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와 곁 하는 시간

다실 이이엄

작은 주전자를 손에 쥐고 엉성하게 기울여 찻물을 따른다. 자그마한 잔 바깥으로 속절없이 흐르는 찻물…. 주전자를 쥔 두 손은 달달달 소리까지 내며 떨리는데, 이 불안한 장면조차 편안하게 느껴진다. 더 잘하고 싶다는 욕심은 생기지 않았고 못한다고 부끄럽지도 않았다. 다음번엔 좀더 편해지겠지 싶어 가만히 다음을 기대하는 마음이다.

인왕산의

넉넉함이 깃든

낯설지만 정감 있는 골목길, 정제되지 않은 너그러운 풍경, 오며 가며 만나는 늙수그레한 주민, 괜히 미소가 새어 나오는 구불구불한 길목…. ‘서촌’이라는 단어에 머릿속에 따뜻한 장면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대단히 환상적이지는 않지만, 그래서 마음이 기우는 일상의 풍경. 어쩐지 산책이라는 단어와 잘 어울리는 동네다. 오늘, 이른 아침부터 집에서 가깝지도 않은 서촌의 옥인동으로 나선 이유는 하나였다. 이이엄而已广이라는 다실茶室을 찾기 위해서.

정수기를 곁에 두고 살면서도 집에서는 평생 보리차만 끓여 마셨다. 카페에 가서는 종종 달콤한 밀크티를 주문하지만 차에 관해서는, 특히 잎차에는 문외한이다. 그래서 이이엄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주전자를 집는 손가락 모양이며 잔을 드는 손, 숨소리까지 정돈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짐작했다.

물론 섣부른 오해였다. 이이엄은 촘촘한 예술인 다도茶道와 평범한 일상 사이에 균열을 내고, 그 틈새에 다실을 세워 차와 곁 하는 시간을 내어주는 작은 방이다. 서촌, 옥인동을 닮아 있어 넉넉하고 푸근한 방. 새하얀 건물 앞에 도착해선 긴장감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던 어깨를 가볍게 풀어본다. 차를 만나기 위해서는 어쩐지 그러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옥류동은 인왕산에서 가장 빼어난 경치를 지닌 곳 중 하나다. 등 뒤로는 푸른 절벽의 늙은 소나무가 멀리 바라보이고, 앞쪽으로는 도성의 즐비한 집들이 빼곡하게 내려다보인다. 그 가운데로 맑은 시냇물이 흘러가는데, 꼬리는 큰 시내에 서려 있고, 머리는 산골짜기에 닿아 있다. 졸졸졸 맑게 흐르는 물소리가 옥구슬이 울리고 거문고와 축을 울리는 듯하다. 비가 내리면 물이 내달리고 폭포가 만들어져 굽이굽이 흘러가며 장관을 이룬다. 그 흐르는 물에서 아회雅會를 연다.”

– 장혼張混, <평생지平生志>, 《이이엄집而已广集》 중에서

느리게 흐르는 시간과

자기만의 방

1층에서 주인장과 눈인사를 하고 2층에 오르니 동백꽃이 하얀 화병에 가만히 꽂혀 있다. 여음이 많은 음악이 느릿하게 흐르고, 작은 괘종시계의 시계추 소리가 여름 이불처럼 가볍고 푸근하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대도 침착하게 불씨를 비벼 끌 수 있을 것만 같은 마음으로 차분히 의자를 꺼내 앉는다. 조용히 올라 메뉴판을 내어준 주인장은 ‘여름이 오면 마실 수 있는 차’라고 냉차를 설명하며 하얀 조약돌로 서늘한 이름들을 가린다. 지금은 마실 수 없다는 뜻이다. 이이엄의 메뉴는 중국차, 대만차, 한국차로 구성되어 있는데, 메뉴는 종종 바뀌기 때문에 오늘 마신 차를 내일은 마실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이엄은 좋은 차를 구하기 위해 찻잎 앞에 늘 신중하다. 섬세하게 품평하면서 메뉴를 구성한다. 대부분 녹차와 홍차 사이의 중간 발효도를 가진 ‘청차’ 종류다. 녹차처럼 몸을 차게 하지 않으면서 홍차나 보이차처럼 너무 무겁지도 않은 종류다. 이이엄에 처음 방문하는 손님이라도 향을 음미하기 좋고, 몸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기운을 차분하게 내려주는 차들. 차의 특징과 더불어 그날의 날씨, 마시는 사람의 컨디션과 취향 등을 곰곰 생각해서 메뉴를 고르면(잘 모를 때는 주인장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 정중하고 신중하게 함께 차를 골라주신다) 주인장은 천천히 부엌으로 사라진다.

찻잎의 한 방울이

마음에 번지기까지

차를 기다리는 시간은 조금도 지루하지 않다. 훑어보고 살펴볼 것들이 구석구석에 한가득이다. 이이엄의 아름다움은 셔터음으로 기록하기보다는 마음 가득 품어가는 것이 어울린다. 차분한 공기가 발걸음을 한껏 사뿐하게 만들고, 안정적인 기운에 마음을 슬몃 놓는다. 잔잔해진 마음으로 책장을 훑고, 가구를 만지고, 김이 올라오는 주전자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주인장이 가만하게 올라서는 기척이 느껴진다. 차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는 나에게 잎차 우리는 방법을 설명하는 그녀. 아주 자그마한 주전자(다관이라고 한다)에 찻잎을 담고 물을 쪼르륵 부으면서 이 과정은 ‘세차’라고 설명한다. 마른 찻잎을 한 번 깨워주는 과정으로,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불순물을 제거하는 과정이라고. 우려낸 찻물은 퇴수기에 따라 버린다. 첫 잔은 그렇게 비워지는 것이다.

느리게 흐르는 선율과 시계 소리, 그리고 찻물 소리의 소박함이 어우러져 이이엄의 공기가 한층 짙어진다. 찻물이 떨어지는 소릴 듣고 있으면 가본 적 없는 아주 먼 옛날, 인왕산 자락 어딘가에 다녀온 것만 같다. 자연을 닮은 맑고 깨끗한 소리다. 주인장의 손길을 흉내 내 우려내본 나의 첫 잎차는 중국의 무이암차다. 그중에서도 ‘수선’이라는 차다. 꽃향기와 과일의 풍미가 풍성하다는 주인장의 설명처럼, 마시자마자 자그맣게 “자두 같아.” 한마디가 제일 먼저 흘러나온다.

손님이 머문 자리를

온기라고 부르는 마음

주명희 주인장

두 시간 정도 이이엄에 머물렀는데, 어쩐지 다른 세상에 온 것만 같아요.

다른 세상에도 이이엄은 있었어요(웃음). 조선시대 일이죠. 장혼張混이라는 분이 인왕산 수성동 계곡 근처에서 이이엄而已广이라는 집을 짓고 지냈는데, 여기가 바로 그 부근 어딘가예요. 출판업자였던 장혼의 호가 이이엄이었고, 호와 같은 이름을 붙인 집이었죠.

 

장혼의 이이엄도 차와 연관 있는 장소였나요?

옛 문헌을 살펴보면, 옥류동 -아, 옛날에는 옥인동을 옥류동으로 불렀대요- 은 양반들이 사는 부자 동네는 아니지만 풍광이 아름다운 동네였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장혼은 경치가 좋은 옥류동에 이이엄을 짓고 친구들과 모여서 아회雅會를 열었다고 해요. 조선시대 그림들을 통해 아회의 귀퉁이에는 늘 차를 달이는 다동이 있었다는 것과 예부터 예술에는 차가 함께했다는 걸 알게 됐죠. 장혼의 이이엄에서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래서 저도 본격적으로 예절을 갖춘 차 문화보다는 일상에 곁들이는 차 생활을 생각하면서 손님들께 자기만의 방을 만들어드리고 싶었어요. 

 

이름만 같이 하는 게 아니라 위치도 함께하고 있는 거네요.

맞아요. 장혼의 이이엄을 동경했기 때문에 꼭 옥인동에 자리 잡고 싶었어요. 부동산에 1년 정도 들락거리면서 옥인동 자리만 찾았는데, 부동산 분들은 그런 저를 이해하지 못하더라고요. 코앞 누하동에 좋은 자리가 있는데도 마다하는 게 고집스러워 보였나 봐요(웃음). 이 건물은 오래전부터 마음에 품고 있었는데요. 본격적으로 자리를 찾기 시작한 지 1년이 다 되도록 좋은 장소를 만나지 못하다가, 우연히 이 건물이 나왔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어요. 바로 그날 계약하고 공간을 꾸리기 시작했죠. 적산가옥이라고 들었는데, 아주 한옥스럽지도 않고 너무 현대적이지도 않으면서 따뜻하고 낡은 느낌이 특히 마음에 들었어요.

 

차의 따뜻하고 침착한 기운과 잘 어울리는 공간이란 생각이 들어요. 언제부터 차 문화와 함께하게 되었나요?

대학생 때였어요. 대학 동기의 어머니가 다도에 심취한 분이셨는데, 친구가 종종 어머니의 다기를 학교에 가져오곤 했거든요. 함께 차를 우려 마시다가 그 매력에 푹 빠져서 대학원에서 다도학까지 전공하게 되었어요. 원래는 다른 전공을 생각 중이었는데 차가 제 진로를 바꾼 셈이죠. 다도학을 배우면서는 새로운 생활을 보게 되었어요. 배움도 그렇지만 공부하러 모인 사람들이 평범하지 않았거든요. 그분들과 소통하면서 세계가 크게 확장되었어요. 차뿐만 아니라 기물, 그리고 차를 대하는 생각까지도요. 

 

다도학과를 졸업하고 바로 이이엄을 시작하셨나요?

아뇨. 졸업하고 나서 10년 정도 계속 차를 알아갔어요. 중국에서 차 품평사를 공부하기도 하고, 일본에서 차 문화를 접하다가 기물과 작가에게 빠지기도 했죠. 이이엄에 있는 다기들은 그때 넓어진 생각들로 직접 디자인해서 만드는 것들이에요. 너무 화려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느낌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이 수많은 기물이 전부 작가들의 작품이라니… 놀라워요.

차 모임에서 만나 어느덧 10년지기 친구가 된 작가의 작품이 많아요. 그림과 도자 전공을 한 친구인데, 이이엄의 다기 세트는 대부분 그 친구와 함께 디자인하면서 만들고 있어요. 차를 처음 접하시는 분들이 어색하지 않도록 소박하고 따뜻한 색감을 가진 작은 다기를 만들고 싶었어요. 거창하고 무거운 다도 세트가 아니라 생활하면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작고 소박한 크기로요.

자그마한 다기 세트가 공간과 잘 어우러지는 이유가 있었군요. 곳곳에 배치된 가구들도 오롯한 이이엄의 것들 같아요.

가구들도 오래전부터 이이엄을 생각하면서 디자인한 거예요. 작가들과 논의해서 하나씩 만들어나갔어요. 이이엄이 생기면 서 만든 가구나 다기들도 있지만, 대부분 제가 작업실에서 10여 년 이상 사용하던 것들을 가져다 두었어요. 전부 작가들의 작품인 데다가 시간이 쌓여서 더 이이엄스럽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작은 기물부터 공간을 메운 공기까지 참 고요하고 침착해요. 마음이 정돈되는 기분이랄까요.

그런 기운 때문에 처음 이이엄을 열었을 때는 힘든 점도 있었어요. 카페라고 하면 대체로 즐겁고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떠올리거든요. 이이엄이 예술로서의 다도보다는 일상에서의 차 생활과 가까운 건 사실이지만, 활기찬 일반 카페에 비하면 차분하고 조용해요. 이런 고요함은 번잡한 서울에서 조용히 차를 마시길 바란, 주인장의 마음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분위기죠. 사색하기 좋고, 생각이나 내면을 정돈하면서 휴식하는 공간이길 바라며 운영하고 있거든요. 다소 침착한 분위기 때문에 공간이 오해받는 경우도 있었고 ‘이이엄에는 고약한 주인장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 일도 있었지만, 작은 테이블 위에 손님만을 위한 방을 꾸준히 만들어드리니 이이엄과 저를 이해하는 분들이 더 많아지더라고요.

 

시간의 힘이자 이이엄의 진심이 가닿은 게 아닐까 싶어요. 일반적인 카페를 상상한 사람들이라면,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차분한 분위기가 낯설 수 있을 것 같아요.

지나가다 방문하신 손님들은 아마 머그잔에 차를 내주는 카페로 많이들 생각하셨을 거예요. 서양 차를 생각하셨을 수도 있고요. 대부분 알아보고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들이지만, 동양의 잎차로 구성된 메뉴와 직접 우려먹는 풍경에 당황하는 손님도 더러 계시는데요. 그런 손님들이 이내 마음에 평안을 되찾고 다시 방문해주실 때마다 ‘아, 보내지 않은 편지가 도착했구나.’ 싶은 마음이 들어요. 손님들에게 항상 주의를 기울이고 관심을 가지는 편이어서 다시 오신 분들도 기억하고 있거든요. 

 

주인장의 세심함을 느낀 사람이라면 분명히 다시 오고 싶어질 것 같아요.

저는 손님 한 분 한 분께 애정이 커요. 저도 좋아하는 공간을 찾아가 본 경험이 있으니까 그 마음을 어느 정도 헤아릴 수 있죠. 하지만 제가 대단히 다정하고 친근한 주인장은 아니어서 고집스러운 면이 없지 않은데요(웃음). 1년 정도 이 공간을 운영하면서 사회성의 과정을 겪은 것 같아요. 자주 오시는 분들도 처음에는 조심스러웠는데, 1년 정도 지나니 이이엄의 분위기가 편해졌다고 하세요. 조금은 고집스럽던 주인장이 조금씩 부드러워지면서 이이엄의 분위기도 그렇게 된 게 아닐까 싶어요. 저는 손님을 대할 때마다 일기일회一期一會라는 생각을 되새기곤 하는데요. 우리에게 이 모든 시간은 단 한 번뿐이잖아요. 이이엄에 오신 손님들에게도 지금 이 시간이 단 한 번뿐이라는 생각으로 정성을 다하고 있어요. 평생에 단 한 번뿐인 인연에 최선을 다하고 싶거든요.

 

인스타그램에서 새로운 모습의 이이엄을 엿보기도 했어요. ‘이이엄 다회’라는 행사였어요.

평소의 다실일 때는 손님들께 자기만의 방에서 차를 직접 우리며 차 생활을 간편하게 즐길 수 있도록 해드린다면, 다회茶會는 진지한 태도를 갖추고 차를 대하는 시간이에요. 계절마다 진행하는 다회는 미리 신청을 받아서 손님 다섯 분만 초청하여 함께하고 있어요. 다회가 진행되는 시기에는 다기와 가구를 전부 치우고, 하얀 천을 드리워서 공간의 표정을 완전히 바꾸어요. 온전히 다회를 위한 공간으로 이이엄을 새롭게 만드는 거죠. 다회 때는 숨소리만 들릴 정도로 고요하고 진지한데요. 단순히 차를 마시기만 하는 게 아니라, 기물을 감상하고 다회가 이루어지는 동안의 모든 것을 음미하는 시간이에요.

 

이이엄 구석구석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만날 수 있었어요. 이 책에 특별한 의미를 두고 있나요?

이이엄과 저에게 아주 뜻깊은 책이에요. 이이엄에서 1인 1차를 기본으로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손님 한 분 한 분이 직접 자신의 차를 우려 마시면서 이이엄에서 ‘자기만의 방’을 가지기를 바랐거든요. 작은 테이블 위에 손님만을 위한 작은 방을 만들어드리는 거죠. 그 방에서 차와 곁 하며 책을 읽어도 좋고, 대화를 나눠도 좋고, 그림을 그려도 좋고, 온전히 차만 마셔도 좋은… 그런 방이기를 바라면서 이이엄을 꾸려나가고 있어요.

주인장과 긴 이야기를 마치고 다시 한번 찻물을 내린다. 식어버린 물은 처음만큼 진한 향을 피워내지 못했지만, 옅은 찻물이 또 다른 여운을 남겨 입안 곳곳을 혀로 눌러보게 된다. 그렇게 하면 향이 더 깊이 스며들기라도 할 것처럼. 입안에 자두 향을 묵묵히 머금고 이이엄을 나선다. 차와 곁 하기 위해 다시 옥인동에 오게 될 것을 예감하면서.

A. 서울 종로구 필운대로9길 3
H. instagram.com/_eeum 
O. 수-금요일·일요일 12:00-19:00, 토요일 11:00-20:00, 월-화요일 휴무

AROUND 온라인 구독

어라운드의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으로 읽어보세요.

구독 시작하기

에디터 이주연

포토그래퍼 Hae Ran