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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주소년 가족ㅡ박경환·이사라·박준희·박찬희·박솔희
함께 사는 이름
고민에 잠겨 침잠할 때면 읊조리게 되는 마법 같은 문장이 있다. “지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로 나는 얼마나 고민했었나.” 삶의 지침이 되어주는 것들은 나에게 대개 노랫말이다. 동굴로 숨어드는 날이면 내게 내려지던 동아줄, 그 목소리를 만나러 제주에 왔다. 유랑 중인 재주소년 식구들과 마주한 건 어느 숲속. 연주되는 선율 틈새를 비집고 나온 와글와글 거침없는 숨소리, 거기 깃든 사랑의 문장을 듣는다. 이들을 만난 뒤로 비단 글자로 적힌 것만을 문장이라 생각지 않기로 했다. 다섯 식구와 뒤엉킨 무해한 여름 틈에서 재주소년의 7집 제목 ‘머물러 줄래’를 가만히 읊어 보는 날이다.
제주도에서 재주소년을 만나게 됐어요. 오늘은 특별히 다섯 식구와 ‘가족 음악 유랑단’으로 함께하게 됐는데요. 독자들에게 소개해 주실래요?
경환 안녕하세요. 저는 재주소년 박경환이고요. 다섯 식구가 모두 7집에 참여하게 되어 공연에 함께하고 있어요. 이번 투어는 도초도, 여수, 제주로 연결되는 공연인데, 총 4회 중 3회까지 마쳤고 내일이 마지막 공연이에요. 투어 중에 만나니 마치 여행에 함께하는 기분이네요(웃음).
사라 새벽부터 제주에 오느라 고생하셨죠. 사진 촬영을 너무 재미있게 했는데, 아이들 활기가 넘쳐서 에디터님과 포토그래퍼님이 힘드셨을 것 같아요. 오늘 제주까지 찾아와 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작곡가이자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는 이사라예요. 집에서는 엄마 역도 맡고 있고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자, 삼형제도 소개해 줄래?
준희 안녕하세요. 둘째 찬희와 셋째 솔희를 컨트롤하면서 재주소년의 ‘준찬솔’ 로 함께하고 있는 5학년 박준희입니다!
찬희 저는 엄마 뱃속에서 죽다, 살다, 심장이 멈출 뻔하다, 죽을 뻔하다, 살아난 전설의 소년, 불사의 소년 박찬희입니다!
솔희 저는 막내이자 형아들 옆에서 같이 노래하는 박솔희예요. 오늘 너무 더워요. 얼른 수영하러 가고 싶어요. 이모들도 같이 가요!
사라 (웃음) 우리 오늘도 파이팅 해볼까?
모두 (손을 모으고 외친다.) 파이팅!
대화 시작부터 기운이 넘쳐서 좋은걸요(웃음). 이번 공연은 온 식구가 무대에 올라 함께 노래하고 연주하는 구성이죠. 앞선 공연들, 어땠어요?
경환 서울에서 진행한 7 집 [머물러 줄래] 발매 공연은 관악아트홀에서 크게 진행했다면, 이번 투어는 조금 더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분위기였어요. 투어 첫 공연은 도초고등학교에서 송 캠프Song Camp 형태로 진행했어요.고등학생들과 음악을 만드는 구성이었죠. 싱글로 발표한 ‘우리들의 도초도’ 를 이번 앨범에 정식으로 수록했으니 도초도에서 투어를 시작하면 좋겠다 싶었어요. 송 캠프는 1박 2일간 진행했는데, 과연 고등학생들과 음악을 만들 수 있을까 걱정한 것과는 달리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어요. ‘우리들의 도초고’라는 음악을 만들었는데 무척 재미있었죠. 그다음 행선지는 여수였는데요. 둘 다 아래쪽에 있으니까 오가기 수월할 것 같았는데 굉장히 멀고 길도 험했어요. 비가 엄청 많이 내렸거든요. 게다가 여수 공연은 〈여수밤바다 낭만버스킹〉이라고, 버스킹 형식으로 진행되는 무대였는데 기상 악화로 취소되었어요. 이대로 마무리하긴 아쉬워서 주최자 카페에서 게릴라성으로 공연을 꾸렸는데, 색다른 느낌으로 좋더라고요. 제주에서는 제14회 남방큰돌고래의 날을 기념하는 행사에 함께했어요. 돌고래 보호구역 지정을 축하하면서 자유로운 분위기로 진행한 공연이었죠. 공연과 전시가 어우러진 행사여서 저희도 즐기면서 놀 수 있었어요.
무대에 오른 준찬솔은 어땠어요?
경환 ‘삼형제’, ‘우리들의 도초도’를 싱글로 발매하면서 간간이 함께 공연할 일이 있었는데요. 무대가 익숙해졌는지 멘트 욕심을 내더라고요. 공연 끝날 즈음엔 “저희 공연 재미있었나요?” 하고 호응도 유도하고, 뭐라도 말하고 싶어서 마이크를 서로 가지려고 목청 높이고(웃음). 첫째 준희는 어느덧 5학년이라 동생들보다는 의젓해서 부끄러움이란 걸 아는데 둘째, 셋째는 아직 어려서 마이크 싸움이 치열해요.
사라 관악아트홀 공연이 특히 개구졌어요. 앙코르 곡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를 부를 때, 유난히 호응이 좋아서 공연을 잘했나 보다 싶었거든요. 그런데 알고 보니 아이들이 무대를 누비면서 춤을 췄더라고요. 후주가 시작되면 준희 트라이앵글 연주에 맞춰 무대 뒤에 있던 아이들이 다 같이 나오는 구성이었는데, 거기서 텀블링까지 했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랐어요(웃음). 나중에 2층에서 촬영한 영상 보고서야 알게 됐죠.
관객만큼 즐겼군요(웃음). 공연 후기에 ‘한 편의 동화를 보는 것 같았다.’는 이야기가 많더라고요. 이런 후기를 보면 어때요?
경환 ‘의도한 대로 잘되어 가고 있군.’ 싶어요(웃음). 관악아트홀은 규모가 크고 무대와 객석이 확실히 나뉘는 구조인데요. 그럼에도 다 같이 어우러지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런 의도가 잘 반영돼서 동화 같은 분위기란 표현을 해주신 게 아닐까 싶어요. 앨범 특성도 그렇고, 아이들이 무대에 오르기도 하니 전 연령이 관람 가능한 공연으로 구성했는데요. 사실 공연장 측에서도 전 연령 관람을 다소 우려하셨어요. 근데 오히려 모든 연령이 함께해서 좋은 점이 훨씬 많았어요. 관객의 모든 소리가 공연의 일부가 될 것 같았는데 실제로 ‘꽃, 나비’를 부를 때 아기가 ‘빽’ 하고 울었거든요. 저는 그 순간이 유난히 아름답게 느껴지더라고요. 감동이 배가 되는 느낌이었어요.
사라 이번 공연을 보면서 울었다는 후기도 많았어요. 사실 저도 연주하면서 울음을 여러 번 참았는데, 관객들의 생생한 후기를 들으니 또 울컥하더라고요. 저는 공연할 때도 그렇고, 합주할 때도 자주 울음을 참아요. 아이들과 함께하는 이런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어서요. 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속옷 차림으로 누워서 연습하고 합주하는데, 이 우스운 장면이 저한테는 너무 찰나처럼 느껴져요. 아이들이 조금 더 자라면 같이 공연 안 한다고 할 텐데, 노래를 만들어서 부르는 것도 지금 아니면 못 할 텐데, 생각하면 눈물부터 나요. 매일매일이 소중해서 드는 감정이겠죠.
경환 제 노래에, 특히 아이들 탄생 이야기를 담은’삼형제’ 같은 곡엔 저희만 울컥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관객들도 감동했다고 하니까 기분이 참 묘하더라고요. 모두 가족에겐 같은 마음이구나 싶어서요.
‘삼형제’를 듣고 나면 누구라도 이 노래의 주인공을 궁금해할 거예요. 둘째 찬희 이야기가 특히 찡한 부분이 있죠. “네가 태어났던 여름 특별히 떨렸지 네가 아픈 줄 알았어 가슴을 쓸어내린 그 여름”.
사라 저희한텐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에요. 둘째 찬희는 27주 차에 심장 기형 판정을 받았어요. 큰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는데 심장에 구멍도 여러 개 있고 동맥과 정맥이 심장과 반대로 연결돼 있어서 태어나면 무조건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어요. 네다섯 의사 선생님 모두 같은 소견이었죠. 매일이 걱정이었고, 출산하는 날에도 긴장을 많이 했어요.
경환 그런데 멀쩡하게 태어났어요. 오진이었죠. 모든 의사가 같은 소견을 말할 정도로 초음파상으로는 잘못된 것처럼 보였나 봐요. 천만다행이었어요. 심장에 구멍이 있는 상태였지만 4년 안에 자연적으로 아문다고 해서 태어나자마자 수술하는 일은 피할 수 있었어요. 노랫말 그대로 가슴을 쓸어내린 여름이었죠.
‘우리들의 도초도’는 찬희 주도로 만든 곡이라고 들었는데, 삼형제가 이렇게 씩씩하고 건강하게 지내는 모습이 새삼 뭉클하기도 해요.
경환 도초도 여행은 저도, 사라도 참 좋았는데 아이들도 그랬나 봐요. 도초도는 참 조용한 섬인데 가이드와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떠났거든요. 이런 여행은 처음이라 아이들이 적응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그 부분을 재미있어했어요. 모르는 형, 누나들과 여행지에서 친구가 되는 경험이 신났는지 집에 돌아와서 ‘형아랑 누나랑 함께 또 걸었어요’ 하면서 음을 붙여 노랠 부르더라고요. 발표한 노래와는 사뭇 다르지만 찬희가 주도적으로 흥얼거리던 목소리를 녹음해서 점점 발전해 나간 거예요. 찬희가 흥얼거린 데모 들어 보실래요? (음성 파일을 재생한다.)
아, 정말 귀여워요(웃음). 오늘 한바탕 놀고, 촬영도 마친 시점이라 어떤 표정으로 불렀을지 눈에 선해요. 7집은 원래 동요집으로 기획한 앨범이라고 들었어요.
경환 실은 7집보다 동요집을 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였어요. 3-4년 전부터 해온 생각인데, 이미 아이들이 부른 ‘우리들의 도초도’, ‘삼형제’가 발표됐고 재주소년 음악 중에서도 동요와 결이 비슷한 ‘팅커벨’, ‘소년의 고향’, ‘이분단 셋째줄’ 같은 곡이 있으니까 아이들과 다시 녹음해서 한 앨범에 묶으면 동요집으로 완성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머릿속에 일찌감치 있던 기획인데 일상을 살다 보니 자꾸 뒤로 밀리더라고요. 근데 어느 날 보니까 아이들이 훌쩍 커 있는 거예요. 그때 비로소’이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으로 빠르게 작업에 돌입했어요. 제대로 준비할 틈도 없이 녹음부터 진행했죠. 아이들이 노래를 익히기도 전이어서 헤드폰 씌우고 마이크를 켜곤 그 자리에서 가르치고 불러보자고 했어요.
앨범 전체에 오늘날 가족을 담았다는 데서 의미가 클 것 같아요. 완성하고 나니 감회가 어때요?
사라 저는 무엇보다 진정성 있는 앨범이 나왔구나 싶어요. 저희 결혼할 때 이적 오빠가 “야, 결혼하면 곡 안 나와.” 그러셨는데요(웃음). 아무래도 이제 새로운 사랑이나 경험은 할 수 없으니 사랑 곡은 쓰기 어렵다는 이야기였죠. 근데 정말이더라고요. 쥐어짜지 않으면 새로운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하기가 어려워졌어요. 그런데 이 앨범은 아이들이랑 같이 작업했고, 저희가 살아가는 현재에 대한 기록이잖아요. 정말 순수하게 우리 이야기를 쓰는 거다 보니 진정성이 많이 담기더라고요.
경환 새로운 걸 계속 만들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나니까 오히려 음악이 나온다는 걸 알게 됐어요.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새로운 걸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면 아무것도 나오질 않거든요. 아무래도 나이를 먹어갈수록 새로운 경험은 줄어들 테니까 음악 만드는 속도도 점점 더뎌질 거예요. 이를 인정하고 보니 오히려 지금에 집중해서 음악을 쓰게 되더라고요.
재주소년이 활동한 지 올해로 22년이 됐죠. ‘포크 듀오’라는 수식어로 자주 소개되곤 했는데요. 중간에 멤버 상봉 씨가 스튜디오 멤버로 활동하면서 체제에도 변화가 있었어요. 22년 전으로 돌아가서, 재주소년의 출발에 관해 들려주실래요?
경환 재주소년은 22년 전, 2003년에 1집을 발매했어요. 앨범을 준비하고 활동을 시작할 때 저는 제주도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었죠. 수학여행으로 방문한 제주도가 너무 좋아서 학교를 여기로 와야겠다 마음먹고 제주대 철학과에 입학했어요. 한창 첫 작업을 할 땐 상봉이가 일산에 살아서 메신저 MSN으로 곡을 주고받았는데, 얼마 안 있다가 상봉이도 한라대학교에 입학해서 같이 제주도에서 작업하며 지내게 되었어요. 상봉이가 좋은 음악을 만들어서 보내오면 ‘와, 이거 좋은데? 나도 좋은 곡 빨리 만들어야겠다.’면서 불붙은 듯 치열하게 좋은 곡 경쟁을 펼쳤어요(웃음). 그렇게 나온 곡들을 추려 여러 기획사에 데모를 보냈고, 그 곡들 중 한 곡으로 〈유재하음악경연대회〉에도 참가하게 됐죠. 2002년에 동상으로 입상했고, 같은 시기에 델리스파이스 김민규 형이 하던 기획사 문라이즈에서도 연락이 왔어요. 그렇게 앨범 작업에 들어가게 됐죠. 그때 민규 형이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러시더라고요. 너네 이름 한번 정해봤다고, ‘재주소년’ 어떠냐고. 제주 애들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니까 제주를 재주로 바꿔서 재주소년 하자고. 그렇게 2003년에 재주소년 1집 [재주소년(才洲少年)]이 나왔어요.
사라 저는 2005년에 재주소년에 세션으로 합류해서 연주자로 쭉 함께해 왔어요. 학과 친구가 재주소년 드럼 연주자로 합류하면서 건반이 공석인데 함께하자고 제안해 왔죠.
그 당시에 사라 씨는 재주소년이 5인조 록밴드인 줄 알았다고, 홍대에서 활동하는 뮤지션은 루시드폴밖에 모른다고 하셨다고요(웃음).
사라 (웃음) 재주소년은 제가 아예 모르는 팀이었어요. 실용음악과에 재학할 때라 해외 뮤지션을 더 많이 접하던 시기여서 더 그랬죠. 그때 재주소년을 보고 많이 놀랐어요. 학교에서 함께 음악 하는 친구들만 보다가, 실용음악과생이 아닌 이들이 곡을 쓰고 자기 앨범을 만든다는 사실이 놀라웠거든요. 스물세 살은 어린 나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미 유상봉과 박경환은 앨범도 내고, 방송도 나가고, 인터뷰도 하고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음악 색깔도 이미 확실하게 잡혀 있었고 집에서 레코딩까지 한다니까 저랑 동년배 같지가 않은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충격이었어요.
경환 저는 처음 사라를 보자마자 느낌이 왔어요. 좋아질 거라는 느낌(웃음).
사라 네? 저는 아닌데….
(웃음) 일방적인 사랑이었나 봐요.
사라 처음 봤을 땐 아니지만 그날 저도 느낌이 오긴 왔어요(웃음). 첫 합주 날 지하철역으로 웬 보노보노처럼 생긴 분이 저를 데리러 오더라고요. 인사하고 합주실에 들어갔는데, 합주 시작할 때 뿔테 안경을 쓰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래서 그런지 현실이 낯설었어’를 부르는데 호감이 확 생기더라고요.
경환 서로 호감은 있었지만 친구로 오랜 시간을 보냈어요. 연애를 시작한 건 제가 군대에 가고 중반부쯤 되었을 때였어요. 7년 정도 연애하고 결혼했죠.
재주소년과 박경환 솔로 활동에 계속 연주자로 함께하면서 사라 씨도 곡 작업을 하고 있죠. 가사가 없는 연주곡으로 발표한 곡이 많은데, 때로는 굳이 문장으로 이야기하는 것보다 연주 자체가 더 많은 감정을 전한다는 생각도 들어요.
사라 그래서 연주곡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제목이에요. 제목이 곡을 다 말해준다고 생각하거든요. 작업이 끝나고 제목을 고심해서 붙이고 나면 그제야 음악이 완성되는 기분이에요. 보통은 심사숙고해서 한글로 짓는데, 조금 부족한 느낌이 들면 영어로 부제를 달아주기도 해요. 한번은 ‘고독’이란 곡 제목을 붙였는데 그 단어만으로는 제가 원하는 바가 다 전해지지 않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영어 제목을 ‘Holding On To You’라 붙였어요. 쓸쓸하고 외로운 감정을 이야기하면서도 강인해져야만 하는 존재를 담고 싶었죠. 누군가를 붙잡고 싶어지는 연약한 모습도 드러내고 싶었고요. 제목 지을 때 이미 집중력을 많이 쓰기 때문에 가사 쓰는 건 저한테 무척 어려운 일이에요. 그래서 수월하게 가사를 짓는 뮤지션을 보면 참 신기해요.
사라 씨는 곡을 먼저 쓰고 제목을 붙인다고 했는데 경환 씨는 어때요?
경환 옛날엔 습관적으로 제목을 먼저 짓곤 했어요. 그게 쓰이든, 그렇지 않든 일단은 짓고 봤죠. 이를테면 2집 작업 중에 3집 곡 제목을 먼저 짓는 식이에요. 실제로 미리 지어둔 제목을 쓰는 경우는 손에 꼽지만 왠지 그렇게 되더라고요.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대체로 작업하면서 제목이 정해지는 편이에요. 발표하기 전에 제목을 바꾸는 경우도 있죠. 1집 ‘눈 오던 날’도 제목이 한참 동안 ‘Snow Day’였어요. 사실 ‘스노우 데이’가 문법적으로 정확히, 제가 말하고 싶은 ‘눈 오던 날’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이미 입에 붙어 있던 영어 제목을 두고 한글 제목으로 바꾸었어요.
경환 씨 음악 에세이 《소년, 잘 지내》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지극히 평범한 순간들이 노래가 된다. 초라한 순간의 기록에 멜로디를 입히는 노력을 몇 번 하다 보면 운 좋게 노래가 태어난다.”고요. 특별한 장면을 음악으로 남겨야겠다고 마음먹기보다는 사소한 데서 음악이 탄생하는 것 같아요.
경환 맞아요. 제 책의 핵심 문장이기도 한데, 그건 저한테 깨달음 같은 거였어요. 특별한 기억이 노래가 될 것 같잖아요. 근데 곰곰이 따져보니 그렇지 않더라고요. 오히려 ‘텀블러에 커피를 담아서 마시는데 생강차 맛이 났다.’ 하는 후줄근한 일상이 음악이 돼요. 탁자의 얼룩 같은 걸 보면서 노래를 짓는 식이죠.
[머물러 줄래]에 수록된 곡들은 어때요? 타이틀곡 ‘꽃, 나비’는 “아빠, 비 오는 날 나비랑 벌들은 어디로 가요?”라는 준희의 질문으로부터 시작했다고 들었어요. 아이의 특별한 질문이 씨앗이 된 것 같아서요.
경환 사실 그것도 굉장히 사소한 순간이었어요. 문장으로 적어놓으니 굵직한 사건처럼 느껴지는데 준희는 기억도 못 해요(웃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어두운 낮이었는데 준희가 밥 먹으면서 그러더라고요. “아빠, 비 오는 날 나비랑 벌들은 어디로 가요?” 충격받았어요. 지금껏 생각해 본 적이 없고, 답도 전혀 모르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이 사소한 장면이 만든 충격으로 노래를 만들 수 있겠다 싶어서 작업하기 시작했어요.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문장엔 특유의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아까 찬희랑 얘기하다가 저도 모르게 깜빡 졸았는데, 1.5초도 안 되는 시간이었거든요. 근데 찬희가 그러더라고요. “괜찮아, 내가 지켜줄게요.” 그 말에 울림이 컸는데 두 분은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듣고 지내실 것 같아요.
사라 솔희가 한번은 “엄마, 튤립 같아.” 그런 적이 있어요. ‘예뻐.’도 아니고, ‘꽃 같아.’도 아니고. ‘튤립’이라는 구체적인 꽃 이름을 말한 게 기억에 남더라고요. 저는 매일 좋은 모습만 보이는 엄마도 아니고, 늘 아이들에게 더 잘 해줘야 하는데, 하고 후회하는 엄만데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까 기분이 이상했어요. 저희 애들은 표현을 거침없이 하는 편이거든요. 어느 날은 자기 전에 “엄마, 그런데,” 하더니 “사랑해.” 그러는 거예요. 제가 어떤 상태든 애정 어린 말을 해주는데 그런 말이 참 오래 남아요.
경환 아이들이 하는 생각이나 말은 지금 이 순간에만 나오는 것들이 많아서 그때그때 메모장에 적어둬요. 이른바 삼형제 어록(웃음). 한번 열어볼까요?
이번 호 주제어가 ‘책’ 그리고 ‘문장’인데요. 아이들이랑 책도 많이 읽을 것 같은데, 특히 자주 보는 책 있어요?
사라 저도 그림책을 좋아하는 편이라 같이 읽곤 하는데, 이지은 작가님 그림책은 전부 좋아하고요. 요즘은 《푸른 사자 와니니》도 즐겨 읽고 있어요.
경환 자기 전에 저희가 책을 자주 읽어주는데, 귀 기울여서 잘 듣더라고요.
사라 찬희가 글 쓰는 걸 좋아해서 책을 읽어준 다음 날이면 책을 만든다고 글을 쓰거든요. 근데 책 읽어준 다음 날엔 어휘나 단어가 달라져요. 좀더 체계적인 줄거리가 나오고, 문장도 더 좋아지죠.
경환 이전엔 문장과 사건을 나열하는 식이었는데 지금은 조금 더 책 같아졌달까요. 맥락 없이 스토리를 적어 가는 게 아니라 줄거리 중간에 “그때였다.” 이런 문장을 넣어 반전을 주는 식이죠.
안 그래도 아까 솔희가 찬희 형이 책을 많이 쓴다고 이야기해 주더라고요. 벌써 네 권이나 썼고, 만화도 있다고요. 저한테 무턱대고 제목을 맞혀보라던데요(웃음), 네 글자라고.
사라 그걸 어떻게 맞혀(웃음). 찬희 소원은 자기 책이 도서관에 들어가는 거래요. “엄마 이거 완성해서 도서관에 등록하면 돼?” 하고 묻기도 해요. 도서관에서 자기 책이 읽혔으면 좋겠대요.
경환 이번 투어 때도 책 쓰는 노트를 가지고 와서는 매일 뭔가를 적더라고요.
사라 ‘버찌’와 ‘버쨔’라는 캐릭터를 만들어서 이야기를 전개하기도 하고요.
두 분은 어떠세요? 좋아하는 책, 유난히 오래 데리고 다니는 책이 있나요?
경환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언급하는 책이 있는데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 씨 이야기》예요. 처음 읽었을 때 인상이 정말 강렬했거든요.
어? 저도요…. 살면서 대번에 《좀머 씨 이야기》를 꼽는 사람은 처음 만나 봐요. 엄청 반가운데요(웃음).
경환 정말요? 저는 첫 장을 읽으면서 ‘어라?’ 했어요. 제가 어릴 때 하굣길에서 자주 하던 생각이 그대로 적혀 있었거든요. 하굣길이 멀고 긴 편이었는데 바람이 불면 제가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자주 느꼈어요. 그게 초등학교 1학년쯤인데, 초등학교 6학년 때 《좀머 씨 이야기》에서 그 장면을 읽게 된 거예요. ‘와,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싶었어요. 〈트루먼 쇼〉(1998)도 그랬죠. 어릴 때 망상처럼 카메라가 나를 촬영하고 있고, 사실은 이 모든 게 극이라는 생각을 1년가량 해왔는데 그게 영화가 돼서 나오더라고요.
이야기의 싹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저는 《좀머 씨 이야기》에서 피아노 연습하는 장면을 잊을 수 없어요. 코딱지(웃음).
경환 명장면이죠. 코딱지와 그 상황에 대해 엄청 자세히 묘사하잖아요.
사라 씨는 어때요?
사라 저는 이연진 작가님의 《취향 육아》를 꼽고 싶어요. 엉엉 울면서 읽었거든요. 세상엔 육아서가 참 많은데, 대부분 솔루션을 주거나 ‘이렇게 해야 한다.’고 제안하는 형태지만 《취향 육아》는 작가님의 일기장 같은 책이에요. 몹시 힘들 때 만난 책인데, 사실 읽으면서 괴리감은 많이 들었거든요. 근데 제가 나아가고 싶던 모습이 책 안에 그려져 있어서 위로를 많이 받았어요. 저는 아직 그러지 못하고 있지만, 이상적인 그림을 향해 가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데 안심했죠. 모든 엄마가 처음부터 잘할 순 없고, 완벽할 수도 없지만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꿋꿋이 자기 길을 가는 엄마가 있다는 게 좋았어요. 솔루션을 주는 육아서를 읽을 땐 절망이 앞섰는데 확실히 그것과는 다른 느낌이었어요. 다정하게 ‘괜찮아, 괜찮아.’ 하고 다독임 받는 기분. 한 권 더 이야기해 보자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예요. 육아의 힘듦을 약간 극복하고 기운을 차렸을 때 이 책을 읽으면서 달리기를 시작했어요. 무라카미 하루키는 작업하기 위한 하루 루틴을 철저하게 지키는 작가잖아요. 그런 부분을 보면서 제가 놓치고 있는 부분을 깨달았고 ‘나는 할 수 없다.’면서 포기한 부분을 가능하게 만들어 준 책이라 특히 좋았어요. 평소에 하루키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이 책을 읽은 후에 작가가 궁금해서 더 찾아보게 되기도 했고요.
책이 이야기와 문장으로 이루어졌다면 음악엔 노랫말이 있을 거예요. 지금 떠오르는 노랫말이 있나요?
경환 재주소년 ‘왠지 너는’에 이런 노랫말이 있어요. ‘왠지 너는 그 노래의 주인공처럼 편의점에서 우유를 사도 영화일 것 같은데”. 실제 있는 노래를 떠올리며 작업한 부분인데, 어느 공연에서 “이 노래의 오마주가 된 곡이 뭔지 아세요?” 하고 질문했더니 한 관객분이 바로 맞히시더라고요. 솔직히 아무도 모를 줄 알았거든요. 그 관객이 에디터님이었죠.
(웃음) 처음 ‘왠지 너는’을 들었을 때 기시감이 들었는데, 그 질문을 듣는 순간 ‘앗’ 하고 스위치가 켜졌어요. 롤러코스터의 ‘일상다반사’였죠. “슈퍼에서 우유 사고 버스정류장 앞에서 살까 말까 망설이는 나를 조용히 째려보는 붕어빵 아저씨”.
경환 맞히는 사람이 있을까 싶으면서도 곡을 쓸 때부터 염두에 둔 음악이니까 그래도 한 번 짚고 가자는 생각이었는데, 정답이 나와서 놀란 기억이 나요(웃음). ‘일상다반사’ 가사가 참 아름답잖아요. 그 노래를 들으며 외모도, 마음도 근사한 주인공을 상상하곤 했는데 ‘왠지 너는’을 만들 때 꼭 그런 모습을 떠올리며 작업했어요. 사실 이 노래 주인공은 사라예요. 같이 강아지 산책시키고 쇼핑하던 순간들을 되새기며 작업했거든요. 그래서 앨범 커버도 사라 사진이고요.
사라 저는 오소영의 ‘아른아른’을 꼽고 싶어요. 애니메이션으로 작업한 뮤직비디오도 정말 좋아요. 아이들도 좋아해서 자주 함께 보고 있어요. 이 음악은 소영 언니가 오래 키우던 고양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너고 나서 만든 곡이에요. 듣다 보면 노랫말이 하나하나 마음에 와닿아요. 반려동물이 아니더라도 헤어진 가족, 친구… 많은 존재가 생각나면서 그리워지고 애틋해지는 마음이에요.
경환 “어디로 갔을까 내 예쁜 친구야 아직 난 네가 필요한데”.
사라 “널 매일 그리워할게”.
때로는 노랫말이 없는 음악이 더 와닿을 때도 있잖아요, 사라 씨 연주곡을 들었을 때 어떤 감정이 밀려오는 것처럼요.
경환 저는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가사 있는 노래보다 연주곡을 더 많이 듣게 된 것 같은데, 어쩌면 노랫말보다 더 강하게 전하는 무언가가 연주에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이제 대세는 넘어갔다. 네가 우리 집 기둥이다. 하고 사라한테 이야기하곤 하는데요(웃음). 빈말이 아닌 게, 실제로 언젠가 해외 저작권료가 갑자기 많이 들어온 적이 있어요.
사라 아, 그건 딱 한 곡에 한정된 얘기여서 근거가 빈약해요. 저는 음악을 만들 때 ‘찬탕’, ‘뜻탕’으로 저 나름대로 기준을 두고 발표하는데 피아노로만 이루어진 음악을 찬탕, 전자 음악을 곁들인 곡을 뜻탕이라고 부르거든요’ 제가 일렉트로닉을 좋아해서 집에서 작업한 일렉트로닉 곡들을 싱글로 발표한 적이 있어요. 그중 한 곡이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를 보고 정해인 배우한테 푹 빠져서 만든 곡이었어요. 남편이 버젓이 옆에 있는데 제가 매일 다른 남자 사진을 보면서 행복해하는 게 문득 괴롭더라고요. 어느 날 ‘안 되겠다.’ 싶어서 컴퓨터를 켜서 가사를 쓰고 노래를 만들었어요. 그때 해시태그를 ‘#밥잘사주는예쁜누나 #정해인에게바치는노래 #정해인’으로 해놨더니 해외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해시태그로 퍼진 것 같아요. 실제로 정해인 배우 팬분이 “이거 정해인을 좋아하는 분이 만든 노래래요.” 하고 인터넷에 올린 글도 봤고요.
경환 그런 마음으로 만든 곡인데 그 노래 보컬을 제가 했어요(웃음).
정해인 배우가 들었을지도 모르겠는데요(웃음). 사라 씨가 일렉트로닉 장르를 좋아한다는 이야기가 새로운데, 책도 음악도 취향을 많이 타는 장르라고 생각해요. 두 분은 특히 좋아하는 책 장르가 있나요?
경환 팟캐스트 〈낭만서점〉을 진행할 때 일주일에 한 권씩 의무적으로 책을 읽고 소개해야 했는데, 정해진 도서를 읽어야 하는 구조여서 그때 제 취향에 관해 많이 느끼게 됐어요. 엄청 재미있던 주도 있고 굉장히 힘든 날도 있었죠. 소설 전문 팟캐스트여서 모든 장르가 소설이었거든요. 그래서 제 소설 취향에 대해서만큼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요. 저는 성장소설의 서사를 정말 좋아해요. 청소년 추천 도서가 대개 성장소설일 텐데, 그래서인지 저는 청소년기에 읽은 소설에서 지금도 흥미를 느껴요. 성장소설 중에서도 의외의 매력을 발견한 게 《모모》였는데요. 〈내 이름은 김삼순〉에 나와서 한때 유행한 적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손이 잘 안 가더라고요. 왠지 어린 학생들이 읽을 것 같은 이미지도 있었고요. 그러다 유행이 한풀 꺾였을 때 읽지 않고 책장에만 꽂아두던 걸 펼치게 됐는데요. 정말 아름답더라고요. 제가 단단히 오해했다는 걸 깨달으면서 역시 성장소설을 좋아한다는 걸 다시 실감했어요.
사라 저는 좀 달라요. 장르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무해한 계열을 찾아가게 돼요. 《취향 육아》도 그런 의미에서 좋았던 거고요. 잔인한 거, 무서운 것도 싫고… 어떻게 보면 자연으로 돌아가는 느낌의 책들이요. 최근에 읽은 책 중엔 오하나 작가님의 《계절은 노래하듯이》가 마음에 평화를 주었어요. 제주에서 귤나무 키우면서 남긴 일기장 같은 산문집인데, 자연을 관찰하면서 느낀 감정을 문장으로 읽는 게 참 좋았죠. 살아가면서 겪는 여러 일을 통해 근본을 알게 하는 이야기, 그런 책들을 좋아해요. 자극이 없고 순한 책들. 《계절은 노래하듯이》에서 좋았던 구절을 읊어 볼게요.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모질어지지 않고, 자기에게 총을 겨누는 상대에게 그러지 마요. 우리 화해해요. 하고 자신의 가장 연약하고 보드라운 속살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면서 웃음 짓는 것.”
직접 쓰신 책 이야기를 해볼게요. 경환 씨는 에세이 《소년, 잘 지내》 프롤로그에 출판사와 미팅할 때 “확신이 있던 시기였다.”는 이야기를 적어주셨죠. 그 ‘확신’에 관해 들어보고 싶어요.
경환 책 제안을 받았을 땐 얼마든지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재주소년 음악과 연관된 에피소드를 기반으로 음악극을 무대에 올린 적이 있는데, 그때 제안받은 거였고 음악극 평이 굉장히 좋았거든요. 이적 형이 계속하라고, 계속 안 할 거면 판권 자기 달라고 했을 정도로(웃음). 음악극 대본을 쓸 때 얼마든지 더 긴 대본을 쓸 수 있었기 때문에 그걸 다 풀어서 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계약을 하고 단번에 쓰지 않으니 시간이 흘러가고, 타이밍을 놓친 것 같다 싶을 즈음엔 기억이 가물가물해져서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하지만 어쨌든 제가 만든 노래를 바탕으로 글감을 만드는 거니까 속도는 더뎠지만 쓸 수 있었어요. 점점 확신은 옅어졌지만요(웃음).
그래서 “‘이런 감성 에세이 너무 흔하지 않나? 안 그래도 세상엔 책이 많은데 내가 뭘 더 보태나’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다.”라는 생각을 하신 거군요. 말씀하신 ‘감성 에세이’에 관해서도 들어보고 싶어요.
경환 책을 쓸 때 답사처럼 서점에 가서 어떤 책이 나왔나, 어떤 책이 인기 있나 살펴보는 일이 많았는데요. 방금 책 취향 이야기도 나누었는데, 저는 감성적인 에세이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요. 김소연 시인의 《마음 사전》 같은 책은 좋아하지만, 에세이를 굳이 찾아 읽는 편은 아닌데 제가 즐겨 읽지 않는 책이 되는 게 의미가 있나 싶던 거죠. 근데요.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런 생각을 한 것 자체가 제가 너무 큰 꿈을 꿨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저 꿈 많던 소년이었다는 게 이제 와서 다 밝혀지고 있어요(웃음). 책에서도, 음악에서도요. 점점 나이가 들면서 그걸 받아들이면서 사는 게 인생이라는 걸 느껴요. 어릴수록 잘 모르니까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근데 시간이 흐를수록 각자 자기 자리에서 한 땀, 한 땀, 사람들이 열심히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돼요. 제가 써야 하는 책이 감성적인 에세이든 성장소설이든 제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걸 열심히 하면 되는 건데, 꿈만 크니 ‘이거 가지고 되겠어?’ 하고 생각한 거죠. 그건 책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누구에게나 반드시 큰 꿈만이 좋은 게 아니란 걸 알아가는 시간이 찾아오는 것 같아요. 그런데 나쁘다고만 볼 수 없는 게, 큰 꿈을 꾸면서 성공한 사람과 비교하는 건 어떤 의미에선 순수하다는 뜻 같기도 해요.
어떤 의미에서요?
경환 아이들이랑 LP를 자주 듣는데, 서태지와 아이들, 혜은이, 마이 앤트 메리 등 다양하게 듣거든요. 그럼 애들이 물어봐요. “서태지가 유명해, 재주소년이 유명해?”(웃음). 저도 그런 느낌으로 순수했던 거죠. 순수함은 지키되 작업에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게 지금은 올바른 방법이라고 봐요. 그런 단순한 깨달음을 얻기까지 굉장히 오래 걸렸어요. 저는 이 깨달음이 아주 어른스러운 깨달음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요즘은 그런 자세로 하루하루 임하려고 노력 중이에요.
《소년, 잘 지내》엔 제목이 ‘이사라’인 글도 있잖아요. 사라 씨는 책을 처음 보고 어떠셨어요?
사라 제 이야기 아닌 것도 있던데요. 제가 모르는 연애 얘기도 많아서 “이건 누구야?” 하고 물어보고 그랬어요(웃음). 저는 20대에 만난 남자가 경환 씨밖에 없거든요. 그런데 경환 씨는 수많은 여성을 만나고 나를 선택했구나 싶더라고요.
경환 ‘수많은’이라니, 많지 않아. 글로 풀어놓으니까 많아 보이는 거야.
사라 그런가(웃음). 저는 여중. 여고. 여대를 나와서 연애 감정을 크게 경험할 수 없었는데 경환 씨 책을 보면서 간접적으로 많은 걸 느꼈어요. 남녀 공학의 로맨스를 간접 경험한 기분이랄까요. 그러면서 재주소년 음악에 대한 정의도 하게 됐는데,
잠깐만요. 왠지 명언이 나올 것 같아요. (숨을 고르고) 들려주실래요?
사라 재주소년의 음악은 좋아하는 같은 반 남학생의 일기장 같은 음악이다. 실제로 음악이 완성되면 ‘이 곡은 누구에 관한 곡일까.’ 하고 생각한 적도 많고, 연애하기 전에 싸이월드에 경환 씨가 글 하나 올리면 ‘내 얘기일까?’ 하고 추리도 자주 했어요. 재주소년 음악은 곱씹으며 근원을 찾아가게 하는 힘이 있어요. 책도, 음악도 그 배경이 경환 씨한테 있으니까 더 많이 상상하게 되는 것도 같고요.
맞아요. 재주소년 앨범을 1집부터 쭉 따라 듣다 보면 ‘이분단 셋째줄’ 소녀를 바라보던 소년이 대학생이 되고, 어른으로 성장해서 결혼한 것 같은 서사가 그려지기도 해요. 경환 씨는 책을 쓰기도 했고, 책으로 팟캐스트도 진행했고, 사적인 독서도 이어가고 있을 텐데요. 나한테 가장 잘 맞는 독서 활동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경환 북토크요.
네?
경환 제 책이 나오기 전에도 북토크 사회자를 많이 한 편이에요. 그러면서 배운 게 참 많아요. 작가님들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참 재밌더라고요. 책을 미리 읽고 궁금한 걸 질문하는 데서 희열을 느꼈어요. 북토크도 나름대로 구성과 규칙이 정해져 있는데 제가 그 격식을 깨고 진짜 궁금한 걸 물으니 작가님들도 신선하셨나 봐요. 그런 의미에서 작가님들께 좋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칭찬까지 받으니까 자꾸 하고 싶어져서 적성에 잘 맞는단 생각이 들었어요. 제 책이 나온 뒤엔 전국을 돌면서 북토크 겸 공연을 했는데요. 책 이야기를 하다가 관련된 곡을 기타로 연주하며 부르기도 하고 거기서 파생된 이야기도 나누고…. 제가 해온 것들이 연결되니까 무대가 즐겁더라고요. 북토크는 진행할 때나 직접 할 때나 순수하게 재미있어요. 그래서 제 책으로 전국 순회공연을 하고, 순전히 제가 재미있어서 한 번 또 돌았죠(웃음). 책이 나온 지 벌써 2년이나 지나서 계속하기가 민망해서 그렇지, 또 하라면 또 하고 싶어요. 북토크가 너무 좋아서 두 번째 책을 상상하며 제목도 미리 정해놨어요. ‘북토크를 위하여’. 근데, 책 제목으로 삼기엔 좀 그렇죠(웃음)?
사라 에? 그게 뭐야, ‘북토크란 무엇인가’가 낫겠다.
‘나는 북토크로소이다’….
사라 그게 제일 좋은데요. (일동 웃음)
의외의 답변이었어요. 사실 혼자서 자유롭게 하는 독서가 제일 좋다는 대답이 나올 거라고 짐작했거든요.
경환 이렇게 이야기하니 마치 엄청나게 다독하는 사람 같아서 민망한데 사실 책 읽는 양은 북토크에 오시는 관객들이 훨씬 많을 거예요. 근데 저는 책에 관해 이야기하는 게 좋아요. 작가에게 궁금한 걸 묻고, 또 듣고, 그 밖의 이야기를 나누는 게 저한텐 큰 기쁨이에요. 책으로 가장 큰 희열을 느낄 방법이 북토크라는 점에서 꼭 북토크를 꼽고 싶었어요.
사라 씨 SNS에서도 북토크에 관련된 기록을 보았어요. 앞서 이야기해 주신 《취향 육아》 북토크였죠. ‘정말 이 책에 영향을 많이 받았구나.’를 느낄 수 있는 후기였어요.
사라 살면서 처음으로 예매해서 가본 북토크였어요. 인생 책이라고 꼽을 만한 도서라 작가님이 어떤 분일지 궁금했고, 작가님이 북토크 현장에서 아이와 같이 읽었던 그림책을 소개해 주시겠다고 하셔서 콘텐츠가 궁금하기도 했어요. 북토크 현장에 가보니 와인과 치즈를 준비하셨더라고요. 관객 대부분이 엄마일 테니 잠깐이라도 쉼을 누리라는 의미였는데 그런 다정함이 너무 좋았어요. 책 속에서 느낀 다정함을 현장에서 또 마주한 느낌이었죠. 제가 위로받은 마음을 꼭 전하고 싶어서 보답하는 마음으로 제 앨범을 선물하면서 몇 마디 대화를 나눴는데, 엉엉 울었어요. 직접 목소리로 책 이야기를 들으니 문장 하나하나가 더 진심으로 다가오더라고요.
경환 아이디어 좋다, 나도 북토크 할 때 와인이랑 치즈를 준비해 봐야겠어.
(웃음) 지금 온 신경이 북토크에 집중돼 있군요. 오늘 만나자마자 제주 뙤약볕에서 뛰어다니면서 네 시간 이상 촬영했잖아요. 이 모든 기록이 책으로 엮일 텐데 어떠세요?
사라 정말 너무, 너무 기대돼요. 사실 삼형제를 키울 때는 치열해지지 않으면 안 되는 부분도 있어서 조금 걱정했어요. 매거진으로 접한 가족들 모습은 다 여유롭고 우아해 보여서… 우리 가족만 치열하고 지쳐 보이는 건 아닐까 고민했는데요. 그런 모습이 적나라하게 담길까 봐 지금도 조심스럽긴 해요(웃음).
저는 반대로 삼형제를 키우는데도 어떻게 이렇게 평화롭고 화기애애하지 하고 감탄했는걸요. 같이 실컷 뛰어놀아서 즐거웠어요. 더없이 행복한, 여행 같은 노동!
사라 그럼 정말 다행이에요. 정신없으실까 봐 많이 염려했거든요. 저도 오늘 기억이 오래 남을 것 같아요. 제주에서 만나서 더욱 좋았어요.
경환 맞아요. 투어 기간이 겹쳐서 인터뷰를 못 할까 봐 아쉬웠는데, 제주까지 와주신 덕분에 더 즐거운 여행이 되었어요. 이 여행의 기록이 어떻게 담길지 기대돼요. 아이들이 사진 찍을 때 장난을 너무 많이 쳐서 흑역사 사진이 나오는 건 아닌지 긴장되네요(웃음).
사라 이상한 포즈로 찍힌 사진들 실리면, 분명히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할 텐데(웃음)….
삼형제 이모! 사진 보여주세요!
이주연(산책방)
포토그래퍼 Hae 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