첫째 아이 별명이 ‘꽃님이’여서 중학생인 지금도 책상 한 켠을 차지하고 있다.
《구리와 구라의 빵 만들기》가 처음 나온 것은 1963년, 무려 50년 넘도록 롱런 중이다. 여기 50년 흥행할 만한 책이또 있다. 바로 《꽁꽁꽁》. 간 큰 아빠가 새벽 두시에 술에 잔뜩 취한 채 귀가했다. 한 손에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내일호야가 보면 좋아할 거야!”라고 말한다. 기껏 아이스크림을사 온 것은 좋은데, 문제는 취한 아빠가 냉장고 문을 꽉 닫는 걸 잊어버렸다는 거다. 삐삐삐 경고음이 울리고 점점 더냉장고 안이 뜨거워진다. 심지어 아이스크림 통을 뒤집어놓으셨네? 아이스크림은 방울방울 녹더니 급기야 카스텔라위에 철퍼덕 쏟아져버린다. 이제 냉장고 안의 다른 음식 친구들이 애타 한다.
“어떡하지? 내일 아침 호야가 얼마나 실망을 할까?”
요구르트 오 형제부터 아래층에서 시끄럽다고파를 타고 쪼르륵 올라온 딸기들까지 다 같이 걱정이다.보이지 않는 곳에서 작은 것들이 꼬물꼬물 움직이다가 사람이 보면 “흡!” 숨죽이고 멈춰 선다는 상상은 언제나 신난다. 자다 말고 목마른 아빠가 물을 마시러 냉장고 문을 확열었을 때, 아이스크림이 녹을까 봐 좌충우돌하던 음식 친구들도 “흡!” 읽던 아이들도 “흡!” 숨을 죽인다. 벌컥벌컥물을 마신 아빠는 냉고 문을 꽝 닫는다. 어휴, 됐다. 이제아침까지 녹을 일은 없겠네. 다음 날 호야가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발견한 것은 녹은 아이스크림과 카스텔라, 딸기들이 만든 아이스크림 케이크다. 유쾌한 반전에 아이들은 바로 외친다.
“또 읽어 주세요.”
하지만 엄마 입장에선 슬슬 기분이 나쁘기도 하다. 뭐야, 이아빠 도대체 몇 시에 들어온 거야? 새벽 두시? 그것도 완전히 취해서? 그림 좀 봐. 천정도 벽도 다 꾸불텅꾸불텅. 술을 얼마나 많이 마셨길래 세상이 이렇게 보일 정도람, 심지어 냉장고 문도 제대로 안 닫았네, 으이구. 뭐, 그래도 아이스크림이라도 사 왔으니 봐준다. 한 번만 더 늦게 와 봐 그냥 콱. 이번에는 아빠가 숨죽이고 정지 동작을 할 순간이다.
흡!
구리와 구라의 빵 만들기 | 글 나카가와 리에코,
그림 야마와키 유리코 | 한림출판사
들쥐 형제 구리와 구라가 숲속에서 커다란 달걀을 발견한다.
“이것으로 뭘 하지?” 형제가 맛있는 카스텔라를 만들자 빵 냄새를 맡고 동물 친구들이 모여든다. 다 같이 냠냠냠 나눠 먹으며 끝나는 이 단순한 이야기에 아이들은 왜 이렇게 열광하는 것일까? 구리와 구라 이름은 프랑스 동화에서 나오는 ‘구루리 구루라’ 노래 한 구절에서 따왔다고.
꽁꽁꽁 | 글·그림 윤정주 | 책읽는곰
《연이네 설맞이》, 《말놀이 동시집》 등의 책에 그림을 그린 윤정주 일러스트레이터가 처음으로 글과 그림을 함께 작업한 《꽁꽁꽁》. 23년 경력의 작가답게 아이들의 눈높이에 딱 맞춘 책이다. 간밤에 아빠가 사 오신 아이스크림은 냉장고 문이 열리는 바람에 자칫 녹아버릴 위기에 처한다. 표지에서 점점 녹아내리고 있는 제목을 보시라. 냉장고 속의 다른 음식 친구들은 어떻게 아이스크림을 구해낼까? 귀여운 반전이 있는 ‘차가운 냉장고 속 따뜻한 이야기’
에디터 김현지
글 전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