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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많은 K씨의 일상
1,000권의 책 중 100권만 남기고 버렸다. 그중 1권을 도둑맞아 99권이 됐다. 하지만 절망도 잠시, 그날의 혼잣말이 씨앗이 되어 1권의 책이 채워졌다. 괜찮은 척했더니 진짜 괜찮아진 어느 책 수집가의 구구절절한 호소문.
좋아하는 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당장에 100권도 넘는 책을 읊을 수 있다. 작품 추천을 좋아하는 독자들을 위해 목록을 말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일상의 소소한 사건에서 감동을 찾는 윤성희 소설가의 《감기》, 편혜영 소설가의 서스펜스가 빛나는 《사육장 쪽으로》, 단호하고 묵직한 서술어가 치명적인 김훈 소설가의 《현의 노래》를 좋아한다. 시를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친구에게 선물하는 진은영 시인의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탁월하고 적확한 단어 사용이 감탄스러운 신형철 평론가의 《느낌의 공동체》도 최애 중 하나다. 허세 없는 중년의 유머가 돋보이는 이지원 교수의 《명치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추석이란 무엇인가?’ 신드롬을 일으켰던 김영민 교수의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필독서, 김정선 작가의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도 빼놓을 수 없다. 사노 요코 할머니의 염세적이지만 귀여운 관찰력이 사랑스러운 《사는 게 뭐라고》,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여행 작가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 고양이 죽이는 블랙 코미디 《네코토피아》와 죽은 고양이가 나오는 동화 《춤추는 고양이 차짱》, 뭐 기타 등등. 그렇게 야금야금 모은 책이 1,000권을 넘겼다. 구독 경제 시대에도 나는 기어코 종이책을 구입해 읽는 편이다. 누군가 나의 집을 방문했을 때 지성인처럼 보이고 싶기 때문이다. 12칸짜리 대형 책장 두 개는 이미 터져버린 지 오래고, 미처 담지 못한 책을 책장 바깥에 쌓아놓다 보니, 정리도 안 하고 사는 아저씨가 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법정 스님의 《무소유》라는 책을 읽고 난 후 책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일주일 동안 고르고 골라 1,000권의 책 중 100권만 남기고 모두 버렸다. 그 와중에도 《무소유》만 소유하는 게 너무 아이러니한 거 같아 그 책도 함께 버렸다. 이런 걸 자업자득이라 하던가?
여하튼 텅 빈 책장을 보며 마음이 허전해졌다가도, 한편으론 밀린 숙제를 마친 것 같아 뿌듯해졌다. 토너먼트에서 살아남은 책을 다시 꽂아 넣으며 정말로 애정하는 작품만 따로 떼어 한 칸에 모아두었다. 그중에는 유디트 헤르만 작가의 책이 두 권이나 들어 있다. 원래는 세 권이었는데, 한 권은 전목수(AROUND 에디터 출신의 목수)가 가져갔다.
자취방에 친구들을 모아 잔치를 벌이던 시절의 일이었다. 잔잔한 조명을 틀어놓고 치즈와 과일, 아몬드 같은 걸 씹으며 술을 마셨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쯤, 감성이 폭발해 허수경 시인의 《혼자 가는 먼 집》을 꺼내어 낭독했다. 갑자기 왜 폼을 잡느냐는 친구들도 “그러나··· 킥킥 당신.”이라는 마지막 구절을 읽을 땐 울음을 터뜨렸다. 물론 나도 같이 울었다. 눈물을 닦고 코를 세게 푼 다음 우리는 다시 술을 마셨고, 내친김에 친구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소설을 소개했다. 유디트 헤르만의 《알리스》였다. 주인공 알리스가 인생에서 소중했던 사람들의 죽음을 겪으며, 그 상실의 아픔을 치유해 가는 심리적 여정을 그려내는 작품이었다. 특히 일상에서 감지하는 서늘한 순간, 즉 ‘유령의 시간’을 섬세하게 포착해, 글을 쓰는 데 많은 영감을 줬다. 소개를 듣던 전목수가 말했다. “형, 이거 나 줘.” 순간 그의 안광이 기이하게 빛났고, 나는 잔뜩 경계하며 책을 빼앗았다.
자정이 넘은 시간, 술에 잔뜩 취한 친구들이 하나둘 옷을 챙겨 입었다. 친구들을 배웅하는데 유독 전목수의 배가 각진 형태로 튀어나와 있었다. 아몬드를 먹었다고 저렇게 될 일인가 싶어 주먹으로 명치를 쳤다. “Book!” 하고 둔탁한 소리가 나며, 전목수 배에서 《알리스》가 튀어나왔다. 사태를 파악할 새도 없이 그는 “빌려 갈게!” 소리치며 대문을 박차고 나갔다. 결론적으로 그 일이 있은 지 6년이 지났지만 책은 돌아오지 않았고, 《알리스》는 절판됐다. 정작 내가 아까운 건 책에 그은 밑줄이었다. 나는 빛나는 문장을 발견하면 연두색 밑줄을 긋고, 메모하고, 글쓰기가 막힐 때마다 밑줄 그은 문장을 읽으며 돌파구를 찾곤 했다. 내게 《알리스》가 없다는 말은 곧 유디트 헤르만의 문장을 잃었다는 의미였다.
생각해 보면 책을 도둑맞은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친구들을 초대할 때마다 이가 빠진 듯 책장이 비어 있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책을 이렇게 좋아했단 말이야?’ 하는 생각과 ‘완전 절도의 왕국이네, 다들 콩밥 좀 먹어야 정신 차리지.’라는 생각을 동시에 했다. 언젠가 우리나라 성인의 연간 평균 독서량이 3.9권이라는 통계를 본 적이 있다. 한 달에 책 한 권도 읽지 않는 사람들이 훔치긴 왜 이리 많이 훔칠까? 참 이상한 일이었다. 내친김에 찾아보니 2024년에 출간된 신간 도서가 6만 4,306종이란다. 하루 평균 176권의 신간이 나온 셈이었다. 그런데 책이 이렇게 많이 나오는 게 과연 좋은 일일까? 책을 1,000권(1쇄) 인쇄한다고 했을 때 애지중지 키운 나무 15그루가 잘려나가고, 62.5톤의 물이 사용되며, 중형 세단이 3,000킬로미터를 주행할 때와 같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고 한다. 어디 그것뿐인가? 한 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 편집자는 스트레스를 받아 탈모가 오고, 야근을 할 때마다 엽떡을 먹어 위장 장애가 온다. 엽떡 배달에 늦지 않기 위해 속도를 올리는 배달원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탄화수소와 일산화탄소를 배출하며 지구의 평균 온도를 야금야금 올리는 중이다. 그렇게 북극의 얼음이 녹고, 북극곰은 살 터전을 찾아 점점 남하하게 되며, 마을을 습격한 북극곰은 사람을 찢을 것이다. 책 한 권이 이토록 위험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얼마 전, 지구에 아주 몹쓸 짓을 하고 말았다.
책을 출간했다. 《괜찮은 척하면 진짜 괜찮아져》라는 에세이다. 평균 이하의 청춘이 일상의 무수한 실패 앞에서 괜찮은 척 활로를 개척하는 위로형 블랙 코미디 장르. 지금 이 책은 출간된 후 온·오프라인에서 절찬리에 판매되며 월간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면 좋겠지만 실상은 하루에 쏟아지는 176권의 책 중 하나에 불과하다. 책을 내고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이거다. “괜찮은 척하면 진짜 괜찮아져?” 그럼 나는 확신에 차서 대답한다. “무조건 괜찮아져.” 전목수가 《알리스》를 훔쳐 간 그날 밤, 나는 그에게 화를 내는 대신 혼잣말로 계속 말했다. “그래,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잖아. 괜찮아, 다 괜찮아.” 누추한 자취방에 누워 조금 울기는 했지만 그래도 조금 괜찮아진 기분이었다. 책을 훔쳐 가는 사람은 그 책이 정말 필요한 사람이고, 책을 잃은 사람은 그 빈자리에 새로운 이야기를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의 마음이 씨앗이 되어 책이 된 지금, 나는 조금 더 깊게 ‘말의 힘’을 실감한다. 지구에 나쁜 일을 했지만, 기왕에 더 욕심을 내어 이런 상상을 해본다. 술에 취한 누군가가 나의 책을 읽어주는 상상, 내 책을 옷 속에 숨겨 가다 걸려서 명치를 맞는 상상, 영영 돌려주고 싶지 않은 책의 저자가 되는 상상. 그러나 현실은 냉정하고, 나의 책은 훗날 창고를 비우기 위해 전량 소각될 운명일지 모른다. 소각하는 데 발생하는 유해한 연기 때문에 당신은 암이나 탈모에 걸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머리숱이 걱정된다면 부디 한 권만 사줬으면 좋겠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정말 재미있는 그 책의 제목은 《괜찮은 척하면 진짜 괜찮아져》이다.
글·사진 김건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